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이상룡(1858-1932) 선생은누구인가?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상희(象羲).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1911년 서간도(西間島)로 망명 후 계원(啓元)으로, 이어서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승목(承穆)이며,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정치제도와 실용지학(實用之學)을 탐구했으며, 천문지리수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도곡선재(陶谷先齋)에 은신하면서 병학(兵學)에 몰두하였다. 1896년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 항전을 시도하였다. 안동의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근대적 군사력에 대항하는 국내에서의 의병 항쟁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뒤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였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관문성(關門城)은 신라 제33대 722년(성덕왕 21)에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外東面)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에는 모벌군성(毛伐郡城) 또는 문벌관문성(蚊伐關門城)이라고 불렀다. 또한 후대에 관문성을 대점성(大岾城)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글을 새긴 석각은 성벽에서 10개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성을 쌓을 때에 각 군현이 담당한 북쪽 경계와 남쪽 경계, 그리고 담당 구역의 길이를 표시한 것이다. 각 군현이 담당한 길이는 평균 약 6보(步) 3척(尺)으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11.7m가 된다. 성의 둘레가 본래 1.8km이므로 석각도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나 10개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관문성석각은 통일신라시기에 성을 쌓을 때에 역부를 어떻게 동원하였는가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당시 1보가 6척이며, 1척의 길이가 29.4cm였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자경(字徑)은 대체로 4~7cm이다. 연대:722년(성덕왕21년) 사적:제 48호 출토지,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外東面) 관문성지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 관상감 관천대 조선시대 기상대나 천문대인 관상감이 있던 자리에 설치한 것으로, 흔히 소간의대(小簡儀臺)나 별을 관측하는 대 라는 뜻에서 첨성대(瞻星臺)라고 불렀다. 세종 16년(1434)에 설치된 서운관의 관측대로서, 서운관은 천문, 지리, 측후, 물시계와 관련된 일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서운관은 조선 세조 12년(1466)에 관상감, 고종 31년(1894)에 관상소, 1907년에 측후소로 바뀌어 현대식 시설을 갖추기 시작할 때까지 업무를 수행했던 곳이다. 관천대는 다듬은 돌을 높이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만들었고,그 위에 직사각형의 돌로 난간을 둘러 놓았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다. 경주에 있는 신라의 첨성대, 개성 만월대의 고려 첨성대, 서울 창경궁 내의 관천대와 더불어 우리나라 천문 관측역사의 발전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자료 ※(관상감관천대 서울 관상감 관천대)으로 명칭변경 (2011.07.28 고시)
[그린경제 = 정석현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오늘 몸 숨기고 바다 건너는 사람 지난 몇 해를 와신상담한 사람인가 이미 정한 이 걸음 평생의 뜻이기에 다시 고향 돌아갈 길 묻지 않으리 -상해에서 동경으로 가는 배안에서 읊은 시 가운데서- **김지섭(1885-1928) 독립투사는 누구인가? 본관은풍산(豊山). 호는 추강(秋岡).경상북도 안동 출신. 사서삼경에 능통하였고, 일어를 자습해 21세 때에 상주보통학교 교원과 금산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였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김원봉(金元鳳)곽재기(郭在驥)김시현(金始顯) 등과 조국의 독립을 기도하였다.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상해시베리아 등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1922년 상해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러시아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충당하고자 1922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다. 그 뒤 국민대표대회에도 참석하였다. 국내에서
[그린경제=정석현 기자] 얼마 전 아무개 의원에 치료차 갔습니다. 물리치료를 받으라고 했지요. 그런데 물리치료사가 제게 누우실께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이가 없어서 누굴 존대하는 것이냐? 제발 그런 말 좀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물론 물리치료사는 환자를 존대한다고 생각한 것이겠지만 십년 이상 국어 공부를 했을 텐데 어찌 저런 말을 쓸 수 있는지 어이가 없었습니다. ▲ 교보문고가 보내온 누리편지에는 가실께요라는 이상한 존대가 쓰여 있다. 그런데 얼마전 텔레비전에서 유명한 개그맨 한 사람이 치아를 빼실께요.라고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최근 교보문고에서 온 누리편지에는 잠시만요~ 중고책 추천받고 가실께요?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병원에서야 뭘 몰라서 그랬다 치더라도 국민에게 엄청난 영향력이 있는 텔레비전 방송과 우리나라 최고의 서점이라는 교보문고가 저런 말을 함부로 쓰는 것에 기가 막힙니다. 백화점에서도 5만원이십니다.라든지, 그 상품은 품절이 되셨어요.라든지 요즘 무분별한 지나친 존대가 난무합니다. 우리의 혼 말글이 이렇게 훼손되어 가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문의: 국립국악원 02-580-3300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선림원지홍각선사비는 본래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의 선림원(또는 사림사)터에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비신이 깨져 현재 일부만이 전한다. 비신의 오른쪽 상단 부분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비편 조각 일부를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탁본을 가지고 확인할 수 있다. 홍각선사(弘覺禪師)는 봉림산문(鳳林山門) 소속으로 속성이 김씨이다. 선사는 810년(헌덕왕 2) 무렵 경주에서 출생하여 17세에 출가하고, 해인사와 영암사에서 수학하다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법을 배웠다. 귀국하여 왕실과 접촉하여 왕궁에서 10일 동안 설법하기도 하였으며, 880년(헌강왕 6)에 입적하였다. 비는 제자들의 건의에 따라 886년(정강왕 1) 10월에 선림원(禪林院)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수병부랑중(守兵部郞中) 김원(金薳)이 지었다. 김원(金薳)은 이전에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의 글씨를 쓴 바 있어 문장과 글씨에 능통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신라 하대 선종사상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연대: 886년(정강왕원년, 당(唐) 희종(僖宗) 광계(光啓)2년) 문화재지정: 보물 - 44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본래 대한民으로서 차라리 죽을 지언정 일본民 되기를 바라지 않는 국민이 독립을 외친 것이 무슨 법에 맞는 다는 것인가 -이상동 판결문(고등법원, 1919년 5월 12일)- *이상동(李相東)독립투사에 대하여... 1865년(고종 2)1951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건초(健初), 호는 만진(晩眞). 이상동(李相東)의 형은 이상룡(李相龍)이다. 이상동은 1895년(고종 32)에 의병장 신돌석(申乭錫)의 지휘 아래에서 싸웠는데, 형 이상룡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이루어지자 이상동은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안동지회에 들어가, 국권을 회복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후 장로(長老)가 되어 교회를 건립하는 등 기독교를 전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안동에 있는 한 시장에서 기독교 교인들과 함께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국보 제 1123호는 지리산 산 속에 있다.전북 남원시 지리산 정령치에 연이은 고리봉 아래 개령암 터 뒤 절벽에 새겨져 있는 12구(軀)의 마애불(磨崖佛)이 그것이다. 울퉁불퉁한 자연암벽이어서 조각 자체의 양각도 고르지 못하고 훼손도 심한 편이나, 3구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가장 거대한 불상은 4m나 되는데, 조각솜씨도 제일 뛰어나 본존불로 여겨진다. 얼굴은 돋을새김이지만, 신체의 옷주름은 선으로 처리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고려 마애불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1~2m의 작은 불상들 역시 조각수법이 모두 같으며, 각 부분의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국보 제 1123호 마애불은 찾는 이 없는 지리산 속에 있다 이처럼 규모가 큰 불상군은 희귀한 예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며, 특히 암석의 틈을 이용하여 곳곳에 명문을 새겨 놓아 그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명문은 자연암석의 빈 틈을 이용하여 새겼으므로, 종횡(縱橫)이 일정하지 않으며, 전체적인 내용 역시 파악되지 않는다. 국보: 국보 - 1123호 글자크기: 약 20cm 출토지, 소재지: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다 -서대문형무소 옥중 유언- * 김동삼(1878-1937) 독립투사는 누구인가? 본관은의성(義城). 원명은 긍식(肯植), 호는 일송(一松).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 등과 젊은 일꾼의 양성을 위해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세웠으며, 1909년에는서울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독립운동의 기반 마련과 독립투사의 양성책을 협의하였다. 1910년 국권 침탈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통화현삼원보(通化縣三源堡)에서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재만 동포의 농지개혁과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