[한국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맹골도 앞 바다 물을 다 마셔서 우리에 자식들을 건질 수만 있다면은 엄마인 이 에미는 저 거친 바다를 다 마시겠다. 눈물과 바다를 서로서로 바꾸어서 자식들을 살릴 수가 있다면은 엄마인 나는 삼백 예순 날 통곡을 하겠노라 ▲ 삭발을 하는 416 희생자 가족들 도종환 시인이 시를 쓰고 정철호 명인이 작창하여 김수연 명창이 부른 창작판소리 맹골도 앞 바다의 깊은 슬픔이다. 이제 진도 앞바다에서 생떼 같은 젊은 300여 명의 학생들이 세월호 안에 갇혀 죽은 지 벌써 1주기가 돌아온다. 그러나 아직도 진상규명위원회는 꾸려지지 못했고, 진실은 저 깊은 바다 속에 아직 잠겨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세월호 관련 시행령안을 입법예고했고 이에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는 2일 늦은 1시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희생자와 피해가족들을 돈으로 능욕한 정부 규탄 및 배보상 절차 전면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삭발을 했다. 그러면서 416가족협의회는 정부 시행령안을 즉시 폐기하고 특별조사위원회의 시행령안을 수용공포할 것, 정부는 참사 1주기 전에 세월호 인양을 공식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만고절창] 외부에서 일전에 유성기를 사서 각항 노래 곡조를 불러 유성기 속에다 넣고, 해부(該部, 예조) 대신 이하 제 관인이 춘경을 구경하랴고 삼청동 감은정에다 잔치를 배설하고, 서양 사람이 모든 기계를 운전하야 쓰는데, 먼저 명창 광대의 춘향가를 넣고, 그 다음에 기생 화용과 및 금랑 가사를 넣고, 말경에 진고개패 계집 산홍과 및 사나이 학봉 등의 잡가를 넣었는데, 기관(器管) 되는 작은 기계를 바꾸어 꾸미면 먼저 넣었던 각항 곡조와 같이 그 속에서 완연히 나오는지라. 보고 듣는 이들이 구름같이 모여 모두 기이하다고 칭찬하며 종일토록 놀았다더라.” ▲ "말하는 기계"라고 광고한 에디슨식 유성기의 <만세보> 1907년 광고 위는 <독립신문> 1899년 4월 20일 기사 내용인데 레코드 음반 초기 형태인 실린더 레코드를 들려주고 돈을 받았던 “감상소”의 정경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감상소가 봉상시(현 서울역사박물관) 건너편 북물골, 증청방(현재 수송동, 청진동 부근), 광통교(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남대문으로 가는 큰 길을 잇는 청계천 위에 걸려 있던 조선시대의 다리) 같은 곳에서 성업했다고 하지요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희뿌연 매화꽃은 더욱 빛나고 새파란 대나무는 한결 고와라 난간에서 차마 내려가지 못하나니 둥근 달 떠오르기 기다리려 함이네“ 위는 선조 때 여류 시인 이옥봉의 ‘난간에 기대어’에 속에 나오는 “매화꽃”입니다. 매화는 예부터 우리 겨레가 사랑해 오던 꽃으로 요즈음 온 나라가 매화꽃 잔치로 한창입니다. 매화를 사랑한 여성으로는 신사임당의 달인 이매창도 있는데 그녀는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뛰어난 매화 그림을 그렸지요. ▲ 신사임당 딸 이매창 매화그림 강릉 오죽헌 신사임당기념관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1971.12.16 지정) 신사임당 딸 이매창의 매화도가 한 장 전해옵니다. 매창매화도(梅窓梅花圖)로 전하는 이 그림은 가로 26.5㎝, 세로 30㎝의 종이에 그린 묵화로, 굵은 가지와 잔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은은한 달빛아래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는 매화를 실제로 보는 듯 하며, 깔끔한 분위기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오누이 관계인 이옥산이 그린 국화도도 전해옵니다. (국화도는 가로 25㎝, 세로 35㎝ 크기의 종이에 그린 묵화) 요즈음 피는 매화는 예쁜 꽃을 보기 위해 여러 품종을 접붙여 만든 것이라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삼현육각은 일반적으로 피리 2인, 대금 1인, 해금 1인, 북 1인, 장고 1인 등 6인의 연주자가 5종의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형태로 알려져 있다. 맞는 답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단원 김홍도의 무동(舞童)이라는 그림을 보면 무동은 한삼을 뿌리며 춤을 추는데 그 옆에는 6인의 연주자가 앉아서 반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악기 편성이 삼현육각이다. 한국전통음악학회장 서한범 명예교수는 삼현육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삼현육각을 전승하기 위한 최경만 명인(회장)의 삼현육각피리보존회가 어제(3월 31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서한범 교수의 해설로 제1회 발표회를 가졌다. 피리, 대금, 해금, 등 선율악기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의 형태로 멜로디를 주고받으며, 장고와 북이 한배를 짚어나가는 진행이어서 최소한의 편성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편성임이 분명하다는 삼현육각. 공연의 시작은 대영산 곧 민간관악영산회상이었다. 대영산은 조선후기에 궁중이나 지방관아의 잔치에서 무용 반주음악으로 쓰던 음악인 관악영산회상이 민간에서 굿음악, 무용반주, 탈춤반주 따위에 쓰이며, 전승된 곡이다. ▲ 대영산(민간관악영산회상)을 연주하는 최경만 명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추운 겨울이 있어 꽃은 더 아름답게 피고 줄기가 솔잎처럼 가늘어도 꽃을 피울 수 있다며 작은 꽃을 나지막하게라도 피우면 많다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높다고 귀한 것은 더욱 아닐 것이라며 나로 인하여 누군가 한 사람이 봄을 화사하게 맞을 수 있다면 어디에고 사는 보람이 아니겠느냐고 귀여운 꽃으로 말하는 봄맞이꽃“ <봄맞이꽃> - 김윤현 ▲ 봄맞이꽃, 사진작가 이명호 제공 눈 속에서 핀다는 설중매(매화), 눈을 뚫고 핀다는 얼음새꽃은 봄이 오기도 전에 꽃을 피워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런데 이 매화나 얼음새꽃보다 오히려 봄을 제대로 맞이하는 꽃이 있습니다. 바로 앵초과의 봄맞이꽃(Androsace umbellata)이 그 녀석인데 볕이 잘 드는 산기슭의 풀밭이나, 밭둑, 길가, 언덕에서 봄맞이를 하지요. 다른 이름으로는 보춘화(報春花), 점지매(点地梅), 동전초(銅錢草), 후선초(喉癬草), 후롱초, 봄마지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봄맞이꽃은 한해살이 또는 두해살이풀로 높이 10cm안팎이이어서 사람이 키를 낮추고 보지 않으면 잘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잎이 뿌리에서 나와 지면으로 퍼져 마치 방석 모양으로 촘촘히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본래 이덕무는 독서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서얼의 처지기에 벼슬을 할 수도 없었고, 오로지 책을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지요. 이덕무는 《간서치전(看書痴傳)》에서 목멱산 아래 바보가 있다고 하여 자신을 독서에 미친 매니아 곧 “독서광(讀書狂)”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그의 벗 이서구(李書九, 1754~1825)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내 집에서 가장 좋은 물건은 단지 《맹자(孟子)》 7책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돈 2백 잎에 팔아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冷齋) 유득공(柳得恭)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하였소. 그런데 영재의 굶주림 역시 오랜 터이라, 내 말을 듣고 즉시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다가 나에게 마시게 하였소. 이는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러고는 맹씨와 좌씨를 한없이 칭송하였으니, 우리가 1년 내내 이 두 책을 읽기만 하였던들 어떻게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었겠소?” ▲ 청장관 이덕무가 쓴 편지 이덕무처럼 유득공도 서얼 신분으로 가난에 굶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나는 생각건대, 세자를 세워 적통을 수립하는 것은 종조를 계승하기 위함이요, 지위를 정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은 백성들의 기대를 묶어 놓는 것이다. 이는 진실로 대대로 중하게 여겼던 일이니 어찌 어리다고 해서 늦출 수 있겠는가. 이에 옛 법을 따라 삼가 아름다운 식전을 펼친다. (중간 줄임) 이미 훌륭한 소문이 일찍이 전파되었으니 마땅히 책호를 하루속히 정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의 뜻에 따라 이에 세자를 정하고 이제 너를 왕세자로 명한다.” 위는 현종이 1667년(현종 8) 현종과 명성왕후 김 씨 사이에 태어난 원자(뒤에 숙종 : 1661~1720)를 7살이 되던 해 관례를 행한 뒤 1월 22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세자로 책봉하는 의식을 치르기 전 발표한 책례교문(冊禮敎文)의 일부입니다. 어린 원자가 자라나서 나이가 차면 선왕의 뒤를 이을 왕세자로 책봉됩니다. 원자가 왕세자로 책봉(冊封)되는 의례를 책례(冊禮)라고 하였으며, 왕세자 책봉을 준비하는 임시 기구인 책례도감(冊禮都監)이 만들어졌습니다. 책례도감에서는 책봉에 필요한 의장(儀仗)과 물품을 준비하고, 행사가 끝나면 《세자책례도감의궤世子冊禮都監儀軌》를 펴냈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푸른하늘 대낮에 벽력소리 진동하니 6대주(大州)의 많은 사람들 가슴이 뛰놀았다. 영웅 한번 성내니 간웅(奸雄)이 거꾸러졌네 독립만세 세 번 부르니 우리조국 살았다.” 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圭植) 선생이 안중근 의사 의거에 대해 쓴 시입니다. 오늘은 우리 겨레의 원수 이등박문을 처단한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한 지 105주년이 되는 날이지요.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아침 9시 무렵 하얼삔역 이등박문이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흐체프와 함께 걸어가자, 안 의사는 권총을 빼들고 이등박문을 향하여 총을 쏘아 4발을 모두 명중시켰습니다. ▲ 안중근 의사와 어머니 조마리아 애국지사의 시화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안중근 의사는 이등박문을 쓰러뜨리고 이어 뒤를 따르는 일본 총영사 천상준언(川上俊彦), 비서관 삼태이랑(森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전중청태랑(田中淸太郞) 등을 차례로 거꾸러뜨리고 하늘을 향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지요.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 겨레는 물론론 청·일전쟁 이래로 일본제국주의의 위협에 떨고 있던 중국의 국민들에게도 큰 기쁨의 소식이었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견마꾼은 사람이 탄 말이나 당나귀를 끄는 마부를 말합니다. 조선시대의 사복시(司僕寺)에 소속되어 임금이나 세자·군의 경마를 잡던 견마배(牽馬陪)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견마배는 중종 때에 잡직 종7품을 받았고, 거달(巨達)이라고도 하였지요. 견마는 원칙적으로 문무관에게만 허용되었으나, 민간에서도 성행하였습니다. 조선 말기까지도 양반이 출입을 할 때에는 반드시 과하마(果下馬, 키가 3척-약 90cm 정도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고서도 능히 과실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다는 데서 유래된 작은 토종말)라도 타고 다녀야 체면치레가 되었기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 견마꾼이어서 편발의 동자 곧 머리를 뒤로 묶어 길게 땋은 어린 아이까지도 견마를 잡히었다고 합니다. ▲ 김홍도의 "안릉신영도"에는 말을 견마꾼들이 끌고 있다. 그러나 멀리 나들이를 해야 할 때에는 마방(馬房, 마굿간 있는 주막집)에서 말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도 말과 함께 따라오는 것이 견마꾼이었습니다. 이들 견마꾼들은 나그네가 가야 할 곳의 지리까지도 훤하게 꿰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편리했지요. 또 여울을 건너야 할 때도 견마꾼이 있으면 별도의 월천꾼(업어서 여울을 건네주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우리나라는 가면극이 여러 곳에 있는데 북쪽에는 함경도에 북청사자놀음이 있고 황해도에는 해서가면극 곧 강령, 은율, 봉산탈춤이 있습니다. 중부지역에는 양주별산대와 송파산대놀이가 있으며, 동해안쪽에는 강릉 관노가면극과 구룡포의 호탈굿놀이가, 또 안동에는 하회별신굿 탈놀이도 있지요. 남부지역에는 통영, 고성에 오광대 탈놀이가 있고, 부산 쪽에는 동래야류와 수영야류가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는 그 역사가 200년이 훨씬 넘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부산 동래에 전승된 이 가면극에 “야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놀이가 주로 들판에서 놀아졌다고 하여 “야유(野遊)”가 되었고, 이 야유가 부르기 쉽도록 “야류”로 바뀐 것으로 봅니다. 그밖에도 이 놀이를 밤에 놀았다고 하여 야유(夜遊)라 불렀으며, 또 극의 내용이 말뚝이가 양반을 조롱한다고 하여 야유(揶揄)라 하기도 했고, 양반들이 백성들을 괴롭혔으므로 이를 응징하기 위해 쇠를 두드리듯 두들겨 주고 싶은 심정에서 야유(冶遊)라고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 동래야류 가운데 말뚝이탈, 원양반탈, 큰문둥이탈(왼쪽부터) ▲ 동래야류에서 말뚝이가 등장한다(문화재청)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