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어떤 노래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오랜 세월을 같이 하여도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잠간 만나고 헤어져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무척이나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산이 변해도 서너 번은 변했을 법한 긴 세월에, 정확하게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작 두 번 밖에 얼굴을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는데 지금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면서 내 삶의 등대가 되어주니 말이다.
내가 소학교 5학년에 다니던 어느 날이였다. 학교 갔다 집에 와보니 어머니가 맛있는 먹거리를 가득 사 오신 것이었다. 사탕과자는 물론, 명절에나 겨우 먹을 수 있던 고기며 바나나랑 떡이랑, 그리고 난생처음 보는 이름 모를 과일들... 내가 눈이 휘둥그래서 어리둥절해 있었더니 어머니가 하시는 말이 래일 우리집에 작은 할아버지가 오신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예상했던 대로 나는 작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였는데 그날 우리집은 마을에서 큰 경사라도 치르는 집 같았다. 편벽한 시골 탄광마을에 살던 우리는 그때만 해도 마을에서 자동차라고는 가끔씩 석탄과 모래를 싣고 오가는 해방패(자동차 상표) 외에는 구경하기가 힘들었었다. 그런데 그날 아버지 단위에서는 특별이 외국에서 오시는 손님을 마중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위생소에서 귀하게 사용하고 있는 구급차를 내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빨간 "+ "표시를 한 구급차로 역에 마중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위풍이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였는지 모른다.
하얀 구급차가 마을 어귀에 들어서며 60이 다된 로인네가 회색 중절모에 노아란 반팔차림으로 차에서 내리자 온 동네 사람들이 너나없이 나와 구경을 하며 다들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던 기억이 아직도 눈앞에 또렷하다.
그렇게 나는 그때 우리말로 남조선에서 오신 나의 어머니 친삼촌, 나의 작은 할아버지를 처음 봤었다. 첫 만남에서 나는 작은 할아버지가 보기 좋은 체구에 여래부처님 귀를 닮은 무척이나 큰 귀를 가지셨고 60이 다 되는 나이에도 노랗고 빨간 반팔티를 입는, 그리고 듣기 좋은 구수한 목소리로 장밤(긴긴밤) 이야기도 잘하시고 "푸른하늘 은하수~"하면서 반달 노래도 엄청 잘하시는 이국적인 색채가 다분한 분이셨다는 기억밖에 더 없었다.
그밖에 더 있다면 그날 작은 할아버지가 우리 엄마를 정말 많이도 울리셨다는 기억이었다. 그리고 썩 후에야 나는 알게 되였다. 그때 그 눈물이 세살에 아버지를 여읜 어머니가 친아버지 같은 사랑을 다시 받게 된 기쁨의 눈물이었으며, 또 홀몸으로 한국땅에 남겨져 친혈육과의 생리별로 한평생을 보내시던 작은 할아버지가 평생 소원하셨던 가족을 만난 기쁨의 눈물이 였다는 것을...
그 뒤로 나는 커가면서 어머니한테서 작은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도 들었다. 조선전쟁 때 교편을 잡으셨다는 이유로 미군에게 끌려가 하마터면 친형들한테 총부리를 댈 번하다가 요행 꾐수를 부려 홀로 한국땅에 남겨졌었다는 얘기, 그리고 이국땅에서 어떻게 빈주먹으로 국회생활까지 하시게 되였다는 얘기 등등... 당시 이런 이야기들은 한창 친구들과 리상이며 꿈을 담론하며 밤 가는 줄 모르던 나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였으며 작은 할아버지의 거룩한 모습이 내 마음속에 큰 우상으로 남게 되었다.
고중을 다니면서부터 나는 작은 할아버지와 손편지도 오고가구 하면서 인생길에서의 많은 조언을 접하기도 하였다. 고중졸업을 앞두고 작은 할아버지가 나한테 편지를 보냈었는데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한사람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가기 전에 꼭 무언가를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 그때는 그 말속의 심오한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처음으로 먼가를 남기기 위한 꿈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그 뒤로부터 나는 작은 할아버지의 이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공부도 열심이 하고 일도 열심이 하면서 정말 열심이 살아왔다.
그렇게 살다가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나이 들어 혼인하고 애도 생겼지만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내맘 속의 꿈은 식어가지 않았다. 작은 울타리 안에서의 직장생활 만으로는 그 꿈을 태우기에 너무나 가벼운 종잇장 같았다. 그래서 그 꿈을 찾아 타향살이 하면서 낯선 곳을 많이도 헤맸고 또 자영업 한다고 여기저기 학비도 적잖게 치렀다. 결혼하여 가정 있는 여자가 맨날 사내처럼 쏘다닌다고 부모님들도 어지간히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3년 전에는 한국에까지 가게 되였는데 거기에서 나는 결국 내 생에 두 번 째로 작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였다. 이제 90을 바라보는 작은 할아버지는 머리에 온통 하얀서리가 내려있었다. 부처님 귀에는 검은색 보청기가 끼여져 있었다. 처음에 우리집에 오실 때 름름하고 위풍 있던 모습은 세월 속에 자취를 감추었고 집에 들어서는 나를 맞이하는 작은 할아버지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많이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내 손을 꼭 잡고 놓을 줄 모르는 작은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다지 맑아보이지는 않았지만 초점이 선명한 로인의 두 눈가에 맑은 이슬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날 내가 작은 할아버지한테 베트남에 있는 회사에 가서 옷장사를 해보려는 내 생각을 밝혔더니 작은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한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가정의 행복이 아니겠느냐? 가정과 함께 하면서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않겠느냐?" 그렇다. 작은 할아버지는 빈주먹에 고아신분으로 서울대 졸업에 부자집 공주 신분인 작은 할머니와 일심동체가 되여 자신의 하고자 했던 일을 멋지게 하셨던 분이다.
작은 할아버지는 또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코끼리를 놓을 공간도 없고 코끼리를 먹일 사료를 살 돈도 없는 한 사람이 코끼리를 손에 넣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고통스러워 하다가 결국 돈을 벌수 있는 기회도 놓쳐버리고 코끼리도 손에 넣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코끼리를 잠시 포기하고 개나 고양이 키우기부터 시작했더라면 혹시 지금쯤은 코끼리를 손에 넣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날 후로 나는 작은 할아버지 말씀을 참고로 여러모로 고민하던 끝에 결국 떠돌이 생활을 접고 하고자 했던 모든 걸 포기하고 내 사랑하는 가족 옆에 돌아왔다. 코끼리를 포기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모 출판사에서 직장생활을 잠간 하다가 얼마 안 지나서는 지인의 덕분으로 한번쯤 꼭 도전해 보고 싶었던 브랜드 체인점 운영에 뛰어들게 되었다.
한국에서 모든 걸 비우고 돌아와서부터 내 일은 순탄하게만 풀렸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전에는 내가 코끼리를 손에 넣으려는 데만 너무 큰 집착을 하다 보니 나 스스로 많은 기회를 흘러버린 것 같았다.
내 생에 두 번 밖에 만난 적 없는 나의 작은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는 매번 내가 삶의 굽은길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면 내 삶의 등대가 되어 나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주시곤 하셨다. 또한 작은 할아버지가 계셨기에 나는 생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으며 또한 오늘도 후회 없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나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할아버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작은 할아버지와의 다음번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