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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법 시행에 60년을 기다린 세종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71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초 땅에 대한 세금은 고려시대부터 시행해오던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으로 땅을 3등급으로 나누고, 걷어 들일 양을 미리 정한 다음 관리가 수확량을 확인해서 결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관리와 지방 유지들이 결탁하는 비리가 끊이지 않았지요. 이에 세종은 농민에게 일정한 땅을 나눠주고 비옥도와 풍흉년에 따라 등급을 나눈 다음 수확량의 10분의 1만 거두는 세금방식인 공법(貢法)을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수입이 줄어들 지주들이 한사코 반대한 것은 물론 농민들 또한 낯선 방법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그래서 세종은 조정 신하는 물론 양반과 농민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세계 첫 여론조사까지 벌이게 됩니다. 다섯 달 동안의 여론조사에서 찬성이 98,657명, 반대가 74,149명으로 찬성이 많아 공법을 시행하려 했지만, 이후로도 반대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1440년 9월에는 경상도에서 백성 천여 명이 등문고(登聞鼓, 신문고의 전신으로 백성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임금께 알리기 위해 치는 북)를 치며 공법의 중지와 답험손실법의 부활을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졌지요.

 

 

임금의 뜻이 곧 법이던 절대군주의 시절, 이렇게 공법의 시행을 반대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이들의 뜻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지만, 이들의 반대 시위도 막지도 않았음은 물론 주동자를 처벌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고 오히려 긴 기간 동안 시범 실시와 중단, 보완과 재시행 등을 거치면서 뿌리를 내리게 하지요. 1427년 처음 얘기가 나온 이래 1489년 함경도에서 시행됨으로써 무려 60여 년 동안을 세종은 기다려준 것입니다. 물론 처음 제 뜻과 달라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말입니다. 세종은 이렇게 온갖 나라의 일에 많은 개혁을 이루었지만, 논쟁과 토론, 그리고 시위를 지켜보면서 슬기롭게 풀어나간 위대한 임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