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정원(庭園)은 집에 딸린 뜰이나 동산을 말한다. 조경(造景)은 식물재료토목재료물 또는 조형물을 이용하여 쾌적한 생활공간을 꾸미는 일이라고 정의하지만 사실은 정원을 꾸미는 일이다. 한중일 세 나라의 정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 것과 자연을 축소시켜 정원에 끌어들이는 일본에 견주면 자연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한국의 정원이다. 그 정원과 조경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할 2014 대한민국 조경문화박람회가 지난 6일부터 10일까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그 박람회를 잠시 엿보기로 한다. ▲ 2014 대한민국 조경문화박람회 들머리 ▲ 2014 대한민국 조경문화박람회에서 즐거운 한 가족 ▲ 공존 ▲ White Dream ▲ 슈퍼맨 ▲ Dripping,아이들의 신나는 놀이터 ▲ Long Journey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영조임금은) 수라[水刺]를 올릴 때면 소관부서에 단단히 타일러서 그릇 수를 줄이도록 하시고 높이 괴어 올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경연에 참여했던 신하 가운데 음식 가짓수가 너무 적다고 말한 사람이 있자, 말씀하시기기를, ’경들은 이것을 보고 적다고 하는가? 나는 덕이 적어서 매번 밥상을 푸짐하게 대하면서 뒤에 모신 선왕의 위패를 바라보게 되면 오르락내리락하시는 영령이 굽어보시는 것과 같아 지나치게 즐기는 것을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위는 1832년(순조 32) 9월 15일 영의정 남공철이 “검소함을 숭상하는 일에 대한 상소”를 올리면서 순조임금에게 영조임금의 예를 든 것입니다. 영조는 83살까지 산 조선의 임금 가운데 장수를 한 임금으로 먼저 꼽힙니다. 그래서 영조가 여러 가지 좋은 음식으로 호사를 누렸을 것으로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후대의 임금들이 본받았을 정도로 영조의 수라상은 검소했지요. ▲ 영조임금이 좋아했던 타락죽(농촌진흥청 제공) 그런 가운데 영조임금도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영조는 먼저 우유에 쌀을 갈아 넣고 끓인 타락죽(駝酪粥)을 즐겨 먹었습니다. 그리고 인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로 입은 타격으로 회사가 무너지다시피 한 위기를 헤쳐 나올 무렵이었다. 그런데 419혁명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자 정부와 기업 사이는 정경유착 관계고, 부정축재한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이 많다.라고 시끄러웠다. 웬만한 큰 공사는 으레 정부 공사였기에 큰 건설업자는 정부를 끼고 치부했다고 덮어놓고 공격을 당했다. 이때 현대건설은 정경유착이 아니라 자력으로 컸음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해외 진출을 하지 않으면 국내 건설기업은 조만간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라 예견되었다. 그래서 정주영은 60년대 초부터 현대건설의 전환점을 해외 진출에 걸었다. 태국 고속도로 건설 공사, 큰 적자 그러나 도약 1965년 9월 태국 파티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540만 달러에 따냈다. 한국 건설사상 나라밖 공사로는 처음이었다. 서독, 이탈리아, 덴마크 건설업자들이 이미 진출해 난공불락의 성을 쌓고 있는 가운데 뒤늦게 태국 현장에 뛰어든 현대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기후, 풍속, 법률이 모두 생소할 뿐더러 언어가 다른 외국 노동자를 쓰면서 겪어야 했던 현대의 시련은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이제부터는 참으로 겨울이라 사람들은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데 입동에 중대한 두 가지가 있으니 한 가지는 시골농가에서 보리 가는 일이니 보리는 대개 입동 전에 갈어야 수확이 많다고 한다. 금년같이 추위가 일찍 오는 해는 더욱더 일찍 갈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경향을 막론하고 겨울 식량으로 중대한 짐장(김장)도 입동 전후에 하여야만 되는 것이니 이제 경성 시내의 진장(김장)시세를 소개하면 배차 백통에 오원, 무 한 접에 일원오십전, 고초는 오승 한말에 칠십전 가량이오다” 이는 동아일보 1921년 11월 8일 기사로 보리갈이와 김장이 입동의 중대한 행사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 김장 직전의 배추밭(왼쪽), 함양의 곶감 말리는 정경 오늘은 입동(立冬)입니다. 예전에는 입동을 즈음하여 농가에서 고사를 많이 지냈습니다. 대개 음력으로 10월 10일에서 30일 사이에 날을 받아 햇곡식으로 시루떡을 하고, 제물을 약간 장만하여 곡물을 저장하는 곳간과 마루 그리고 소를 기르는 외양간에 고사를 지냈지요. 고사를 지낸 뒤에는 이웃들과 고사 음식을 나눠먹었으며 농사철에 애쓴 소에게도 고사 음식을 주었습니다. 글쓴이 어렸을 때만 해도 입동 무렵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수봉은 꾸준히 재산을 모아 노비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는데 성공했다. 평민이 된 그는 노비라는 흔적을 완전히 지워야 했다. 성씨를 얻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성씨는 삼국시대 왕족부터 사용하기 시작해 귀족을 거쳐 고려시대에는 일반 평민들도 대개 성을 갖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노비들도 점차 성씨를 얻어가는 과정에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노비들은 이름 외에 성이 따로 없었다. (줄임) 양반들은 자신의 가계를 좀 더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면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가계를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이란 책을 낸 권내현 교수는 이 책에서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이라는 흥미로운 추적을 해나갑니다. 수봉은 바로 노비 출신으로 갖은 노력과 우여곡절을 거쳐 성과 본관 이름을 모두 갖추게 되어 결국에는 평민으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노비들은 성과 본관이 모두 없었는데 일부 노비 가운데는 성이나 본관 가운데 하나를 호적에 올린 사람도 있고 갓동(개똥), 막동, 석석이처럼 이름만 오른 사람도 있지요. 이는 1678년의 호적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 《노비에서 양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충북 증평군 증평읍 사곡리에는 나라의 변고를 세 번이나 알아맞힌 용한 우물이 있습니다. 오죽이나 유명하면 충청북도 기념물 제143호(2008.8.1 지정)로 지정되었을까요? 전쟁이나 침략 따위의 어지러운 나라의 변고를 알려주는 사곡리 우물은 증평시가지에서 충주 방면으로 가다 사곡교 근처 2㎞ 쯤 지점인 사곡2리 사청마을에 있습니다. 이 우물이 생긴 유래는 조선 제7대 왕인 세조(世祖, 1455∼1468)가 조카인 단종(端宗, 1452∼1455 )을 폐하고 왕위를 빼앗은 뒤 가뭄이 계속되던 병자년(1456) 어느 무더운 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초목이 시들어가고 땅이 쩍쩍 갈라져 가던 어느 날 이 마을을 찾은 노스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노스님은 마침 한 집에 들러 아낙에게 물 한 그릇을 청했지요. 그러나 집안에 마실 물조차 없던 아낙으로서는 난감했습니다. 하지만 노스님의 간청을 들어주기 위해 마을에서 이십 여리 떨어진 먼 곳으로 물을 뜨러 떠났다가 그만 해질녘에 돌아오게 됩니다. 이 사정을 들은 노스님은 아낙의 수고에 고마워하면서 지팡이로 땅을 몇 번 치고는 샘이 솟을 만한 우물자리를 알려주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흰 바탕에 눈부신 푸른빛을 문양으로 넣은 청화백자는 백옥처럼 희고 고운 백자와는 또 다른 맛을 풍기는 예술품입니다. 조선에서 청화백자가 언제부터 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세조연간(1455-1468)에 청화백자의 물감을 나라 안에서 개발하려고 하는 노력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에 제작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조선시대 청화백자로 가장 오래된 것은 1456년에 만든 세조의 장모이자 윤번의 아내인 ‘흥연대부인묘지’입니다. 이 시기의 묘지(墓誌)는 분청사기가 주류인데 견주어 이것은 청화백자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청화백자는 문인이나 지식인 취향을 반영한 사군자, 산수, 인물, 동물화를 그려 넣기도 하고 분재나 괴석, 화초를 그릇 면에 가득히 채워 넣어 그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십장생이나 봉황, 호랑이, 박쥐, 복숭아와 같은 장수와 복을 비는 마음을 그리기도 했지요. 청화백자 작품으로는 구름봉황무늬 사각접시, 보상화무늬합, 모란무늬병, 모란무늬대발, 괴석꽃무늬 사각합, 산수무늬항아리, 난초무늬조롱박모양병과 같이 예전에는 다양한 그릇으로 쓰였을 테지만 그려 넣은 청화 무늬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85년 전인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날입니다. 이날을 맞아 이경채 선생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경채 (1910 ~ 1978) 선생은 광주 출신으로 1924년 광주고보에 진학하면서 식민지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실제로 선생은 학교에서 민족적 차별, 비교육적 처사를 당하면서 이에 격분한 학생들과 함께 집단적인 등교 거부 투쟁으로 동맹휴학을 펼치는데 앞장섭니다. ▲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경채 선생과 재판 기사 또한 선생은 1928년 광주고보 재학 당시 일제의 천황제를 비판하는 문서를 인쇄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송정리역 등에 붙이게 되는데 이 때문에 “불온 문서 제작 혐의”로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됩니다. 선생이 퇴학을 당하자 광주고보를 비롯한 이웃 학교 학생들이 식민통치에 대한 항거의 뜻에서 동맹휴학을 하게 되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불을 붙게 됩니다. 그 뒤 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으나 임시정부와 내통한 혐의로 모진 고문을 당한 뒤 1933년 상해로 망명길에 나섭니다. 상해에서는 윤봉길 의거 이후 강제 휴교된 인성학교를 다시 개교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던 정주영은 어느 날 자동차 수리비를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자신은 자동차 수리비로 고작 몇 백 원을 받아 가는데, 건설업자들은 건설 공사비로 몇 만원을 받아가는 것을 보고 건설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함께 사업을 하는 친구는 물론 식구들도 팔짝 뛰었다. 안 됩니다. 건설업을 하려면 한두 푼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럴 만 한 돈도 없고, 더구나 경험도 없는 상태로 시작한다면 섶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그동안 어렵게 일구어놓은 것마저 무너집니다. 건설공사나 토목공사는 자동차 수리처럼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공사는 일 년도 걸리고 삼년도 걸리는데다가 요즘은 자고나면 물가가 오르니 섣불리 공사를 맡았다간 단박에 망해요. 그러나 주위가 모두 반대해도 자신의 뜻을 굽힐 정주영은 아니었다. 정주영이 조선소를 하려고 할 때도 역시 그랬다.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는 한결 같았다. 몇 백 톤짜리 나무배만 만들던 보잘 것 없는 기술만 가진 우리나라에서 더구나 배는 만들어 본 적조차 없고 오로지 건설만 해오던 현대건설이 큰 바다에 띄울 거대한 배를 만들 수는 없다는 거였다. 그러나 정주영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1월 1일 인사동에서 비구니 스님의 전통한지공예전이 열린다 하여 나들이를 했다. 경북 청도에서 영담한지미술관을 열고 있는 영담 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직접 외발뜨기로 한지를 직접 떠내어 수행의 한 과정으로 작품을 만든다. 한쪽에서는 스님이 만든 한지로 작업한 다른 이들의 작품도 함께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오는 4일까지 계속된다. ▲ 마음의 경전, 영담 스님 ▲ 하나를 향하여, 영담스님 ▲ 자모, 영담스님 스님은 말한다. 얽히고설킨 닥섬유가 수십 번의 물질로 겹겹이 쌓여 한 장의 종이가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외연들과 내면의 신명이 조화를 이루어 서로 품으며, 자연물감을 만나 또 한 세계를 연출하는 자연 앞에 나는 지휘자로 때론 방관자로 물성과 혼연일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다. 영담스님의 작품을 보려는 신도들이 연신 찾아온다. 그걸 보면 분명 스님의 한지공예는 수행의 한 과정임이 분명하다. 허허 웃으며 맞는 스님에게서 위엄은 보이지 않는다. 맘 따뜻한 한 부처가 보일 뿐이다. 전통한지공예 작품도 보고 한 스님의 수행과정도 엿볼 수 있는 전시회에 나들이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