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아침의 맑은 이슬 한 방울에 찬란한 햇살의 일곱 빛깔이 깃들어 눈부신 무지개빛을 뿜어내듯이 한 가족의 평범한 이야기에도 그 민족의 굴곡진 역사가 올곳게 담길 수 있다. 그것은 나라나 민족이라는 거창한 이름도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한 가족, 한 동네, 한 지역…… 이렇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문화신문”에 이어싣기(연재)로 시작되어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는 장편실화문학 “엄마가 들려준 엄마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작가가 엄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딸에게 다시 들려주는 독특한 구성으로 엮어가는 이 작품은 중국 연변의 평범한 한 가족의 이야기로 중국조선족의 백년 남짓한 이주와 정착 및 번영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 글을 쓴 작가와 만났다. - 장편실화문학 “엄마가 들려준 엄마이야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어떻게 이 글을 쓰게 되었는가? “우리 엄마는 연변의 여느 집 어머니처럼 지극히 평범한 엄마였다. 1915년 조선 함경도 갑산골에서 가난한 농삿집 딸로 태어나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지금의 중국 조양천 근로촌에 건너와 열여섯 살에 시집가서 아들딸 다섯을 낳았다. 그러나 1946년 일제가 투항하며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 《장백산》, 1987년 제4호 < 해설 > "바람이 분다", 이 시에서 나타나는 "문풍지를 바른 집"이라는 공간은 인위적인 "막힘"의 공간으로서 "안전"을 의미하는 동시에 "폐쇄"와 "보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시에서는 "고금중외"로부터 불어오는 "락타"같이 거센 바람이 "집"에 사정없이 불어칠 때 처음의 부적응에서 오는 맹목적인 저항과 거부에서 초래한 "숨막힘", 그리고 주동적으로 바늘로 "문창"구멍을 뚫어 호흡을 하던 데로부터 나중에는 벽까지 없애치울 의향을 가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는 "막힘" 공간에서 "트인" 공간에로의 진출의 지향을 말해준다.(광천 <공간의 미학>에서)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우리 겨레의 발상지인 동북지역은 예로부터 고조선을 시작으로 고구려, 발해의 성스러운 터였다. 1800년대 말 함경도지역의 심한 가뭄과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한 국권찬탈에 떠밀려 많은 조선 사람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오면서 이 땅에 다시 흰옷의 그림자가 비끼게 되었다. 이들은 북방의 거친 땅에 개척의 괭이 날을 박았으며 일제에 항거해 피 타는 싸움을 벌이고 새 중국의 탄생을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1952년, 이 땅에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창립하며 중국조선족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이들 200만 동포들은 새 삶의 터전에서 새로운 역사를 엮어나갔다. 그러나 디아스포라(離散)적 성격을 가진 이들은 20세기 90년대 이후, 중국과 동북아정세의 변화로 새로운 이동을 진행하여 현재 한국 거주자만 70만 명을 웃돌고 있다. 이와 반대로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10년, 20년이 넘는 시간을 “신 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2004년 연변과학기술대학 상경학부 경영정보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연길에 와서 10년이 훨씬 넘게 살아가며 연변사랑을 실천하는 “신 조선족” 김한수 선생도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와의 일문일답을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일전 중국 중앙텔레비전방송국(CCTV)의 맛기행다큐멘터리 “혀끝으로 만나는 중국(舌尖上的中国)”의 연변편에서는 단아한 우리옷차림으로 여러 가지 우리민족 음식을 만들며 차근차근 그 제조법까지 가르치고 배우는 조선족 모녀가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국과 맵싸한 갓김치 같은 일상의 음식에서부터 여러 가지 떡과 요리 같은 명절음식에 이르기까지 맛깔 나는 우리 음식을 일일이 소개하며 고향의 맛을 전 중국에 널리 알리는 이 프로그램은 방송된 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연변이라는 이 변강산골에도 고속철도가 개통되어 연길에서 장춘까지 2시간, 연길에서 심양까지 4시간, 연길에서 북경까지 9시간으로 수천 리 강토가 일일생활권이 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연변을 찾아오고 연변에 와서 우리 음식을 찾게 되었다. 이 텔레비전프로그램의 주인공들이 바로 연성전통음식유한회사(延盛传统饮食有限公司) 총경리 및 연변전통음식문화연구소 법인대표 허향순 회장과 그녀의 딸 최희연 사장이다. 수십 년 동안 우리 음식과 동고동락하면서 연길시내 뒷골목의 허술한 밥집 “연성뚝배기”에서부터 현재 6,000평이나 되는 널따란 부지에 네 귀가 번쩍 들린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석화시인이 만난 연변의 배달겨레> 이어싣기(연재)를 시작합니다. 연변에서 문학활동을 하면서 겨레의 얼을 담아내고 있는 석화시인은 이제 연변 동포들 속에서 배달겨레의 모습을 찾아내는 일에 나섰습니다. 다른 민족들과 섞여 살면서도 배달겨레 얼을 오롯이 삶의 맨 앞에 두고 또 그 얼을 널리 펼치는 모습을 시인의 눈으로 톺아내는 것입니다. 연변에서 활짝 피어나는 배달겨레의 얼을이어싣기에서 확인하면 좋을 일입니다.(편집자말) 지난 2018년 12월 11일 “디아스포라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가 한국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펼쳐졌다. 이 행사의 취지에 대하여 고윤환 문경시장은 “문경이 아리랑 도시를 선포하고 수없이 많은 아리랑 사업을 하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에 의한 아픔의 극복이었습니다. 아리랑은 길 위의 노래이자 고개의 소리입니다. 나라밖 동포 1세대가 고개를 넘어 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라밖 동포 3,4세가 문경새재를 넘어 문경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문경아리랑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합니다.”라고 피력하였다. 한국의 저명한 음악가들과 함께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여러 나라에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연변일보≫, 1997년 11월 8일 - 해 설 시인이 시를 쓴다는 그 자체가 창조적인 복잡하고 간고한 작업으로서 테두리를 벗어났을 때만이 시의 가능성이 이룩된다. 석화시인은 ‘곡선의 이미지’에서 이 테두리를 벗어났음이 확연하다. 제목은 곡선이라는 명사를 들고 나왔지만 해돋이 전야의 산과 강(1연에서)은 해돋이 황홀경을 펼쳤고(3연에서) 쏟아지는 해살 속에 클로즈업된 우리 민족의 여성을 눈부시게 세워놓는다. 곡선과 산, 강, 언덕, 하늘, 무지개, 해, 여인은 의미론적으로 말할 때는 이질성을 띤 사물이지만 관조적으로 말할 때는 동질성이 있는 것이다. 그 동질성이 바로 곡선이다. 이질적인 사물의 공통점을 유추해내여 시작을 진행하는 것은 테두리사유를 벗어나는 하나의 비결이 아닐까? 석화시인은 곡선을 기하학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찾았고 자연에 서있는 “옥색 한복차림의 / 저 여인”한테서 찾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시인의 목적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보다 우리 민족 여성이 더 아름다운 극치를 이룬다는 것을 꾀함으로서 인간애—사랑의 목적에 도달해보려는 시인의 착상이다. 석화시인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어떤 노래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오랜 세월을 같이 하여도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잠간 만나고 헤어져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무척이나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산이 변해도 서너 번은 변했을 법한 긴 세월에, 정확하게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작 두 번 밖에 얼굴을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는데 지금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면서 내 삶의 등대가 되어주니 말이다. 내가 소학교 5학년에 다니던 어느 날이였다. 학교 갔다 집에 와보니 어머니가 맛있는 먹거리를 가득 사 오신 것이었다. 사탕과자는 물론, 명절에나 겨우 먹을 수 있던 고기며 바나나랑 떡이랑, 그리고 난생처음 보는 이름 모를 과일들... 내가 눈이 휘둥그래서 어리둥절해 있었더니 어머니가 하시는 말이 래일 우리집에 작은 할아버지가 오신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예상했던 대로 나는 작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였는데 그날 우리집은 마을에서 큰 경사라도 치르는 집 같았다. 편벽한 시골 탄광마을에 살던 우리는 그때만 해도 마을에서 자동차라고는 가끔씩 석탄과 모래를 싣고 오가는 해방패(자동차 상표) 외에는 구경하기가 힘들었었다. 그런데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너 왼손잡이야?" "얘 왜 왼손 쓰지? 바보야?" "바른손을 쓰지 못할까?" 남들과 다르다는 사회의 소수자라는 특수성분 때문에 어릴 적에는 다양한 핀잔과 눈총을 받아 왼손잡이에 대한 콤플렉스가 상당했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왼손으로 밥 먹으면 혼나고 글씨도 반드시 오른손으로 써야 했다. 내가 직립보행을 하고 수저 들고 밥을 먹기 시작해서부터 부모님은 왼손부터 뻗는 나의 "못된"버릇을 고쳐주려고 왼손에 양말을 씌우고 붕대로 감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부모님의 극성스러운 "훈육"에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전혀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린 나에게 너무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아서 나중에는 포기를 했단다. 그런데 문제는 소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요즘은 그래도 우뇌의 지배를 받는 왼손을 개발하자는 호성도 높아가고 있지만 내가 소학교 다니던 그 당시만 해도 왼손으로 글을 쓰는 것은 틀리고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주임의 "특별관심대상"이 되었고 팔자에도 없는 나머지 공부를 하면서 자존심도 상하고 억울하고 분해서 어린마음에 몇 번이나 훌쩍거렸는지 모른다. 그때 억지로 교정이 돼서 지금 글은 오른손으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작품 해설 시인은 작품에서 ‘누나’를 향하여 무슨 말인가 연신 ‘발신(発信)’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일방적인 ‘발신’이다. ‘누나’라고 불리는 ‘대상’에서부터 한번도 ‘답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나’는 다만 ‘수신’할 뿐 한 차례도 ‘발신’하지 않는다. ‘누나’는 마지막까지 ‘수신’만 한 것이다. ‘내’가 겨울과수원의 한가운데서 ‘누나’에게 말을 건넨다기보다 ‘누나’에게 일방적인 ‘통신’을 하고 있었으며 ‘누나’는 한 마디 말도 없었으며 마지막까지 듣기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응답이 없는 ‘통신’이였다. 하늘을 향하여 ‘통신’을 발송하였지만 무수한 전파는 공중에 분해되고 흩어져버렸을 뿐이다. 거기에는 ‘누나’가 없었다. ‘겨울과수원’의 한 가운데에도 그 밖의 어디에도 ‘누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누나’를 향하여 ‘통신’을 진행하고 있다. “누나, 지금 꽃은 피어있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석화시인의 작품에서 보이는 ‘누나’의 이미지는 이와 같이 은근하게 표현되지만 ‘남자’의 상대로서의 ‘여자’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어린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누나’이며 ‘어머니’와 같고 대자연속의 꽃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 1997년 5월 작품 해설 예술이란 그 분야를 막론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도전정신과 그것을 내 것으로 하려는 의지를 필요로 한다. 쉽게 서정이라 불리는 자칫 무력한 시풍에서 벗어나 사물을 기호화하고 끊임없이 뻗어 가는 정신세계를 시로 끌어들이려는 그의 노력은 그래서 귀한 것이다. 산문형태로 씌여진 위의 시는 시인의 언어적 탐구가 외적 세계에 대한 응전의 방식과 연관지어보려는 노력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에 사는 우리가 읽어도 전혀 이질감이나 시적 성취 면에서 떨어지지 않음을 위의 시에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적인 시적 세련됨은 물론이요, 시인의 사물을 바라보는 엄정한 내부의 시선이 항상적으로 유지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임헌영(한국 문학평론가) <중국조선족 시인 석화의 작품세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