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달 28일 문화재청은 대구 팔거산성(대구광역시 기념물)에서 7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목간 11점이 대구 지역에서 처음 출토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조사 결과, 전체 11점 가운데 7점에서 글자가 보이고, 그 가운데는 제작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간지(干支)와 곡식 이름도 등장합니다. 특히 보리를 뜻하는 맥(麦)와 벼를 이르는 도(稻), 콩 곧대두(大豆)이라는 곡식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산성에 물자가 집중된 상황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산성의 행정 또는 군사기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간(木簡)은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대나무로 된 죽간(竹簡)과 함께 글자를 기록하려고 썼던 목편(木片) 곧 나무 조각입니다.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처음 발견된 목간은 지금까지 400여 점이 나왔습니다. 목간은 보통 나무를 너비 약 3cm, 길이 약 20∼50cm, 두께 3mm 정도의 긴 판자모양으로 잘라 거기에 먹으로 글을 썼지요. 그렇지만, 목간 가운데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남근 모양의 백제 목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간은 일본 목간 연구의 권위자인 히라카와 미나미 국립역사민족박물관 교수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할머니의 연등 - 유 봉 수 오늘은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시골 작은 절집에도 이웃 사람들 모여 저마다의 연등을 받아 들고 절 마당 곳곳에 꽃등을 달고 있습니다.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이 구석진 해우소 쪽으로 들고 갑니다 “할머니! 제가 좋은 곳에 달아드릴게요 왜 하필 이 구석진 여기로 오셨어요?” “우리 스님이 어둡고 구석진 곳을 밝혀야 진짜 등불을 밝히는 것이라 말씀했어요.” 이제 다음 주 19일이면 불기 2565년 ‘부처님 오신날’이다. 그래서 곳곳에 연들이 달린다. 대낮에도 켜는 연등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자 함”이란다. 그런데 많은 이는 연등을 걸어놓고 소원을 빈다. 무엇을 빌었을까?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어에서 “연기(緣起)의 가르침은 단지 불자(佛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평화와 행복은 우리 인류 모두가 함께할 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라는 그 지엄한 진리를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뜻깊은 불기 2565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비록 힘드시더라도 모두가 환희로운 마음을 가득 담아 이웃과 함께 염화미소를 나누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혼자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폭이 세로 113.6cm, 가로 49.1cm인 8폭 병풍 <태평성시도>가 있습니다.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성시(城市) 곧 조선의 한양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묘사한 작품인데 모두 8폭의 화면에 2,120명 정도의 인물과 300여 마리의 동물 그리고 각종 그릇과 건물, 도로 등 번화한 도시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속화입니다. 영ㆍ정조 시대에는 상공업이 발달함으로써 도시인들의 소비생활이 활발해졌고 저잣거리(시장)는 연희패 등의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쳐났습니다. 따라서 그림 속 가게들은 고급스러운 마감재와 실내장식이 돋보이고 그 안에 옷, 푸성귀(채소), 고기, 생선, 건어물 등의 식생활용품과 빗, 장도, 담뱃대, 칼, 안경, 우산, 도자기 등의 기호품 그리고 서화, 서적, 지필묵 등의 문방구와 옹기, 광주리, 대자리 등의 생활용품 등이 가득하지요. 그 가운데서도 특히 종이를 파는 지전(紙廛)과 책을 파는 서점, 서화를 파는 서화전은 당시의 문화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때는 가게에 간판을 거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노리개는 조선 여인네들의 한복 저고리 겉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차는 꾸미개(장신구)입니다. 모양이 다양하면서도 화려하고 섬세한 노리개는 궁중 사람들은 물론이고,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즐겨 찼습니다. 몸에 차는 꾸미개는 원래 칼이나 숫돌 같은 삶에 필요한 물건을 허리에 찼던 북방 유목민들의 풍속이 전해진 것이라 하지요.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시대 귀족 부녀자들이 허리띠에 금방울금향낭(金香囊, 향주머니)을 찼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허리띠에 달았던 꾸미개들은 고려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자 허리 대신 고름에 달게 되었지요. 노리개는 대삼작, 중삼작, 소삼작으로 나뉘는데 대삼작노리개는 궁중이나 양반가의 혼례용으로 쓰였고, 중삼작노리개는 궁중과 양반들의 일상에서, 소삼작은 젊은 여성이나 아이들이 차던 것입니다. 특히 대삼작은 옥나비, 밀화불수(密花佛手, 밀랍 느낌의 천연호박으로 만든 꾸미개), 산호가지, 은장도 따위로 꾸며 매우 화려하지요. 노리개는 띠돈, 끈목, 꾸미개, 매듭, 술의 5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띠돈(帶金)은 노리개의 맨 윗부분에 달린 고리로서 노리개 전체를 옷끈에 달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4월 21일 문화재청은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을 보물 제2125호로 지정했다고 밝혔습니다. 5~6세기 무렵 영산강유역에는 복암리고분군, 정촌고분, 영동리고분군 등 대형 고분이 축조되었는데, 그중 정촌고분은 1,500여 년 전 백제ㆍ마한 문화를 가장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고분이면서 도굴 피해를 보지 않아 매장의 원형을 알 수 있어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무덤입니다. 정촌고분 1호 석실 제3목관에서 발견된 이 금동신발은 좌우 신발 한 쌍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완벽한 모습으로 출토되었으며, 특히, 발등 부분에 붙은 용머리 꾸미개(장식)는 현존 삼국 시대 금동신발 가운데 유일한 사례로 주목을 받았는데 국립나주문문화재연구소의 최근 과학적 분석 결과에 따르면 신발의 주인은 40대 여성인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 금동신발은 형태와 제작기법, 무늬 등에서 고창 봉덕리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매우 비슷합니다. 얇은 금동판 4장으로 바닥판과 좌우 옆면판, 발목깃판을 만들어 서로 작은 못으로 연결하였고 무늬를 뚫새김(투각)해 세부를 선으로 묘사한 방식 등 고대 금속공예 기법이 잘 반영되어 있지요. 아울러 육각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는 엉뚱한 말에 밀려 본래의 우리말이 잊혀 가는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바로 “혼인(婚姻)”도 그 하나로 지금은 모두가 “결혼(結婚)”이란 말을 쓰고 있지요. 뭐가 문제일까요? 먼저 혼인이란 말을 살펴보면 혼(婚)은 혼인할 "혼"이기도 하지만 "아내의 친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姻)은 "사위의 집"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혼인이란 말은 아내와 사위 곧 “남녀가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結婚)”이란 말은 인(姻)이 없으므로 남자가 장가간다는 뜻만 있고 여자가 시집가는 것에 대한 의미는 없습니다. 따라서 “혼인”에 견주면 “결혼”은 남녀차별이 담긴 말이라 할 수 있지요. “혼인”이란 말뿐이 아니라 우리 겨레는 혼인하는 시각도 양을 대표하는 해와 음을 대표하는 달이 만나는 시각(해와 달은 하루에 새벽과 저녁 두 번 만난다) 가운데 저녁 시간인 유(酉)시 곧, 5시에서 7시 사이에 치렀는데 이는 음과 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하려는 철학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남녀의 짝을 배필(配匹)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酉)시에 나(己)의 짝(配)을 맞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雨後山中石澗喧(우후산중석간훤) 비 온 뒤 산중 바위틈에 시냇물 소리 요란한데 沈吟竟日獨憑軒(침음경일독빙헌) 시 읊으며 종일 홀로 난간에 기대있네 平生最厭紛囂地(평생최염분효지) 평생에 가장 싫은 것은 어지럽고 시끄러운 곳인데 惟此溪聲耳不煩(유차계성이불번) 오직 이 시냇물 소리는 귀에 거슬리지 않네 이 시는 조선 성리학의 큰 맥을 이루는 대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작품 <산중즉사(山中卽事)>로 산중에 보이는 사물을 노래한 한시입니다. 비가 온 뒤라 산속의 바위틈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요란한데, 온종일 시를 지어 읊조리며 홀로 난간에 기대어 여유로움을 즐깁니다. 회재가 평생에 가장 싫어하는 것은 어지럽고 시끄러운 곳인데, 이 시냇물 소리는 시끄러워도 귀에 거슬리지는 않습니다. 회재는 이 시에서 자신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사람이 부귀ㆍ공명을 얻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는 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종 때 사림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 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던 회재는 조광조의 뒤를 이어 도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퇴계 이황의 주리론에 큰 영향을 미친 조선 전기의 큰 학자입니다. 생전에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 미 - 주장성 저의 잔을 늘 넘치게 부어 주시사 교만의 가시가 돋는 것을 몰랐습니다. 푸른 잎 하나 이슬 한 방울. 심히 부끄럽습니다. 엎드려 기도합니다. “수만 송이의 장미와 함께 어우러져 있으니, 마치 내가 장미가 된 듯하다. 나이 들수록 두꺼워지는 것은 얼굴밖에 없는지 근거 없는 자존감만 높아지고 있다. 작은 키와 수영선수처럼 떨 벌어진 어깨, 다리가 불편해서 뒤뚱거리는 걸음까지 어딜 봐서 내가 장미를 닮았을까. 하지만 꽃이나 사람이나 저마다의 개성이 따로 있지 않을까. 모든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장미가 있는가 하면 키 작은 민들레나 제비꽃, 채송화도 자기만의 매력이 충분하지 않은가.” 수필가 서미애는 그의 수필 <장미가 있는 저녁에>에서 그렇게 읊조린다. 그렇다. 장미가 어디 똑같은 모습이런가? 어디 붉은 장미만 장미인가? 붉은 장미가 있는가 하면, 노랑, 파랑, 흰 장미들도 있다. 따라서 남이 볼품없다고 바라볼지라도 장미는 장미일 뿐이다. 스스로 교만의 가시가 돋아 있더라도 말이다. 주장성 시인은 “교만의 가시가 돋는 것을 몰랐다.”라고 했다. 장미 스스로 가시가 돋는 것을 안다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달빛이 휘엉청 밝은 밤, 초가삼간 마루에 앉아 흑산도 밤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다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정약전 선생,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은 그림 같아 보이지만 실은 58년의 생애 가운데 16년이란 세월을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이어갔으며 끝내 유배지에서 삶을 마친 불운의 선비입니다. 그러나 유배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첫 수산학 연구서인 《자산어보(玆山魚譜)》 등을 남긴 정약전 선생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 <자산어보>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정약전 선생은 영조 34(1758)년에 태어나 전형적인 성리학자로 문과에 급제해 병조좌랑 등의 벼슬을 살게 됩니다만 그의 운명을 갈라놓은 계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 서양 학문과 천주교 등의 사상을 접하고 있던 이벽 등의 남인 인사들과의 교유를 꼽을 수 있습니다. 정약전 선생은 이벽의 권유로 《천주실의》, 《칠극》 등의 천주교 관련서적을 시작으로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예수회 신부들이 번역한 유클리드의 《기하원본》 등을 읽으면서 그간 길들어 있던 성리학을 벗어나 서양의 사상에 눈뜨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천주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4월 28일,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은 이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11,023건 약 2만3천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는데 이 가운데는 겸재 정선(1676~1759)의 <정선필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국보 제216호)가 들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정선(이 비 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138.2㎝, 세로 79.2㎝입니다.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상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데 산 아래에는 나무와 숲, 그리고 자욱한 안개를 그렸고 위쪽으로 인왕산의 바위를 화폭 가득가득 담았지요. 비에 젖은 뒤편의 암벽은 위압적인 모습과 함께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이렇게 그리기 위해 붓에 먹물을 가득 묻혀 반복해서 아래로 내리긋는 대담한 필치를 사용하였습니다. 산 아래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산 위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으로 그려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주고 있지요. 조선 영조 27년(1751)에 그려진 이 그림은 그때까지의 산수화가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그린 데 비해 직접 경치를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