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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명나라 황제를 배향하던 괴산 "화양서원"

   
▲ 화양서원 전경

   
▲ 화양서원 내삼문 측면(내삼문은 솟을 삼문)

   
▲ 만동묘를 세원 내력을 기록한 비와 비각

   
▲ 만동묘 묘정비. 대원군은 내부 글씨를 모두 훼손하였다.

   
▲ 만동묘를 오르기 위해서는 반듯히 서서 오르지 못하고 저렇게 옆으로 올라가고 내려가야 한다.그 이유는 명나라 황제를 모신 사당을  감히 바른 자세로 오르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그리 만든 듯..

   
▲ 명나라 황제를 모신 사당 만동묘 정면

   
▲ 만동묘 안에 모셔진 명나라 황제의 신위

   
▲  외삼문에서 본 만동묘 모정비각

   
▲ 여름 선비되기 화양서원과 만동묘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것(?)인지 궁금하다.

   
▲ 화양서원의 내력을 기록한 화양서원 묘정비, 화양서원의 영욕을 기록하엿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속리산 깊은계곡 화양계곡에는 계곡의 이름을 딴 화양서원이 있다.

화양서원은 조선조 후기 세도정치가 열리기 전 예학의 대가이면서 학자로 그 이름을 날리던 '우암' 송시열의 뜻에 따라 세워진 서원이다. 서원이라 함은 조선조  유학 중에서도 성리학을 근본으로 도학을 공부하되 자신들이 존경하는 선대의 도학자를 표상으로 그분의 신주로 모시고,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을 지어 그 뜻을 받들고 공부에 매진하고자 지은 것이다.

이처럼 서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높은 도학의 경지에 이른 선조들의 뜻을 계승하여 세상을 밝히겠다는  것으로 요즈음으로 치면 사립대학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그런 서원은 대부분 읍내에서 멀리 떨어지고 산천이 수려한 곳을 골라 지었다. 당시 성리학자들은 모두가 도학의 이상향을 꿈꾸었기에 무릉도원 같은 곳, 산좋고 물맑은 곳에 정하는 것이 당연한 입지선정이다.

그런데 화양서원에 모신 신위는  한국의 다른 서원들과는 크게 다르다. 그는 다름 아닌 사당의 주인이 명나라의 황제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하기 위하여 파병해준 신종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을 모신 사당이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임진왜란 때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은 명나라가 파병하여준 덕분이기 때문에 그 의리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여, 자신이 사약을 받고 죽을 때에도 그의 제자인 권상하에게 유언으로 이곳 화양동에 '신종'과 '의종'을 모실 사당을 짓도록 하였고, 권상하는 송시열의 뜻에 따라 1703년 화양서원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후 1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은 서원을 중심으로한 학연에 따라 당파의 분화가 지속되고, 이후에는 또 세도정치가 계속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확대와 일본의 조선 침탈 야욕 속에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여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는 서원을 근거지로 한 학연에 의한 지도층들의 패거리 정치를 깨기 위하여는 그  중심에  있는 서원을 반드시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첫번째 대상이 바로 이곳 송시열이 명나라의 황제들을 모시도록 한 화양서원이었다.

흥선대원군은 화양서원을 제일 먼저 폐하고, 그 전각들을 모두 철거 하였으며, 그도 모자라 만동묘와 거기 새긴 글씨까지도 모두 훼손하여 땅에 파 묻었다. 대원군은 이후 전국의 각처에 이름있는 선비나 유학자를 중심으로  학문연구를 하던  650개 서원 중에서 임금이 현판을 내린 47개의 사액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후 조선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100여년의 험한 세월을 지냈다. 그런 세월을 보낸 뒤, 조국의 근대화와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지방민들도 자신들의 잊었던 과거 자신들의 지방 역사를 다시금 재조명하면서 각 지역에 세웠던 향교, 서원, 누정 등을 그대로 다시 복원하는 일들이 성행하게 되었고, 그런 시대 조류에 따라 이곳 화양동에도 화양서원이 다시금 복원되게 되었다.

그런데 화양서원을 답사하면서 생각나는 게 있다. 역사는 한 번 존재했던 것은 그것이 좋던 나쁘던 사라지지 않고, 되살아나고 반복된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보았을 때는 조선의 독립성에 큰 폐해가 있는 존재로 여겨지던 서원들이지만, 대원군 이후 세월이 150여년 흐른 뒤, 오늘에는 그것도 하나의 역사이고, 그 안에도 뭔가 본 받을만한 요소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이를 되살리니 말이다.

속리산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절경 화양계곡의 중심에 있는 화양서원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과연 선조들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를 어디까지 존중하고  찬양해야 할 것인지 고민에 빠져본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