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산사 원통전이 보이는 응향각 문아래에서 ▲ 낙산사7층석탑.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전란과 세월의 풍파에 많은 손실을 입었다. ▲ 원통전 앞 문에 들어서는 사람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낙산사는 그 창건연대는 통일신라 초기로 올라간다. 낙산사의 창건주는 중국에서 화엄종이태동한때로 당나라의 지엄에게 유학하여 그의 인가를 받고 이를 들여와한국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대사이다. 그는 중국에 있을 때에도 많은 어려움을관세음보살의 도움으로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자신라땅에서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을 찾아 헤매다가 이곳 낙산사의 동쪽 바닷가홍련암 바위틈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홍련암을 짓고이후 이곳이관세음보살의 상주처로 여겨지게되었고 관세음보살의 성지가 되었다. 이후 1300년이 넘게 관세음보살기도 속에 수많은영험담이 전해져오고 있고, 지금도 동해안의 관세음보살의 성지로, 또 아름다운 일출의 명소로 거듭나, 이제는 한국을 넘어서 중국 일본에서 온관세음보살의 영험을 믿고 기도하는 참례객들로 붐비고 있다. 이런 사찰이지만 그동안 수많은 전란과 화재로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였고, 최근에도 산불에 사찰의 대부분의 건축물이 소실되고 조선조에 주조되었던
▲ 중국(청나라)과 일본조차지의 경계 계단에는 두 나라의 상징이 석등으로 표현되었다. 현재 공사 중.(왼쪽이 청나라, 오른쪽이 일본) ▲ 개항지의 중심이던 관청건물 현재는 인천 중구청으로 활용되고 있다. ▲ 근대건축물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르네상스식 건축물 ▲ 일본풍의 건축물로 남아있는 건물들로 주로 사무소나 커피점들이다. ▲ 일본풍 건물들의 거리. 당시에는 최신식 건축물들이었다. ▲ 일본풍의 건축물사이로 교회가 서있다. ▲ 중국을 상징하는 성인 공자상(像).청도시에서 제작하여 기증하였다. ▲ 중국을 상징하는 솟을대문이 서있다. ▲ 중국거리 중심지에는 계단에도 상징문이 그려져있다. ▲ 중국거리의 중심부에 있는 중국풍의 건축물 ▲ 중국 만두가계 앞에 익살스런 인형 ▲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색으로 장식된 거리의 가로등과 깃발 ▲ 온통 붉은 색으로 장식한 중국거리 ▲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중국인 거리 [그린경제/얼레빗 =최우성 기자] 1876년 조선말 남의 땅을 측량한다고 들어온 일본의 배를 격침하자, 이를 기화로 일본은 함대를 파견하여 강제로 인천항이 개항된 이래 외국문물이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지
▲ 운현궁의 대문과 행랑채 ▲ 운현궁 솟을대문 ▲ 운현궁 본채로 들어가기 전에 해설을 듣는 탐방객들 ▲ 사랑채 대문에서 본 사랑채 ▲ 대문에서 본 사랑채(노락당)의 왼쪽면 ▲ 기둥상부 익공과 처마도리 아래에는 둥근 처마도리를 받치는 장여와 장여를 받치는 소로가 있어 집의 격조가 높음을 말해준다. ▲ 추사가 쓴 사랑채 현판 노락당 ▲ 사랑채에서 본 사랑채대문과 대문행랑채 ▲ 안채 집안의 여자들이 기거하는 행랑칸툇마루에 걸터 앉아 ▲ 사랑채 누각 마루방 ▲ 사랑채에서 본 안채가는 길 ▲ 전벽돌 굴둑이 있는 안채의 모습. 다락방 밑에 아궁이가 있다. ▲ 안채에서 내부 통로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아래 마당과 뜰을 오가는 통로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다. ▲ 운현궁의 마당은 본래 사병들이 훈련도 하고 말과 마차 등이 대기하는 공간으로 잡인들의 접근은 얼씬도 못하는 곳이다. ▲ 운현궁마당에서 본 안채 전경과 외부담장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운현궁은 본래 날씨를 살피던 서운관 앞에 있는 고개를 뜻하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을
▲ 스님의 집전으로 백중날 조상님들의 고혼을 불러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를 지낸다. ▲ 자신들의 조상영혼에게 절을 올린다. ▲ 불경과 설법을 듣고 조상들의 이름이 적힌 영가를 모시고 부처님 앞을 돌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다. ▲ 재를 마친 뒤 영가의 이름이 적힌 영가집을 불태워 조상들의 고혼들이 본래 자리로잘 돌아가길 빈다. ▲ 조상들의 영가집을 하나 하나 불에태우는 스님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8월 10일은 음력으로는 7춸 15일이고, 우리는 이날을백중날이라 불렀다. 백중(百中)은 백종, 머슴생일날, 호미씻는 날, 축수하는 날,중원, 상농 명절 등으로 불리웠는데, 이때 쯤이면 바쁜 벼농사 밭농사일을잠시 뒤로 미루고좀여가를 즐길 수 있는때인데 그렇기 때문에 머슴도 하루는 충분히 쉬면서 놀고 즐길 수 있는 날이라 하여생긴 말이 '머슴의 생일'로도 불린 것이다. 백중은모내기부터 지금까지 농번기 중 힘들었던 농부들이 그동안의 힘들었던 수고에 대한 위로와보답으로 잠시 쉴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가지면서, 또한 인간으로써 자신들의조상들을 생각하며 그영가들께도 예를 드리는 날이다. 백중을 불가에서는 '우란분절'이라고도 하는
▲ 극락교 건너기 전 석장승, 본래는 2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1930년대 홍수로 떠내려 갔다고 한다. 석장승 뒤로 흐르는 냇가 어딘가에 묻혀있지 않나 궁금하다. 이 석장승 이름은 '용호금사 축귀장군' ▲ 실상사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서 본 만수천 ▲ 극락교 건너편 오른쪽에 있는 석장승, 그 이름은 대장군으로 새겨있다. ▲ 극락교를 건너면 왼쪽에 있는 석장승. 가장 크고 듬직하다. 그 이름은 상원주장군으로 새겨졌다. ▲ 극락교를 건너기 전 석장승 확대 모습 ▲ 극락교 건너서 오른쪽에 있는 석장승 확대 모습 ▲ 극락교 건너 왼쪽에 있는 석장승 확대 모습 ▲ 최근에 세운 목장승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실상사는 통일신라 9산선문의 하나로 실상선문을 연 홍척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지리산을 주변으로한 대찰로 알려져있다. 홍척국사는 당시 보림사를 개창한 도의국사와 함께 당에 유학하여 선종의 법을 전수하고 돌아왔는데 도의는 장흥에보림사를 홍척은 남원에 실상사를 지었다. 이후 그의 수제자인 수철화상이 실상사를 크게 중창하여 선문의 일가를 이루었고, 그뒤 선종의 대찰로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고려를 거치고 조선조에 이르러 세조때 큰 화재가
▲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의 명소로 가장 한옥이 잘 보존된 한옥골목이다. ▲ 남산이 보이는 골목길에서 ▲ 정다운 한옥들만으로 이루어진 골목길 담장겸 벽이 4고석으로 잘 정비되었다. ▲ 남산과 시내가 함께 잘 보인다. ▲ 골목길을 내려다 보면서... ▲ 인왕산이 보이는 한옥마을의 언덕위에서 ▲ 좁은 집에도 소나무가 자라나서 운치를 더해준다. ▲ 경사진 대지에 대문을무지개 모양으로 벽돌을 쌓은 모습. ▲ 한옥과 근대건물이 공존하는 골목 ▲ 한옥골목 안에 있는 꼭두각시 인형의 집 ▲ 한옥의 지붕들이 중첩되어 더욱 정답다. 그러나 일부는 현대식으로 고친 집이 보여 한옥지구의 보존이 어려움을 겪은 흔적이 보인다. ▲ 집안에 작은 연못이 있는 찻집정원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80년대만 해도 한옥으로만 빼곡하던 서울의 북촌일대가 80년대 후반기 이후로 급속히 철근콘크리트와 벽돌조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한옥에 살자니 골목도 좁아차도 한대 들어갈 길이 없고, 공간도 좁아서 침대하나 놓기도 힘들고, 양식 가구나 식탁도 놓을 수 없어서살기 불편하다는 인식이 들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그러다가 90년대에는 급속히 한옥이
▲ 청운동 윤동주문학관 전경 ▲ 윤동주 문학관 정면 ▲ 문학관 내부 중정, 영상실로 가는 길 ▲ 영상관 내부, 암울했던 시절 하늘에서 내리는 한줄기 빛을 얼마나 그리워 했을지... ▲ 문학관 언덕 위에서 본 문학관 중정, 시인을 생각하며 차한 잔 마실 수 있는 카페도 있다. ▲ 문학관 언덕 위에서 본 서울시내. 남산과 시내 빌딩들이 훤히 보인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대를 살면서도 꿈을 안고 살았던 시인 윤동주. 그는 광복을 불과 6달 앞두고 갔지만, 그의 시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암울한 시대에 살면서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서 곱디 곱게 쓴 시들은시공간을 뛰어 넘어 모든 이들을 감동케 한다. 그는 독립운동에 투사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국의 현실을 내몰라라 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은 그의 시 속에 빼곡히 스며있으니, 어쩌면 한 소시민적인 감정으로 살았던 대부분의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함축적으로 대변한 듯 보인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에 태어나 1945년 2월에 이승을 떠났다. 불과 6개월 후에 한국이 광복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그였지만, 밤하늘의
▲ 하나, 둘 이승의 일을 마치고 본디 나온 곳으로 가는 꽃잎 ▲ 마지막 두잎 남았다. 하지만 미련은 없는 듯. ▲ 꽃잎은 다 지고, 이제 꽃술까지 진다. ▲ 지는 연꽃 곁에 늦둥이로 고개를 내민 녀석, 분발을 기대해본다. ▲ 알찬 결실로 후대를 기약하며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해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한해가 바뀌면 새로운 마음으로 1년을 맞이한다. 달력의 첫장에 가득채워진 365일... 어찌보면 너무 많아 지루한날들 같지만, 하루 하루 지나고 보면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는지... 잿빛 자연의 엄동설한 중에는 추위에 움추렸다가, 날이 풀리고아지랑이 피어나고 온갖 초목과꽃들이 피는봄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어느덧 장마도 끝이나고 삼복도 막바지다. 그런데 자연은 사람보다 더 빨리 계절을알고 있다. 무더운 여름이면 사람들은 너무 더워 추수와결실의 계절을 느끼기 어렵지만, 어느덧 자연은 가을 맞이 준비를 하고 있다. 연꽃밭에 연들도 이미 자신들의 갈 길을 잘 알고 있다. 봄부터 피어나던무성한 연잎들도 이미 초록의 한계를 넘어서, 서로 앞다투어아름다움을 언제 뽐냈느냐는 듯 이제 결실을 재촉한다. 제 갈길을 찾아가는연밥들이 하나 둘... 늘
▲ 광호문 광장에 노숙자 숙소같은 천막들이 들어서있다. 광장을 지키는 이순신장군 동상이 지켜보고 있다. ▲ 이순신장군이 되살아나서라도 참사의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길 ... ▲ 세월호 가족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방법이 이것 뿐이라며 천막을 치고 농성한다. ▲ 참사의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 밝혀지기를 고대하며... ▲ 세월호 참사의 실상을 알리는 사진들. 당시 세월호 안에서 참사가 발생할 것을 전혀 예측못하고 수학여행의 들뜬 마음만 가득한 아이들의 모습이 자신들이 찍은 손말틀(휴대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 유가족들의 슬픔에 위로차 1일 단식에 동참 하는 이들 ▲ 지친몸 바람개비를 접으면서 쉬고 있는 유가족들 ▲ 꿈이 꿈으로 끝나버려 너무도 한스럽다. ▲ 과연 누구의 잘못인지나 제대로 밝혀지길 학수고대 한다는 절규...그래야 다음에라도 비슷한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고 호소하는 가족들... ▲ 떠났지만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하는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슬퍼할 겨를도 없이 광장으로 나온 가족들.. ▲ 왜 자신들이 이승을 떠나야 했는지를 알지도 못한 채 이 이승을 등진 그들의 원통한 죽음을 바람개비만이 전하고 있다. ▲ 폭염의 계절에 광장에는 바람개비도 멈
불암산 산마루 온통 바위로 덮여있다. ▲ 불암산 산마루가 보이는 풍경 ▲ 석천암 원경 ▲ 불암산 큰 바위아래 자리한 석천암 ▲ 숲속에 포근하게 안겨있는석천암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장마답지 않은 장마가 지나갔다. 장마철이면 비가 많이 와야 하는데 올 해는 비는 안오고 무더위만 극심했다. 그러나 지구의 기상변화가 심하여 장마는 끝났지만 국지성 호우와 서태평양 적도근처에서 발생한 태풍은 올해도 여러차례 온다고 하니 부족한 강수량은 이들에게 기대보아야 할 것 같다. 만물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 아무리 살기좋은 기후라 하더라도 비가 안오면 바로 사막화가 진행되어 동식물도 살기 어려운 곳이 되고 만다. 산은 황량한 바위들만 드러나고, 들판은 모래벌판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아프리카의 사하라나 중국 북부지방의 타클라마칸사막이나 고비사막도 비가 안오기에 그리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그 어디에도 사막화가 된 곳이 없으니, 한국이야말로 산과 들이 적당히 어우러진 축복의 땅이라 생각된다. 산지가 많다고 하지만 한국은 그 어디나 푸르름이 가득한 녹색의 국토이고,서울을 중심으로 볼 때에도 주변이 그리 높지도 않은 산으로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