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지난 12월 3일 서울 종로구는 신문로 1가에 있었던 원각사를 옛 모습 그대로 되살릴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원각사(圓覺社)는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던 한국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입니다. 원래 이곳은 1902년 세운 협률사라는 국립극장이 있었는데 1906년 폐지령이 내려지자 1908년 친일파 이인직이 나라의 인가를 받아 이름을 원각사로 바꾸고 연극 전용극장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 원각사는 1914년 불이 나기 전까지 이인직의 장편소설 혈의누, 신세계 등 신극과 판소리, 무용, 영화 등을 공연한 근대식 공연문화의 요람이었지요. ▲ 근대 공연문화 요람이었던 원각사의 옛 모습(종로구 제공) 그런데 서울에는 이 원각사 말고 절 원각사(圓覺寺)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가 그것인데 세조 때 지었고 보신각종을 보관했던 서울에서 가장 큰 절이었지요. 그런데 《중종실록》 9년 8월조에 보면 연산군 때 이 원각사는 운명을 다했습니다. 호조에서 원각사가 장차 쓰러지게 될 터인즉, 그 재목을 나라에서 영선(營繕, 건축물 따위를 새로 짓거나 수리함)하는 데 썼으면 한다.라고 아뢰자, 임금이 그렇게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 신윤복이 스스로 감격에 겨워 한 그림, 미인도 ▲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신윤복(申潤福:1758 ~?)의 미인도,114.245.7㎝, 간송미술관 소장, 왼쪽 / 공재 윤두서의 손자 윤용의 미인도, 해남 녹우당 소장 이 조그만 가슴에 서리고 서려 있는 여인의 봄볕 같은 정을 붓끝으로 어떻게 그 마음마저 고스란히 옮겨 놓았느뇨? 우리가 익히 아는 미인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이 그렸는데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스스로 감격에 겨워 그림에 이런 글을 적어 놓았다.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생활사박물관 10》에 보면 다리(가체)를 구름처럼 얹은머리에 동그랗고 자그마한 얼굴, 둥근 아래 턱, 다소곳이 솟은 콧날과 좁고 긴 코, 귀밑으로 하늘거리는 잔털이라는 표현으로 이 여인은 우리 전통미인의 전형이자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평가했다. 이 미인도는 비단천 먹 채색으로 그린 것이며, 사실적 기법으로 정통초상기법을 따라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또 윤곽선(쌍선)을 그린 후 그 안에 채색하는 구륵법의 그림이라고 한다. 화폭은 113.9cm x 45.6cm로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에 소장되었다. 다만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칠패의 생어전에 각색 생선 다 있구나. 민어, 석어(조기), 석수어(금조기)며, 도미, 준치, 고도어(고등어)며, 낙지, 소라, 오적어(오징어, 까마귀를 잡아먹는 고기)며, 조개, 새우, 전어로다. 남문 안 큰 모전에 각색 실과 다 있구나. 청실뇌, 황실뇌, 건시, 홍시, 조홍시(감의 하나)며, 밤, 대추 잣, 호도며, 포도, 경도, 오얏이며, 석류, 유자, 복숭아며, 용안(자양분이 많고 단맛이 있는 과일), 협지 당재추로다. 상미전 좌우 가게 십년지량을 쌓았어라. 하미, 중미, 극상미며, 찹쌀, 좁쌀, 기장쌀과 녹두, 청태, 적도, 팥과 마태, 중태, 기름태(콩나물로 기르는 콩)로다. ▲ 19세기 한양풍경을 노래한 한양가(漢陽歌) 위는 1844년(헌종 10)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지은 풍물가사(風物歌辭) 한양가(漢陽歌)의 일부로 한양의 시장 풍경입니다. 여기에 그린 시장에는 여러 가지 생선, 과일, 곡식들이 있다는 것인데, 청실뇌, 용안, 협지, 당재추, 마태, 중태처럼 지금을 잘 알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모두 1,528구의 장편가사로 한양태평가(漢陽太平歌) 또는 한양풍물가(漢陽風物歌)라는 이본들이 있지요. 중요한
휼민비 당시 고마움 증언소작인에 소 나눠줘 '爲民' 정신 실천 광주학생사건 주도자들 모두 남파고택 사람들로 항일정신 투철 후손들 교육운동 매진 청운야간중학교 세워 20년간 2천명배출 한가위 제문‧결혼식 축문등 한글로 지어 뜨거운 한글사랑 실천 ▲ 현 남파고택 종손 박경중 선생 [그린경제=김영조 문화전문기자] 나주로 취재를 가기 이틀 전 남파고택 종손 박경중 선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눔의 철학을 취재하신다고 하셨지요? 저희 집안에선 그리 대단한 나눔을 실천한 것도 아닌데 멀리서 오셔서 실망하시면 어쩌죠? 열 번의 취재에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러나 기자는 남파고택에 뭔가 분명히 있다. 다른 종가와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란 이상한 확신이 생겼다. 더구나 이곳은 강릉 선교장 이강백 관장(한국고택협회 회장)의 추천이 있었지 않은가?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 종손의 이름을 따 박경중가옥이라 했지만, 최근 이 집을 지은 이의 호를 따서 남파고택으로 이름을 바꿨다. 저희 집안이 그래도 넉넉했을 때는 고조인 박(朴) 자, 재(在) 자, 규(珪) 자 할아버지 시절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내셨는데 1860년 무렵 300~400석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에 미쳐서 사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조선 명종 때 윤원형처럼 땅투기에 미쳤다면 지벽(地癖)이고, 술 마시고 눈밭에 얼어 죽었다는 화원 최북은 주벽(酒癖)이며. 시(詩) 짓기에 빠진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는 시벽(詩癖)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돈 밝히는 전벽(錢癖), 차에 미치면 다벽(茶癖), 틈나는 대로 손을 씻는 결벽(潔癖),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상소꾼 소벽(疏癖)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쳐서 사는 벽(癖)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박제가는 “벽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 성간의 일화가 나오는 서거정이 쓴 《필원잡기(筆苑雜記)》 특히 책읽기에 빠진 책벌레는 서음(書淫) 또는 전벽(傳癖)이라 했다는데 구소수간 한 권을 천 번이나 읽었다는 세종도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종 때 성간(成侃, 1427~1456)이란 사람도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서거정이 쓴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보면 성간의 일화가 나옵니다. 성간은 제자백가는 물론 천문지리의약불경산법역어 따위를 모두 섭렵했고 누구네 집에 희귀본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반드시 구해보았다고 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길고 긴 나의 학문의 바다 여정에서 직접 간접으로 나의 나아갈 길을 지도해 주신 스승이 적지 아니하였지마는, 그중에서 나에게 결정적 방향을 가리켜주었고, 따라서 나의 추모의 정한을 가장 많이 자아내는 스승님은 조선 청년이 누구든지 다 잘 아는 근대 조선어학 가장 큰 공로자인 한힌샘 주시경 선생이다. (중략) 오늘날 같으면 조선어 선생도 여기저기서 구할 수 있지마는 그 당시에는 주 선생 한 분뿐이었다. 커다란 책보를 끼고서 조그만 오두막집을 나서면 동분서주하여 쉴 사이가 없었다. 안동 네거리에서 동으로 가야 할지 서로 가야 할지 깜빡 잊어버리고 헤매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한힌샘 주시경 선생 위는 잡지 조광 1936년 1월호에 실린 외솔 최현배 선생의 조선어의 은인 주시경 선생이란 글 일부분입니다. 어제는 우리말 말본(문법)을 처음 바로잡고 《국문문법》(1905),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말》(1908?), 《국문연구》(1909), 《고등국어문전》(1909?),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 같은 많은 책을 써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두째 절기인 동지(冬至)로 해가 적도 아래 23.5도의 동지선(남회귀선) 곧 황경(黃經) 270도의 위치에 있을 때여서 한해 가운데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옛날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였다. 해가 부활한다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라는 말처럼 <동지첨치(冬至添齒)>의 풍속으로 전하고 있다. 또 동지는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흘레(교미, 交尾)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부른다. 하선동력과 황감제 궁중에서는 설날과 동지를 가장 으뜸 되는 잔칫날로 생각하는데 이때 회례연(會禮宴, 잔치)을 베풀었다. 해마다 예물을 갖춘 동지사(冬至使)를 중국에 파견하여 이날을 축하하였다. 《동국세시기》에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친다. 나라에서는 이 책에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어새를 찍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을 단오에 부채를 주고받는 풍속과 아울러 <하선동력(夏扇冬曆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참으로 슬기로운 민족이었습니다. 특히 발효음식을 만들어 먹었던 것에서 더욱 그렇지요. 그런데 발효음식을 만드는 데는 옹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어쩌면 김장문화도 옹기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지도 모릅니다. 숨 쉬는 옹기는 참으로 과학적인 그릇이었지요. ▲ 겹오가리 (아산 옹빔박물관 제공) 여기 옹기 가운데 좀 더 특이한 항아리가 있습니다. 바로 겹오가리가 그것인데요. 항아리 위쪽에 그냥 뚜껑이 덮이는 것이 아니라 위 부분에 그릇을 하나 엎어놓은 듯합니다. 그리고 엎어놓은 그릇과 원래 항아리 사이에는 마치 도랑을 파 놓은 것처럼 홈이 파져 있고 거기엔 물을 붓게 되어 있습니다. 물을 부으면 성 둘레에 도랑(해자)을 파놓으면 적이 성 안에 침투할 수 없는 것처럼 벌레가 항아리 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지요. 고추장, 된장 항아리에 쓰일 수 있는 그릇입니다. 겹오가리는 또 술을 빚는 도구로도 씁니다. 증류주를 만들 때 역시 이 도랑에 찬물을 부으면 항아리 안에 알코올이 맺혀서 떨어지도록 한 원리지요. 겹오가리란 겹으로 나뉜 항아리라는 뜻으로 붙은 이름입니다. 오가리'는 항아리를 전라도 쪽에서 부르는 말이지요. 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피나는 노력 끝에 서권기 문자향이 우러나오는 수묵화 ① 수묵화 정의 : 현란한 채색을 피하고 먹만으로 그리는 그림 양식 ② 수묵화(水墨畵) 기법 : 용필(用筆) 곧 붓놀림과 용묵(用墨) 곧 먹다룸의 두 가지. ③ 수묵화의 격(格)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 곧 명필은 단순히 글씨 연습만 반복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인문적 교양이 그 사람의 몸에 배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는데 있다고 한다. ④ 먹을 다루는 방법 : 발묵(潑墨) 곧 먹 퍼짐과 파묵(破墨) 곧 먹 번짐 외에 적묵법, 갈묵법, 조묵법, 습묵법, 비묵법 등 여러 가지가 있다. ⑤ 먹의 빛깔 : 농묵(濃墨 곧 짙은 먹빛보다 더 검은 초묵(焦墨) 곧 숯처럼 까칠한 먹빛, 중묵(中墨) 곧 중간색의 먹빛, 담묵(淡墨) 곧 옅은 먹빛, 청묵(淸墨) 곧 맑은 먹빛 등 5묵법(五墨法) 수묵화의 대표 사군자 ▲ 강세황 사군자 병풍(종이에 먹) 예부터 한국화에는 매화ㆍ난초ㆍ국화ㆍ대나무를 소재로 하여 수묵으로 그린 사군자(四君子)라는 그림이 유난히 많다. 이는 수많은 식물 중에서도 이 매난국죽(梅蘭菊竹)의 의미가 남다르며, 그 생태적 특성이 모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현재 보존되어 있는 서대문형무소 수감 181명의 여성 수감자 가운데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의 공훈을 인정받은 인물은 총 13명으로 6.62%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3․1운동 관련이 7명으로 절반을 넘는다. 그래도 2006년부터는 1명씩 이나마 꾸준히 발굴하여 포상하였으나 201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아예 없는 실정이다. ▲ 주제발표자 오병한 국가보훈처 연구원(왼쪽),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박경목 관장 이는 12월 17일 늦은 2시에 열린 독립기념관․국가보훈처 제7회 공동 월례연구발표회에서 발표자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박경목 관장의 발표 내용 일부다. 박 관장은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여수감자 수형기록카드를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수감 감옥과 연령․출신지역 여수감자의 특징과 형량 따위를 분석해 냈다. 그러면서 기록과 근거를 바탕으로 포상하는데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명히 인정할 수가 있음에도 그 실적은 지지부진하다며, 나라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독립운동 하였으나 기리지 않는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보였다. 발표 가운데 또 눈에 띄는 대목은 193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