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정석현 기자]1930년 황해도 곡산군 화촌면 연산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며, 현재 호암미술관 소장으로 국보 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것은 높이 18cm의 주형광배(舟形光背)의 중앙에 본존불을 배치하고, 그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한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 형식인데, 대좌는 결실되었다. 본존은 명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량수불(無量壽佛 = 阿彌陀佛)로서, 통견의(通肩衣)에 시무외 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하고 있다. ▲ 금동신묘명삼존불(金銅辛卯銘三尊佛) 높이는 11.5cm인데, 현존하는 금동 일광삼존불의 본존 중에서 가장 크다. 광배는 본존을 중심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고 그 안에 연화와 당초문을 양각하였으며, 그 외각에는 화염문을 양각하였는데 그 사이에 화불(化佛) 3구가 있다. 명문은 광배의 뒷면에 해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7행까지는 종서(縱書)로 되어 있으나, 마지막 8행은 맨 밑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자를 새겨두었는데, 글자는 역시 세로로 읽게 되어 있다. 내용은 돌아가신 스승과 부모가 내세에도 불교에 귀의할 것과 불상 제작을 발원한 자신들도 미래에 미륵불을 만나 깨달음을 얻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출토지가 곡산이라는 점, 불상 양식이 연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1971년 7월 충남 공주군 공주읍 송산리(宋山里)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부장품의 하나이다. 현실(玄室) 내부(內部)의 왕비쪽 관식(冠飾)의 하단(下端)에서 북쪽으로 35cm되는 위치에서 쌍방 거리 5cm를 두고 금천(金釧)과 함께 출토되었다. 우완(右腕)에 금천(金釧), 좌완(左腕)에 유명은천(有銘銀釧)이 각 1쌍씩 겹쳐 나왔는데 이는 양산(梁山) 부부총(夫婦塚)에서 부인이 우좌완에 각각 금은천을 끼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은천의 외경(外徑)은 8cm, 내경(內徑)은 6cm이며 환(環)의 저면폭(底面幅)은 1cm이다. 단면이 반원형인 은띠의 표면에 혀를 길게 내민, 삼조(三爪)의 반룡(蟠龍) 두 마리를 양각(陽刻)하고 팔목에 닿는 내면(內面) 측연(側緣)에는 치각점열(齒刻點列)을 돌린 형태이며 내측(內側)에 명문 1행(行)이 해서음각(楷書陰刻)으로 주회(周回)되어 있다. ▲ 무령왕릉출토은제팔찌 명문에 의해 520년(무령왕 20) 왕비가 돌아가기 6년 전에 왕비용(王妃用)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명문의 자경(字徑)은 0.7cm이다. 연대 : 520년(무녕왕20년) 국보: 160호 크기: 외경(外徑) 8cm, 내경(內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1948년 부여읍(扶餘邑) 관북리(官北里)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발견된 것은 비의 일부로서, 현존 높이 102cm, 폭 38cm, 두께 29cm이다. 양질의 화강암에 가로 세로로 정간(井間)을 구획하여 그 안에 글자를 음각하였으며, 1행은 14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앞부분에 해당하는 4행까지로서 모두 56자이다. 비의 우측면 상부에는 음양설에 따라 원 안에 봉황문이 음각되어 있으며 붉은 칠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출처: 한국금석문영상정보시스템 문장은 중국 육조시대의 사륙병려체(四六騈儷體)이며 자체(字體)는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로서, 문장이나 자체가 모두 세련되어 있다. 내용은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원찰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발견된 곳이 백제의 고도(古都)란 점, 백제에 사씨(沙氏)란 성이 있었던 점, 백제에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란 인물이 있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백제의 비석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대:백제 *문화재지정:시도지정문화재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 *크기:높이(현재높이) 109cm, 너비 36cm, 두께
[그린경제=정석현 기자] 예전엔 마을에 아이들 울음소리와 함께 들려야했을 소리가 바로 송서(誦書)와 율창(律唱)이었다. 그런데 최근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책 읽는 이가 없는 것도 물론이려니와 송서와 율창은 일제강점기 그 맥이 끊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1호 유창 명창. 그는 그 송서(誦書)와 율창(律唱)을 다시 되살리려는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난 8월 24일 서울 중요무형화재전수회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송서(誦書)와 율창(律唱) 공연을 한데 이어 내일 8월 30일 저녁 7시 30분에는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 민씨가옥에서 서울특별시 주최로 송서(誦書)와 율창(律唱) 꽃피우다. 공연이 펼쳐진다. 이 공연은 송서(誦書)와 율창(律唱)과 함께 경기민요 한바탕도 있을 예정이다. 마지막 가는 한여름밤, 남산공 한옥마을에서 송서(誦書)와 율창(律唱)으로 꿈을 꾸어볼까? 선비가 되어볼까? 공연은 무료로 초대된다.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울주천전리각석은 울산광역시 두동면 천전리 산207-3번지에 있으며, 국보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1970년 12월 동국대학교 울산지구불적조사대(蔚山地區佛蹟調査隊)에 의하여 처음 세상에 알려졌으며. 여러 시기에 걸쳐 그린 다양한 문양과 암각화 및 신라시대에 작성한 여러 명문(銘文)들이 높이 2.7m, 폭 약 9.5m의 큰 판석에 새겨져 있다. 원명은 서석의 하단부 중앙에서 왼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석의 면을 파서 곱게 다듬고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둘러 구획을 정한 후에 글자를 새겼다. 서석의 명문 자료 가운데 이것이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가장 먼저 작성되었다고 보이기 때문에 원명(原銘)이라고 불렀다. ▲ 울주천전리각석 원명(原銘)의 작성 연대는 을사(乙巳)라는 간지가 보인다는 점, 추명에서 과거의 사실을 축약하여 기술한 사실, 주인공인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 :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 540년(진흥왕 즉위) 이전에 사망하였다는 사실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525년(법흥왕(法興王) 12)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명의 내용은 사훼부(沙喙部) 소속의 갈문왕이 고곡(古谷)을 찾아 이를 서석곡으로 이름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오는 9월, 한국과 동남아시아 문화장관, 아시아 전통음악 연주가, 아시아 언론인, 아시아 창작공간 대표, 월드뮤직 음악가, 학자 및 전문가, 예술가 등이 아시아문화중심도시 광주광역시에 모인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진룡)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은 2013년 9월 3일부터 9월 10일까지 제1회 한국-동남아시아 문화장관 회의를 비롯하여 아시아언론인포럼, 아시아전통오케스트라 공연, 아시아창작공간네트워크 행사, 아시아예술극장 개관 사전제작 프로젝트 One Day, Maybe 언젠가, 2013 광주월드뮤직페스티벌, 아시아문화포럼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9. 6. 제1회 한국-동남아시아 문화장관 회의에서 아시아문화협력 다져 먼저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동남아시아 10개국(브루나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문화장관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제1회 한국-동남아시아 문화장관 회의가 9월 6일 광주시립미술관 특별회의장(3층 전시실)에서 열리는 것이다. 이날 회의에서는 2014년 아시아문화전당의 완공을 앞두고 한국과 동남아시아 문화장관들이 모여 문화협력의 기반을 조성하고, 아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전라남도 나주 운흥사에 있는 석장승의 새김이다. 운흥사 석장승은 장대하고 오래된 석장승의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로서, 숙종 45년(1719년)에 제작되었다. 장승 전면에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새겨져 있어 마주보고 있는 남성형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짝을 이루어 여성형을 이루고 있다. 제작 사업의 화주(化主)가 승려인 변학(卞學)이라 기록함에서 사원에서 주도적으로 일반인들의 신앙인 장승 신앙을 수용하여 제작하였음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운흥사석장생 연대: 1719년(숙종45년) 문화재지정: 중요민속자료 - 제 12호 크기: 높이 270cm, 너비 60cm, 두께 23cm 출토,소재지: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암정리 954번지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전라남도 곡성 태안사에서 만들어 보관해 온 대바라에 새긴 명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 등 승속이 시주가 되어 세종 29년(1447년)에 주조하고 단종 2년(1454년)에 다시 주조하였다. 이 불사를 통해 왕과 왕비와 세자가 만수무강하기를 빌었다. 조선 초기에 왕실의 공덕신앙이 전국의 사찰에 행한 불사의 구체적인 한 예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 태안사대바라(泰安寺大鉢羅) 시대:조선시대 연대: 1447년(세종 29년) (1454년(단종 2년) 개조) 문화재지정:보물 제 956호 너비:92cm 출토지: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번지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이 석탑기는 경북 금릉군(金陵郡:현 김천시) 남면(南面) 오봉리(梧鳳里) 소재의 쌍탑을 1916년에 경복궁으로 이건할 때 알려진 것이다. 이 석탑의 기록에는 758년(경덕왕(景德王) 17) 건립이라는 자료가 있으나 실제 새긴 것은 원성왕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갈항사(葛項寺)는 승전(勝詮)이 상주(尙州) 영내 개녕군(開寧郡)에 정사를 짓고 돌 무리를 거느리고 화엄을 개강하였다는 절로서 그 뒤로도 이 돌들이 전해왔다고 한다(『삼국유사』권4 승전촉루(勝詮髑髏)). 승전은 당(唐)의 법장(法藏)에게서 화엄을 배우고, 법장이 의상(義相)에게 보내는 탐현기(探玄記), 교분기(敎分記) 등 법장 자신의 저술과 그 내용을 적은 서신(書信)을 가져와 전한 승려이다. ▲ 갈항사 석탑비 쌍탑 중 동탑 상층 기단의 면석에 본 자료가 새겨져 있는데, 탑의 높이는 448cm이고 글씨는 약 6cm 크기의 행서체이다. 동서 양탑 기단 밑의 가공석 사리공에서는 사리구가 출토되었다. 현재 탑은 경복궁에 있고, 사리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자료의 찬자와 서자는 미상이다. 이 자료는 남녀 삼형제가 탑을 세우고 그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1699년(숙종 25년)에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에 건립된 신흠(申欽)의 신도비이다. 비의 찬자는 이정구(李廷龜)이고 서자는 심열(沈悅)이며 제액(題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로 썼다. 비문에 따르면 신흠(15661628년)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으로,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고 어머니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기수(麒壽)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承仕郎)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士林)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黨與)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 등을 역임한 후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도 활약했다. ▲ 신흠신도비(申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