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 = 최우성 기자] ▲ 새들도 자리 다툼을 한다. 원래 자기 자리를 달라는 듯 날개짓으로 몸부림 쳐보지만... ▲그러나 먼저 차지한 놈이 임자라며 버티는 녀석이 있다. ▲ 날마다 그런 다툼으로 호미곶의 하루 해가 지고 그리고 또 6월 14일 아침해는 떴다. ▲ 떠 오르는 해를 바라다보면서 카메라 렌즈에 눈을 고정하다 잡은 기막힌 장면으로 새끼 손가락에 앉은 새 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른다. 언뜻보면 새끼 손가락에 등불을 밝힌 느낌이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호미곶의 손 정미자 그래 보고 싶지 않는 것은 손을 저어라 옳거니 바르지 않은 것에는 손을 빼들어라 비록 손목을 자르더라도 불의에 더는 더는 참지 말아라 포항 호미곶으로 출사 나와 있습니다. 정확히 호미곶의 위치는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읍ㆍ동해면ㆍ호미곶면에 속하며 서쪽은 영일만, 동쪽은 동해에 접해있습니다.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으로, 일출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이며, 호미곶 등대로도 유명한 곳이지요.. 호미곶은 16세기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南師古)가 『산수비경(山水秘境)』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기술하였고,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국토 최동단을 측정하기 위해 영일만 호미곶을 일곱 번이나 답사 측정한 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쪽임을 확인하여, 호랑이 꼬리 부분이라고 기록하여 한자로 호미곶(虎尾串)이라 불리며 다른 말로는 동외곶(冬外串), 장기곶(長鬐串)으로도 불립니다. 오늘 아침에 운무가 끼어 사진 찍기에는 썩 좋지 않
▲ 마곡사 일주문 ▲ 일주문을 지나서 태화산 계곡으로 ▲ 계곡의 초록빛 물과 나무 ▲ 사찰로 가는 극락교 ▲ 금강문(금강역사) ▲ 극락교를 지나며 ▲ 돌거북이 사는 바다 ▲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명전 앞에서 ▲ 대광명전 앞의 5층석탑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상륜부에 특이한 모양의 라마탑이 있다. ▲ 5층석탑의 상륜부 ▲ 대광명전 위에 대웅보전이 있다. ▲ 대광명전에 모셔진 비로자나불부처님의 상호(얼국과 몸)은 비슷하나, 손의 모양이 다르다. ▲ 경내에 걸린 연꽃등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통일 신라초기에 자장율사가 절을 세우고 낙성식을 하는데 사람들이 하도 많이 와서 마치 삼밭에 삼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듯 사람이 많이 들어찾다고 하여 이름을 마곡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약 200년 동안은 폐사지가 되어 도둑들의 소굴이 되었다가 1172년 고려 명종 2년 보조국사 지눌이 왕명을 받들어 다시금 중창을 하였다. 최근세에는 나라 잃은 민족의 지도자로 중국의 각지를 떠돌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어오던 백범 김구 선생이 중국으로 떠나기 전 젊은 시절 행자스님으로몇 개월을 지냈던 적이
공산성의 서문(금서루) 서문에 오르는 길목에는 지방관찰사와 감사등의 공덕비가 즐비하다. 공산성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문화답사객들. 인조가 피신했던 곳인 쌍수정 아래 비각에서 설명을 듣는 답사객들 공산성의 남문(진남루) 호젓한 성내 길을 걷는 노부부 건물지 앞에서 설명을 듣는 문화답사객들 성문 앞에서 다시 한 번 힘차게 뛰어보자는 다짐을 해본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사적 12호인 공주 공산성은 백제가 한성 위례성을버리고 금강을 북으로두고 고구려의 침략을 막을 계획으로공주로 천도하여 이곳 공산성을 근거로 다시 재기를 꿈꾸었다고 하는 역사의 땅이다..성의 남쪽에는 진남루를 두고 북쪽에는 공북루, 동으로는 영동루와 서로는 금서루를 두었으며, 암문도 있었다. 백제시대당시에는 웅진성(곰나루성)으로 부르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 공산성(곰나루 산성)으로 불렸으며, 조선 인조 때에는 쌍수산성으로 고쳐불렀다고 한다. 백제시대축조 당시에는 토성으로 되어있던 것을 조선조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가 공신으로써 제대로 된 대접을 해주지 않자 난을 일으킨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왔다가 간 뒤에 석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 멈추어 버린 철마 ▲ 철마를 보면서 옛추억을 되새겨보는 노부부 ▲ 저런 철마가 달릴 수 있을까 하며 무심히 지나치는 신세대.. ▲ 녹슬어서 더욱 추억을 되새기는 철마 ! ▲ 이방인의 눈에 비친 녹슬은 철마.! ▲ 수많은 염원들이 실현될 날은 언제나... ▲ 그래도 통일을 염원하며!!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한민족이 둘로 나뉘어져 더 이상 갈 수 없는 남한의 최북단 임진각에는 지금도 여전히 지난 동란의 상처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물이 있다. 살아서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전국을 누비던증기기관차였지만 지금은검붉게 녹이 슨 철마는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쟁의 현장을온 몸으로 맞이해야 했고, 그 결과몸둥이에는수 백 발의 총탄을 그대로 맞고 철로 위에 멈추고 말았다. 그리하여 얻은 상처는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과 이곳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그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보여줌 으로써 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절실함을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다. 두껍기만 해보이는 철갑도 총탄에터지고 깨어졌지만, 그 살아온 날들을 길이 후손에게 전쟁의잔혹함를 알리는교육의 재료가 되어 마치 표본실의 박제처럼 최북단의 전시물로 남아있는 것이다. 저 철마가 다시 또
▲ 영산회상도가 그려진 괘불을 걸고, 주변에는 휘장과 오색천을 걸어서 장소를 성역으로 장엄하였으며, 괘불의 아래에는 불단과 공양물을 진설하였다. ▲ 영산회상도 앞에서 영산재가 열리는 공간을 신성화 하기위한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영산재가 열리는 곳으로 영혼을 모시기 위하여 영혼을 부르는 의식을 거행한다. 모신 영가들을 영산재가열리는 장소로 이운하는 과정(가마 안에는 영가들이 있다고 봄) ▲ 영가를 모셔와 영산회상도에 모셔진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있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부모나 일가친지들의 영가를 함께 모시기도 한다. ▲ 스님들이 영산회상이 잘되도록신성화하기 위한 의식을 거행한다. | ▲ 스님들이 영산회상에서 설법을 듣고, 또 시간이 되어 영산회상의 신성공간에서 공양을 하는 것 자체도 의식의 하나이다. 불교에서는 보시를 하는 것도 공덕이지만 보시를 받아주는 것도 또한 공덕이 되는 것이다. ▲ 열지어 앉은 스님들이 자신이 먹을 식사량만큼씩의 음식공양을 자신의 바루에 받고 있다. ▲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기쁨에 넘쳐서 꽃을 들고 춤을 추는 모습 1 ▲ 영산회상도 앞에서 스님들이 설법을 듣고춤을추는모습 2
▲ 부로콜리 농장의 모습 ▲ 길고 긴 부로콜리 고랑 ▲ 곁가지를 따주는 농부들 ▲ 곁가지 따는 농부들 ▲ 작업하기 힘들다는 도시농부 ▲ 곁가지를 따기 전 부로콜리 곁가지가 많은 것은 5~6개씩도 생겨난다. 이런 곁가지를 따주어야만 한송이 탐스러운 부로콜리가 맺게된다. ▲ 곁가지를 딴 후 부로콜리 곁가지를 제거한 부로콜리 포기는 이제 크고 탐스러운 한송이를 맺게 될 것이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여름철이면푸른 꽃송이가 맺힌 부로콜리는 영양가 있고 맛도 좋은푸성귀로 인기가 높다. 도시인들은 그런 부로콜리가 어찌 생겼는지는 그저 탐스럽게 생긴 부로콜리 한송이로만 알지만, 그 부로콜리가 농장에서 심어지고 가꾸어지고 생산되기 까지의 수고를도시인들은 알지 못한다. 그저 밭에다 심어만 놓으면 아름답고 탐스럽고 토실토실한 부로콜리가 열리는 줄 알 뿐이다. 그래서 부로콜리 농장을 찾아가 하루 일손을 도우면서 어떻게 키워지는지를 알아보았다. 우리가뜨거운 물에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먹는부로콜리 송이는 부로콜리가 열매를 맺기 위하여 피우는 꽃송이로, 그 꽃송이가 활짝 피기 전에 꽃을 가득품은 송이가 벌어지기 직전에 싱싱한 푸른송이를 따서 시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기자] 이 쇠북과 쇠불걸이 공주 갑사에 소장되어 있던 것으로 절에서는 요사채 처마밑에 걸어두고각종 신호를 할 때 쳤다고 한다. 이를 테면 공양(식사)시간, 또는 공동 운력(노동), 회의알림 등 절간이 넓어서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부르기보다는 쇠북을 침으로써 절내 모든 곳에 있는 스님들이 알아듣고 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쇠북은 아래 받침이 해태상이며 가운데 북을 걸고 북의 주변에 청룡과 황룡이 서로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태로 만들었는데 그 섬세한 조각기법과 디자인 감각이 현대에 비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고 세련되어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불교미술실에 전시 중이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 군데군데 덧을 설치한 죽방렴 ▲ 죽방렴의 상세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기자] 옛날 부터 전해내려오는 고기잡이 방법이 있는데, 사진과 같은 방법의 어로법을 죽방렴(竹防簾)이라고 합니다. 대나무 어사리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방전으로 불렀습니다. 죽방렴(竹防簾)이란 대나무발을 짜서 썰물을 따라 내려오는 물고기를 대나무 발로 가두어서 잡는 오래된 어로방법입니다. 밀물을 따라서 올라왔다가 썰물을 따라 다시 바다로 가다가 넓은 입구쪽으로 잘못 들어가면 결국 저 좁은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다시는 바다로 가지 못하고 갖혀서 죽는 것이지요. 고기잡이는 3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지며, 5월에서 8월 사이에 멸치와 갈치를 비롯해 학꽁치장어도다리감성돔숭어 따위가 잡힙니다. 그 가운데멸치가 80% 이상인데, 이 죽방령에서 잡힌 멸치는 죽방멸치라하여 최상품으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넓고좋은 길인 줄 알고 가지만, 자칫 한발짝 잘못들여놓으면 저 신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느 길이 살 길이고 어느 길이 죽는 길인지 깊이 잘 생각하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저런 죽방렴(竹防簾)이 옛날에는 많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경남 남해 창선교 부근
▲ 용문사 일주문 ▲ 용문사 일주문 ▲ 용문사 승탑 ▲ 용문사 대웅전의 용머리 ▲ 용문사 위에서 본 전경 ▲ 용문사 지장전의 지장보살과 협시 그리고 지옥의 10대왕들 ▲ 용문사 대웅전 ▲ 용문사 대웅전 ▲ 야외 지장보살 상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기자] 대부분 경상도와 남해일원에는 관세음보살이 중생들과 가깝다. 그런데 귀하게도 지장보살과 중생이 가깝게 접하는 절이 남해 용문사다. 절에 가면 누구나 맨 먼저 찾는 보살이름이 관세음보살인데, 관세음보살은 현생의 중생들의 삶을 보살피는 보살이라면, 반면에 지장보살은 현생에서 삶을 다 살고난 후에저승으로 간 중생중에서도 지옥에 떨어져 현생의 죄과를 각종 지옥의 형벌로고통받는 중생들의 구제와 천도를 주관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그 모습이스님처럼 머리를 빡빡 민 보살로 6개의 고리가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는데, 이를 육환장이라고 한다. 그는자신의 성불을 뒤로 미루고 지옥의 중생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어떤 지옥도 마다 않고 찾아 나선 보살이라하니, 그 서원이 하도 넓고크다 하여 대원본존지장보살이라 한다. 한 많고 이세상을 아무리 잘 살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세상살이 살다보면 크고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