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주호가 내려다 보이는 제천 금수산에는 작은 절 정방사가 있다. 정방사 사적에 따르면, 본래는 이곳에는상 중 하 3개의 암자가 있었는데 정방사는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 암자라고 한다. 정방사의 창건은 통일신라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문무왕 2년(662) 의상대사의 제자인 정원스님이 창건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흔적은 찾을 수 없고, 그 설화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있다. 정원스님은 십여년을 수도처를 정하지 못하고 전국을 두루 만행하다 제행무상을 깨닫고, 스승인 의상대사에게 자신의 수행처로 어디가 좋을지를 물었다고 한다. 이에 의상대사는 "내 지팡이의 뒤를 따라가다가 멈추는 곳에 암자를 짓고 불법을 널리 펴라."는 말과 함께, 그 산아래마을에 윤씨 성을 가진 이가 살고 있을 것이니 그 집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면 될 것이라는 말까지 해주었다. 정원스님은 의상대사가 던진 지팡이를 따라서 여러날 산넘고 물을 건너 지금의 금수산 정방사에 이르렸는데 이때의상대사가 던진 지방이가 땅에 내려 앉았다. 이에 사방을 살펴보니 주변이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있고, 앞으로는 맑은 강이 흐르고 있으며, 뒤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기 2562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한국불교 천태종의 총본산인 단양 구인사를 찾았다. 천태종은 대승불교의 한 종파로 불교경전 중묘법연화경을 소의경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단이다. 대승불교란 '위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목표로 깨달음과 중생교화를 목표로 한다는 뜻이며큰수레를 뜻하는 대승이라하고 반면에자기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종파를 소승이라 한다. 천태종은 위진남북조의 큰 혼란기를 지나 통일중국을 이끌었던 수나라시절 천태산(天台山) 지자대사(智者大師)라 불리던지의 (智義)스님이 500년대 후기에 세운 대승불교의 한 종파였다. 천태종은 지자대사가 천태산에 머물면서 가르침을 폈기에 그가 머물던 산의 이름을 종단의 이름으로 붙여 천태종이라 하였다. 천태종과 같은 묘법연화경을 수행과 교학의 목표로 한 한민족에 전래를 살펴보면,백제시대 현광스님이 법화경을 들여와 법화삼매를 깨달아 법화경교를 전하였다고 하며, 신라의 연광스님은 수나라 천태산 지자대사로부터 천태교학을 배우고 돌아와 법화경을 강의하고 신앙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시대 스님들의 천태계 법맥은 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청곡사는 879년 신라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도선국사는 신라말 풍수지리사상을 연구하여 이 땅의 좋은 명당터를 잡아 많은 절을 세웠는데, 진주 청곡사도 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창건 후 500여 년이 지난 1380년에 이르러고려 우왕 6년에 남원 실상사의 상종스님이 크게 중창하였으나 조선의 숭유억불 시대를 거치면서사세가 기울어져 갔다.특히조선 중기 전국토가 병화의 전란으로 빠져들던 임진왜란을 당해 1592년청곡사는 완전 불에 탔다가, 정유재란이 끝난 뒤1602년에야 다시 명맥을 이어갔다. 그뒤 10년이 지난광해군4(1612년)때에 이르러현재 모습의 대웅전을 중건하여오늘에 이른다. 청곡사 대웅전은 비록 전각이 크지는 않지만, 1612년 중건하여 400여 년을 이어온 역사를 지녔고현재경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받은 값진문화재이다. 그러나청곡사의 최고보물을 꼽는다면 뭐니뭐니해도 대웅전 안의 국보 제302호 괘불이다. 또 청곡사에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어려운 목조 범천과 제석천상이 있는데, 이 들 또한 그 희귀성과 작품성이 뛰어나 보물 제1232호로 지정되어있다. 대웅전도 곧 보물급으로 오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북한산(삼각산) 서쪽 자락에 작은 절 옥천암이 있다. 옥천암이란 맑은 물이 흐르는 홍제천 계곡에 있는 암자란 뜻으로, 계곡에 있던 큰 바위에 관세음보살을 새기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소원을 빌었고, 또 그만큼 큰 영험이 전하는 곳이다. 불기 2562년 부처님오신날이 가까와 오니, 이곳 옥천암의 주변에도 아름다운 오색연등이 걸렸다. 분단된지 73년이 되는 올 해, 영험하기로 이름 높은 옥천암에서는 오랫동안관세음보살님께 평화로운 세상이 오고 하루빨리 남북평화통일을 빌어왔으며, 근래 스님과 신도들이 옥천암의 복원과 남북평화통일을 기원하며 특별기도를 하고 있다. 기자도 옥천암을 지나다가 잠시 들러 한민족의 평화통일과 옥천암의 복원을 기원하며옥천암 마애관세음보살께 기도해본다. 옥천암 마애관세음보살은 고려시대 조성된 불상으로, 사실 이 관세음보살이 있었기에 이곳은 전체적으로 불암(佛巖)이라 불렸다. 현재 보물 제1820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하얀 백의를 입고 있고, 보관을 쓰고 있어서 백의관세음보살로도 불린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4월 27일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오래전부터 한민족의 평화통일을 기원하기 위하여 기획한 통일기원 금강경독송회가 열렸다.이에전국의 많은 절들이 동참하여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우는 야단법석이 열렸다. 복잡한 서울의 중심지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차량들이 북적대는 곳이지만, 이곳이 바로 한국의 중심이기에 전국에 흩어져있던 불자들의 힘을 이곳에 모아 금강경을 함께 외우면서 전쟁없는 평화통일을 기원한 것이다. 금강경은 불교의 공사상을 가장 핵심적으로 설한 불교의 대표경전으로 세상살이의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구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한 경전으로, 많은 불교경전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경전이다. 때문에 깨달음을 구하는 스님들이 가장 많이 설법하는 경전이고, 또 이를 통하여 깨달음을 엳은 대사들도 우리 역사속에 많이 있다. 4월 27일은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에 모여서 3번째 정상회담을 한 날이다. 이날의 회담을 통해동족상잔의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가 오길 기원하며, 더 나아가 한민족의 통일을 향한 첫걸음이 되길 기원해본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보탑사는 충북 진천군 보련산 자락에 위치한 근년에 중창불사한 절이다. 보탑사는 말 그대로 주불전이 3층 탑형식으로 되어서 절의 이름도 보배로운 탑이 있는 절이란 의미로 보탑사라 하였다. 보탑사를 중심으로 주변에 보련산 산세가 감싸고 있어서인지 이곳은 연꽃잎이 감싸고 있는 곳이란 뜻의 연곡리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의 보탑사 자리는 고려시대에 절이 있었던 곳이다. 이를 알게된 스님들이 다시금 절을 세우고자 염원하였고,비구니스님인 지광, 묘순, 능현스님이 원력을 세워 한국전통건축의 목탑형식으로 구현한 거대한 목조구조물로 외부에서 보면 3층이나, 내부로 들어가면 5층 건축물이다. 1층과 2층의 지붕이 있는 공간에도 창문이 없는 층이 있기 때문이다. 1층에는 가운데 심주(가운데 중심기둥)를 중심으로 4면에 각 방위별로 부처님과 협시보살을 배치하였으며, 2층에는 팔만대장경 경전을 모시고 있고 3층에는 미래 세상의 부처인미륵불을 모시고 있다. 예전에 한국에는 많은 목탑들이 있었다. 그러나몽골의 침략 등전란을 거치는 동안 실물은 사라지고, 그 기록마저 산실되어 서기 600년대 지었던 구층목탑의 구조가 어찌 생겼는지 알 수 없어 더욱 궁금할 따름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밀양에 있는 만어사는그 역사가 멀고 먼2000 창건설화를 간직한 절이다. 만어사는 창건설화가 2가지로 전하는데, 그 첫째로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것으로 김수로왕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가락국의 김수로왕 때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살고 있던 독룡(毒龍)과 이산에 살았던 나찰녀(羅刹女)가 서로 사귀면서 뇌우와 우박을 일으켜 4년동안 오곡의 결실을 맺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이에 수로왕은 백성들의 원성을 해결하고자 주술로써 이를 금하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수로왕은 기도로 인도 부처님의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기도 끝에 부처님이 수로왕의 뜻을 알고 여섯 비구와 1만의 하늘사람을 데리고 와서 독룡과 나찰려를 항복시켰다. 그리고 이들에게 가르침을 내려 교화시켜 그동안의 재앙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에 수로왕은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곳에 만어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한편 도 하나의 창건설화는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있는데 이에 따르면,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목숨이 다한 것을 알고 목숨연장을 위하여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의 신통한 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봄이 오는 길목, 남쪽 지방의 절을 찾아 나선 김에 김해를 찾았다. 온갖 아름다운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있고. 이제 막 돋아나는 초록빛 잎새들로세상은 생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발걸음한 봉하마을의 봄은 조용하다.봉하마을은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임기를 마친 뒤, 서울의 온갖 영욕의 삶을 정리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온 노 대통령은 산업화와농약으로오염된 농토에 친환경 농법인오리농법으로 쌀을 생산하게 하고, 김해지역에 분포하는 옛날야생차나무를 다시금 되살려 '장군차'라는 봉하의명품을 보급하는 등, 침체된 김해 진영읍과 봉하마을을 살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안타깝게도자신의 마지막 꿈을 펼치던 이곳 봉하마을에 노무현 대통령은 없다. 그가 살아있을 때, 퇴임한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보다 더 인기가 있어, 전국에서 그를 만나보겠다는 사람들이 매일 수천명씩 봉하마을로 몰려드는 우리 역사상 처음보는진풍경은 불과 1년여 만에 막을 내린것이다. 이제 어느덧그가 그렇게 생을 마감한지도 만9년이 되었다.노무현 대통령은 대학은 안나왔지만, 오로지 자신의 집념으로 사법고시를 통하여, 정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 온산에 꽃이 피고, 땅속에서 새순이 돋아난다. 역사의 고장 강화에 있는 전등사에도 어김없이 봄이 와, 진달래가 피어나고, 화단에는 잡초도 나기시작하였다. 자연의 순환을 실감하면서 강화 전등사의 봄풍경을 잠시 둘러본다. 전등사의 창건유래는 멀리 고구려까지 올라간다. 전등사 창건기에 따르면 고구려 아도화상은 신라에 불법을 전하기 위하여 이곳 전등사를 창건하였다. 당시 절의 이름은 진종사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 전등사에는 고려 중기 이전의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다. 지금의 전등사는 고려 원종 5년(1264) 삼랑성에 가궁궐을 짓고 몽골의 침략기간 동안 잠시 머물렀을 때 이곳 전등사에서 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조선조에 들어 조선의 왕실사고를 전등사 위에 짓고 이를 지키는 절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금도 전등사 맨 안쪽에는 왕실사고를 보관하던 건물이 남아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위정자들의 부패와 탐욕은 자신들만 호의호식 대대손손 잘먹고 잘살뿐 나라는 쇠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러한 부파와 타락으로조선말부터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간수하지 못한 한민족은외세에 시달리며 극도의 수난속에 살아왔다. 그런 수난이 계속되면 가장 힘들게 사는 것이 힘없고 빽없는 서민이하의 사람들이다. 이런 역사속에 결코 잊어서는 안될또 하나 비극의 역사 현장이제주이고, 제주에는 오랫동안 말도 못꺼냈던 비극적 사실들이 땅속에 진실을숨긴채 있다가 이제야 그 모습을 하나 둘 내보이고 있다.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외세가 물러가고 또 다른 외세 북에는 소련과 남에는 미국이 남과 북에밀려오면서 한민족은이념의 갈등속에 살아야 했고,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이념의 희생양이 되어 죄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자 2000년 초에야 한라산 한 모퉁이에 4.3평화공원과 4.3평화기념관이 세워지고 이들을 기억하는 여러 추모행사들이 거행되고 있다. 이제야 말 할 수 있게 되어 진실이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고 하지만,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수만명의원혼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일이다. 정확한 희생의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어림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