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863년(경문왕 3, 함통 4) 만들어진 이 사리합기(舍利盒記)는 흑칠한 납석제의 작은 원형 항아리(합(盒) 높이 8.3cm, 몸통 직경 11.5cm, 아가리 직경 8cm, 바닥 직경 8.5cm)에 가는 선으로 39행 7줄의 네모칸을 긋고 그 안에 7자 38행, 글자 크기 0.7cm의 해서로 음각되어 있다. 기문(記文)은 선명하게 판독되나 항아리는 4조각으로 깨어져 일부는 없어졌다. 이 사리합기는 1960년대 초 도굴되었다가 범인들을 검거함에 따라 당국에 회수되었고, 1968년 동국대 박물관에 기증되어 보관되고 있다. 1966년에 대구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의 사리 장엄구로 확인되었고 이 사리호를 내장하였던 금동합 4매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민애대왕석탑사리호기(敏哀大王石塔舍利壺記) 9세기에 기복을 위한 석탑을 조성하는 것이 유행하고 사원도 원당(願堂)의 성격이 뚜렷해지는데 이 탑도 그 중 하나이다. 민애왕을 추복하기 위한 탑(塔)의 조성은 진표(眞表)의 계간자를 받고 중악(中岳) 동화사(桐華寺)에 돌아와 머물렀던 헌덕왕의 아들 심지(心智, 心地)가 주관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사리합기는 동화
[그린경제/얼레빗=정석현 기자] KTV(원장 김관상) 국악콘서트 울림에서는 오는 12월 28일(토) 저녁 8시 30분, 2013년의 끝자락에 국악 명인들이 소외계층과 전통음악 애호가들을 위해 펼친 자선공연 실황을 담은 명인들의 나눔공연 편을 방송한다. 지난 12월 21일에는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송년 특별기획 '명인들의 나눔공연'이 무료로 열렸다. 이날 무대에선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와 보유자 후보로 구성된 8명의 명인들이 고품격 무대를 선보여 큰 손뼉을 받았다. 정통 가야금 명인 최충웅과 황규남의 피리 합주 '영산회상',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 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 정재국의 피리독주 '상령산', 궁중무용의 명인 이흥구의 '무산향', 가곡 명인 김호성의 '언락'과 '편락'이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전승돼 온 서도소리 명인 김광숙은 시창 '관산융마'를, 국악계 대표 소리꾼 안숙선 명창은 판소리 '춘향가'를 열창했다. 이날 무대에 오른 국악 명인 8명은 출연료 전액을 한국구세군 자선냄비본부에 기부했고, 관객들도 공연장 로비의 자선냄비를 통해 기부에 동참했다. 자선냄비본부는 정기후원에 참여한 관객을 대상으로 캐럴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기자]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慶尙北道 安東市 臥龍面 西枝里) 산 75-3번지에 있는 김성일의 신도비이다. 1634년(인조 12년)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몸돌과 머릿돌을 하나로 세운 것으로, 비문은 정경세(鄭經世)가 짓고, 이산뢰(李山賚)가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액을 쓴 것이다. 원문은 정경세의 문집인 『우복집(愚伏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김성일(1538~1593년)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원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과 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선조 23년)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의 침략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직되었다.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 임명되어 의병활동을 도왔으며, 특히 관군과 의병을 화합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노력하다가 1593년(선조 26년)에 생을 마쳤다.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영남학파
[그린경제/얼레빗 =정석현 기자] 지금까지 서울지역 내 발굴된 수많은 조선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도자기들의 생산지가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었으나, 서울역사박물관에 의해 그 정밀 지표조사가 이루어지고 발굴조사(2011.5월~11월)가 실시된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가 바로 그 생산지 중의 하나임이 밝혀지게 되어, 서울시는 이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 초에 이르는 시기는 도자사의 측면에서는 상감청자에서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넘어가는 시기이며, 정치적으로는 왕조가 바뀌는 혼란기였다. 이러한 혼란기에 형성된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는 왜구의 침탈 등의 이유로 강진을 비롯한 전라도에 위치하던 청자 생산체계가 해체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이후, 서울 인근에 자리잡은 요업(窯業)의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 요업(窯業) : 기와ㆍ벽돌ㆍ사기(沙器) 등을 만드는 업의 총칭(總稱)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 전경 또한 지금까지 조선 왕실 공급용 자기가 제작된 가마터는 주로 전라도 및 경상도 지역으로 인식되었으나, 이 가마터에서 출토된 명문(名文)자기와 용문매병 편 등의 발견으로 관요(官窯)가 설치되기 이전에 한성부 내에서 덕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강원도 양양에 있는 낙산사(洛山寺)에 있던 종의 명문이다. 세조가 금강산을 순례하고 낙산사에 왔는데 사리가 분신하는 이적이 있어 낙산사를 원찰로 삼아 학열(學悅)에게 중창하게 하였는데,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여 종을 만들도록 하여 완성하였다. ▲ 흥천사종명(興天寺鐘銘) 예종 원년(1469년)에 김수온(金守溫)이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글씨를 썼다. 이 종은 얼마 전까지 잘 보존되어 왔는데, 2005년 4월 산불에 절이 불타면서 종도 녹아버렸다. 그 잔해 만이 문화재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연대: 1462년(세조8년) 보물 - 제1460호 출처: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그린경제/얼레빗=정석현 기자]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은 2013년도 가을 기획특별전으로 대숲에 부는 바람(風竹)을 지난 11월 12일부터 2014년 2월 2일까지 열고 있다. 바람을 맞고 선 대나무의 모습과 그 소리를 아우르는 개념인 풍죽(風竹)은 안개에 덮인 연죽(煙竹), 비와 눈을 맞는 우죽(雨竹)ㆍ설죽(雪竹)과 더불어 대나무를 주제로 한 그림의 화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번 전시는 국보를 비롯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에서 열렸던 한국미술 5천년전, 2002년 한일월드컵을 기념하여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한국의 명보(名寶)전, 호주 퀸즈랜드미술관의 조선왕조 명품전, 독일 쾰른동아시아박물관에서 열렸던 한국의 문화재 전 등 굵직한 나라밖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명품들을 비롯하여 총 15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다. 이 전시는 그림으로 피어난 매화, 탐매(探梅, 2009)에 이은 국립광주박물관의 두 번째 사군자 특별전이다. 이번 특별전은 먹과 붓의 운용을 익히는 회화 창작의 기초 과정으로, 때로는 고답적이고 진부한 테마로 인식되어 온 전통 소재의 조형성과 상징성을 현대의 관점에서 새
[그린경제/얼레빗=정석현 기자] 국립부여박물관은 백제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던 사비시기 수도, 부여에 자리 잡고 있으며 당시의 문화재를 조사연구하고 전시교육하는 백제전문박물관이다. 국립박물관 분관으로 출발하여 1971년부터의 부소산 시절을 거쳐 1993년 이곳 금성산 아래에 터를 잡은 뒤 20년의 세월이 흘러 보다 새로운 모습으로 관람객을 만나고자 상설전시실 전면개편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 국립부여박물관 대표유물 /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293호) - 왼쪽부터 이번 전시 한눈에 보는 사비백제는 상설전시실 수l는 동안 국립부여박물관의 대표유물을 엄선하여 마련된 전시로 2013년 12월 17일부터 2014년 7월 27일까지 열린다. 송국리 농경사회를 일구다, 성왕과 사비도성, 위덕왕과 능산리사지, 백제금동대향로의 세계, 백제 불상의 미소 등의 주제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293호) 등 국립부여박물관 대표 유물 200여점을 한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그린경제/얼레빗= 정석현 기자] 안악3호분은 북한의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일제시기의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설리)에 있다. 무덤은 357년(고국원왕 27)에 쌓았는데, 고구려의 전형적인 돌방흙무덤[석실봉토분]으로 널길과 앞방, 곁방, 널방을 가진 구조이다. 천장과 각 돌방의 벽면에 인물과 풍속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벽화를 그렸는데, 특히 앞방의 오른쪽 곁방 벽면의 무덤 주인공 부부의 초상화와 주인공의 행차장면을 그린 회랑의 대행렬도가 유명하다. 이밖에도 방앗간, 우물, 부엌, 고깃간, 차고, 외양간, 마굿간 등을 그려 4세기 중반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묵서[먹으로 쓴 글]는 앞방 서벽 좌측 장하독(帳下督) 위에 있는데, 7행 68자이다. ▲ 안악3호분묵서명(安岳三號墳墨書銘) 그 내용은 동수(冬壽)라는 인물의 사망일자, 작위, 관직, 고향과 나이 등을 기술한 것이다. 묵서 이외에 벽화의 군데군데에 붉은 글씨로 벽화에 그려진 인물의 이름이나 관직[주인공의 속관으로 추정] 등을 적은 것들이 발견된다. 안악3호분의 주인공과 관련하여 현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묘지문의 내용을 주목하여 그 주인공을 동수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국립고궁박물관 상설전시실은 '조선의 국왕실'로 꾸며져 있다. 국왕은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에서하늘의 명[天命]을 받은 초월적 존재다. 국왕은 즉위부터 사후에 이르기까지 각종 상징물 속에 둘러싸여 의례를 행하면서 지존의 권위와 위엄을 표현하였으며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 곤룡포익선관목화(영친왕 착용) 국왕이 행정과 각종 의례를 위해 사용한 어보御寶 및 왕이 자리한 곳에 항상 펼쳐진 일월오봉도는 국왕을 상징한 대표적 기물이다. 조선은 국왕을 정점으로 집권화된 왕조사회로 왕은 입법사법행정 등을 망라하여 한 나라를 통치하는 무한한 책임과 권한을 지녔으며, 국왕의 삶은 바로 왕조의 역사와 직결되었다. ▲ 1759년(영조 35)에 영조가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하면서 함께 수여한 옥인죽책교명 ▲ 조선왕실에서 사용하던 연잎형태의 벼루로 목제 뚜껑을 갖추고 있는데 뚜껑 윗면에는 구름 속을 나는 다섯마리의 용이 자개로 장식되었다. ▲ 창덕궁 후원 옥류천 일대에서 정조와 규장각 관원들이 꽃구경과 낚시를 즐기면서 쓴 친필 시를 모아 연결한 시축詩軸 이다. 이에 따라 국왕의 공식일정과 행사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이 《조선왕조
[그린경제/얼레빗= 정석현 기자]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성주사터에 있다. 탑비의 높이는 251cm, 폭 148cm이며, 글자는 5,120자로 상태가 양호하여 모두 판독이 가능하다. 탑비는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국보 제8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의 주인공 낭혜화상(朗慧和尙)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8대손으로 그의 아버지 범청(範淸)이 김헌창의 반란에 연루되어 진골에서 신분이 득난(得難: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 법호는 무염(無染)이며, 800년(애장왕 1)에 출생하여 13세에 출가하였다. ▲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처음에 부석사에서 석징대사(釋澄大師)에게서 화엄학을 배웠고, 821년(헌덕왕 13)에 중국에 유학하여 선승 보철(寶徹)에게서 선법을 수학하였다. 중국에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다가 845년(문성왕 7)에 귀국하여 왕자 흔(昕)의 요청으로 성주사(聖住寺)에 머물렀다. 여러 번에 걸쳐 왕명을 받아 궁궐에 드나들었으며, 경문왕 사후에 성주사에 되돌아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888년(진성여왕 2)에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최치원이며, 비의 건립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대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