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이 있는 강가에 움집을 짓다 ▲ 박물관에 모형으로 지어진 움집 ▲ 뗀돌로 만든 주먹도끼 등 기구류 ▲ 큰 돌에서 떼어내 만든 기구들 ▲ 박물관 모습 ▲ 석장리 구석기박물관 정문 ▲ 구석기사람과 함께 선 현생인류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한국인이 살고 있는 한반도에는 유인원 시대로 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한국에는 구석기시대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이 일본보다 그 무엇이든 사람과 관계된문명이 일찍 시작되었다는 것을 일인학자들이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석기 유적들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그럴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결론부터 내리고 조사하였다.왜냐하면 한국이 일본보다 문명이 앞선 것이었다면 일본인들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할 우월적인 근거를말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석장리 구석기유적은구석기 가운데 후기에 속하는 유적에 속하지만, 1964년 공주 석장리에서 구석기에 살던 사람들의 움집터와 돌로 만든 연모와생활도구들 그리고 그들이 잡아먹었던 동물의 뼈가 대량으로 발굴되자 그 이후로는 그 어느 누구도 한국의 구석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사
▲ 정면에서 본 독립문. 독립문의 앞에는 돌기둥이 서있다. 그 돌기둥은 중국의 사신들이 올때 꼭 거쳐서 왔다고 한다. ▲ 북악산쪽으로 본 독립문 ▲ 옆에서 경사지게 본 독립문 ▲ 옆에서 경사지게 본 독립문 ▲ 독립문이라 새겨진 홍예돌문 ▲ 독립문 가운데 무지개 문 아래에 고가도로가 있고, 그 고가도로 밑에 서있는 돌기둥은 영은문의 기둥돌이다. ▲ 독립문 옆 잔디밭에는 비둘기들이 노닌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구한말 1895년 갑오개혁으로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개혁을 외쳤지만 이미 청나라와 일본의 눈치와 간섭으로 자주적인 개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학혁명은 백성이 스스로일어나 나라를 살리고자 하였으나 이미 스스로 개혁할 힘을 갖지 못한 조정은 자꾸만 외세의 간섭으로 자주성을 잃어만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미국과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인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은자주국가의 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1897년독립협회를 만들고, 이 협회를 중심으로 남의 나라에 의지하지 않고독립의 의지를 표현하고자 전국민이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세운 것이 화강석 홍예문이다. 이런 문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개선문을 모본으로 하여 세우게 되었다.
▲ 인왕문과 범종루로 쓰는 일음루(一音樓) ▲ 범종루와 천왕문 ▲ 범종루의 내부 ▲ 범종의 전체모습 ▲ 비파와 생황을 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상으로 나부끼는 옷과 구름을 보면 알 수 있다. ▲ 범종의 걸이로 용이 새겨져 있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기자] 성북구 정릉동에는 삼각산의 동남측면의 경사진 곳에 봉국사가 있다. 본래는 한양성 밖으로 삼각산의 동측면에 위치한 한적한 곳이었으나 서울의 팽창으로 이제는 한 복판이 되었다. 봉국사는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 친구인 무학대사가 절 짓기를 권유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후 세조때 중창되었으며 조선 조 기간 동안에는 숭유억불정책에 밀려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이마저 임오군란의 와중에 반란군의 방화로1882년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재건하지 못하고 허름한 판자집 같은 누추한 모습에그 이름만 유지하여 오다가 1977년 주지로 온 현근스님에 의하여 현재의 봉국사로 다시 태어났다. 가파른 경사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지은 일주문과 종루가 있는데, 이는 근세의 건축재료인철근콘크리트조 골조에 지붕만 한옥기와 지붕형태로 지었다. 종각의1층은 사람들의 통로로 활용하면서 2층에 종을 매달아
▲ 가을이면 빨간 단풍이 드는 단풍나무 아래로 본 향원정 ▲ 연못 속에 작은 연꽃 어리연이 핀 향원정 ▲ 수련은 연꽃 중에 물위로 잎과 꽃이 솟아나지 않고 앉아있는 듯 피어난다. ▲ 연잎이 피어나는 모습 ▲ 연꽃과 연봉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여름이 되고보니 궁궐의 운치와 정자의 아름다움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경복궁의 후원향원정에 둘러 보았다. 요즈음에는 한국인들 보다 외국인 특히 중국인들과 동남아시아인 들이 많이들 찾아와서 한국의 아름다운 궁궐을 감상하고 사진들도 많이들 찍어간다. 전에는 일본인들도 많이 찾았었는데, 근래는 소수의 일본인들만이 찾고 있어 한일간의 역사문제가 관광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을 실감한다. 연꽃은 그 꽃자체도 아름답지만 그 향기 또한멀리 멀리 퍼져서 혼탁한 세상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꽃중에 꽃이 연꽃이라. 연 뿌리는더럽기로 소문난 진흙 뻘속에 두고 있지만, 물 밖으로 내민 둥글고 원만한 잎이 참 곱다. 그 꽃은 세상 어느 꽃에 견줄 바가 아니다. 연꽃은 꽃을 피운 뒤에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라, 꽃봉우리 속에 이미 연자를 간직한채 꽃잎을 피워낸다. 불교에서 스승의 법을 마음에서 마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 다과상을 마련한 뒤 보자기로 덮어놓은 모습 ▲ 주전자에는 뜨거운 물과 차와 함께 먹을 떡을 준비한다. ▲ 사범이 시범을 보이는 장면으로 찻상을 펼치기 전에 맛좋은 샘의 물을 떠다가 끓인 물을 주전자에 담아서 가지고 옴 ▲ 사범이 찻잔을 펼치고 시범을 보인다. 다포를 걷어내고 다구를 펼친다 ▲ 주전자에서 수구로 1차 식힌 물로 다관과 찻잔을 한 번 데워서 퇴수기에 버린다음 다시 다관에 차를 넣고 주전자에서 수고에 따른 물을 다관에 부어서 차를 우린다 ▲ 숙우에서 1차로 식은 물을 차잎을 넣은 다관에 물을 부을 때에는 적절한 높이(다관의 높이 정도) 떼어서 또로록 하는 물소리를 들리게 따른다. 이렇게 함으로서 귀로도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느낀다. ▲ 다완에서 우려진 차를 찻잔에 따른다. 퇴수기에는 다관과 찻잔을 데운 물이 담겨있다. ▲ 우려낸 차를 두손으로 감싸고 마신다. 차잎은 한번만 우리는 것이 아니라 3회 이상 우려내 마신다. 찻잎은 처음 우릴 때에는 2~3분 걸려 우리지만, 2번째는 더 빨리 우려진다. ▲ 손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차를 마신다. ▲ 사범의 시연을 보고 시연에 참가
▲ 서울 시청앞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란 리본들 ▲ 리본이 걸린 추모의 숲을 지나는 사람들 ▲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참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추모리본 사이를 놀이터 삼아서.. ▲ 이제는 한적해진 본양소 앞을 무심히 지나는 행인들. 분향하는 사람들은 가뭄에 콩나듯 하고 행인들만 분주히 지나친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어느 덧 2달이 지났건만 아직도 깊은 바다 칠흑같은 지옥의 바다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희생자들이 남아있다. 그래서 저 추모의 리본숲과 분양소를 치우고 싶어도 치울 수가 없다.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는 배를 운행하는 선박회사와 그 배의 안전운행을 책임졌던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지만, 이는 결국 이 나라를 이끌어 간다는 국가 경영의 지도자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배를 타고 젊은 날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자 나섰던 제주행 수학여행 뱃길이 밤을 새고 나자 부풀었던 꿈은 날라가고, 참혹한 지옥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들이 돈을 내고 꿈을 꾼 이유는 국가가 인정해준 기준에 따라 적합하다고 확인 받은 배의 성능과 그 배를 운행하는 사람들의 자격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배를 잘못 운행해서 순식간에 그 큰 배가 뒤집혔고, 그 순간에도 구
[그린경제/얼레빗= 최우성 기자] ▲ 대전 금강변 로하스공원내 차윤주 차윤도 형제 정려각. 간단한 사방 1칸짜리 기와집에 형제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2기 있다.그 외부에는 최근에 세운 비각의 유래가 기록된 비석이 서있다. 금강 로하스 공원에 있는 차윤도 차윤주 효자 정려각 !! 인간으로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 하여 본받기를 바라며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효자 차윤주 윤도의 행적을 조사해보니 다음과 같다. 조선 정조때 태어난 효자 차윤주 윤도 형제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였는데 동생인 윤도가 17세에 어머니가 깊은 병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윤도'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내 인육개탕을 달여서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한편 형인 차윤주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리길을 성묘하고 호곡을 하여 그 효행이 널리 알려졌다. 그런 사연을 그들이 죽은 뒤 소문으로알게된 고종은 1891년 고종 17년 우부승지를 보내서 사실을 확인하고 효자로 인정하는 교지 그리고목수와 목재를 내리고 효자문과 효자비를 세웠다. 이후 나라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고종이 내린 편액은 소실되고 다면 비석2기를 보호하는 비각이 퇴락해가는 것을 해방이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 주상절리 해변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 바닷가에 위치한 주상절리해변이다. 주상절리는 태고적 지구 내부에 있던 마그마가 지표면으로 상승하면서 갑자기 굳어지면서 6각기둥모양으로 형성된 지질학적 현상으로 한국에는 제주도 중문 단지근처에 있는 주상절리와 광주 무등산 입석대 주상절리 그리고 이곳 경주 읍천의 주상절리가 있다. 그런데 경주 읍천의 주상절리는 세계적으로도 특이하게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지면서 굳어있어 특히나 귀중한 지질자료로 평가된다. 얼마 전까지는 군부대가 위치하여 제대로 볼 수도 없었지만, 이제는 경주시에서 산책로를 잘 정비하여 많은 사람들이 산책도 하고 지질공부도 할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 ▲ 육각 기둥을 모아놓은 듯한 주상절리 ▲ 소나무사이로 본 부채꼴 주상절리 ▲ 부채꼴 주상절리가 펼쳐져 있는 해변 ▲ 기둥을 포개놓은 듯한 주상절리 그런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뿐 아니라, 관광지 유적지를 찾는 국민들의 주인의식이 요구된다. 아름다운 문화유적을 찾으면서 자신이 가지고 와서 맛있게 먹은 각종 음식물 포장지들을 근처 덤풀속에 버리거나, 바닷가에 돌틈에 끼워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 연오랑 세오녀 광장 ▲ 연오랑 상 ▲ 연오랑과 세오녀상 삼국유사에 기록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의 유래가 된 곳이 바로 포항이라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8대 아달라왕 4년(157년)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닷가에서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큰 바위에 오르자 바위가 갑자기 욺직여'연오'를 태우고 일본으로갔다. 그런데 '연오'를 본 일본인들은 '연오'의 생김이 비상함을 보고연오를 왕으로 삼았다. 한편 '세오'는 남편인 '연오'가 돌아오지 않음을 이상히 여겨 바닷가로 나가서 찾아보았으나, '연오'가 벗어놓은 신발만 발견하고 바위로 올라가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바위가 욺직여 '세오'를 싣고 '연오'왕이 있는 곳까지 데리고 왔다. 그러자 그나라 사람들이 놀라서 그녀를 왕에게 데려오니 부부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연오'와 '세오'가 사라진 신라에는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었고, 일관이 점을 쳐보니 신라에 있던 정기(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으로 가버린 때문이라하여 왕은 사자를 보내서 '연오랑' '세오녀'를 다시 데리고 오려고 하였다. 하지만 '연오'는
▲ 왼손에 잡힐 듯 한 태양 ▲ 왼손-1 ▲ 왼손-2 ▲ 왼손과 꺼지지 않는 횃불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호미곶 새천년 광장에 세워진 거대한 조형물인 상생의 손. 오른손은 바다에 솟아나 있고, 왼손은 광장의 중심에 세워져 있다. 두 손은 서로 마주 보면서 한국의 육지에서는 가장 먼저 태양을 맞이 한다. 서로 마주만 볼 뿐 영원히 만날 수는 없는 두 손이지만, 그 이름처럼 서로가 서로롤 돕고 이해하는 상생의 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왼손 앞에 설치된 영원히 꺼지지 않는 횃불이 어찌된 일인지 꺼져있어서 아쉬움이 크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