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포대와 주변의 소나무들 ▲ 경포대 누정에 오르는 입구 ▲ 경포대 현판 큰 글씨로 당당한 필체다. ▲ 넓은 루마루에 올라앉아 더위도 식히고 주변 경계를 나름대로 표현하는 시회를 열고 있다. ▲ 루에 올라 혼자만의 즐거움에 빠져도 본다. ▲ 경포대 주변의 낙낙장송들 ▲ 동쪽에 펼처진 경포대 호수 ▲ 루마루에서 바라본 경포주변 경계 ▲ 낮은 언덕위에 울창한 소나무 숲 안쪽에 경포대가 있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강릉하면 경포대가 생각난다. 바다가 접한 낮은 언덕위에 자리한강릉은동으로 바다가 넓고 파랗고, 주변에는 낮은 산과 들이 펼쳐진 강원도의 큰 고을이다. 강원도가 강원도라 이름이 붙은이유는 백두대간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인대관령의 동쪽에 바다를 면하여 강릉이 있고, 백두대간 대관령의 서쪽에는 깊숙한 내륙에원주가 있기 때문이니, 이 두 고을의 첫자를 따서 강원도가 아닌가? 그 강원도의 첫 고을은 누가 뭐래도 강릉이고, 강릉의 첫 째 경관은 경포대인 것이다. 경포대는 옛날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경계를 살펴보고 나름대로의 시상을 읊조렸다. 그래서 경포대의 천장에는 그들이 읇었던 시들을 나무판에
강릉 객사문 외부정면 객사문 내부 측면 강릉객사문 내부 측면 객사문 측면 박공면 객사문 기둥과 공포 객사문 공포 상세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강릉 객사문은 강릉이 신라시대부터 동해의 큰 고을로 동해안 각 고을을 다스리는 관영으로서 주 건물인 객사로 들어가는 문이다. 따라서 본래는 객사문 안에 수많은 전각들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지만, 지금은 고려말기에 지어진 객사문만 그대로 있고, 객사문 안쪽에 있는 수많은 전각들은 일제시대에 다 헐려나갔다. 이곳도예전에 학교를 지어 운영하다가 이후 학교를 이전하고 본래 있었던 객사의 주 건물들만 복원해 놓았다. 주건물은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지만 주건물보다 못한 객사문만 살아남은 까닭은이 건물이 야릇하게도 부속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영역이나 중요한 건물이 안쪽에 위치하지만, 중요한 건물에 다다르기 까지는 과정적인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경계짓는것은 문이다. 사찰의 경우 중요 법당에서 먼 곳에 사찰의 경계가 되는일주문이 있고, 일주문을 지나서 한참을 올라가면 천왕문이 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올라가야 금강문과 루문이 있는 등 법당에 이르는 길이간단치 않는데 이는 그 만큼 신성
▲ 성혈사 나한전 전경 ▲ 나한전 앞 석등 몸에 용이 휘감고 있다. ▲ 나한전의 주불로 석가모니불이 아닌 비로자나불이 모셔져있는 특이한 조성이다. ▲ 비로자나불과 나한들-1 ▲ 비로자나불과 나한들-2 ▲ 나한전 문에는 아름다운 꽃문양이 가득하다. ▲ 각종 꽃과 동물을 아로새겼다 ▲ 꽃문양이 다양하다. ▲ 솟을합장 문살 위에 꽃문양을 덧붙여 놓았다. ▲ 꽃문양 사이로 용과 여의주도 그렸다. [그린경제/ 얼레빗 = 최우성 기자] 경북 영주시 순흥면 덕흥리 소백산 곳에 있는 성혈사는 가파른 언덕을 한참 오르다 아늑한 곳에 파묻힌듯 자리하고 있다. 성혈사는 산비탈에 비좁은 대지를 마련한 까닭으로 정연한 사찰의 배치가 어려워서인지 비탈면의 여기 저기 경사를 이용해전각들을 배치해 놓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런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절은 특이하게도 영험있는 부처님이나 보살로 유명한 게 아니라, 나한의 영험을 앞세우는 절이다. 나한은부처와그 밑에보살 보다 아래 계급이다. 나한이라는 말을아라한의 줄임말로 후대에는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가장 큰 도를 이룬 사람들을 이르는 말로 전해졌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진리를 깨
▲ 양주시 광적면 화합로 81번지에 있는 스리랑카절'마하보디사' ▲ 스리랑카 근로자들을 위한 무료 의료봉사행사에 줄을 선 스리랑카 근로자들 ▲ 진료를 받고 있는 근로자들 ▲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는 스리랑카 스님과 근로자들(1층 법당) ▲ 스리랑카 스타일의 부처님상(2층법당) ▲ 각종 스리랑카인들이 즐겨 먹는음식들. 한국음식과는 달라도 맛은 있었다. ▲ 부처님전에 올렸던 음식들을 스님이 먼저 발우에 음식을 나눈다. ▲ 바루에 나눈 음식을 스리랑카 식으로 손으로 비벼서 스님들이 먼저먹는다(공양한다) ▲ 스님들이 다 드신 음식들은 밖으로 가져와 부페식으로신도들이 나누어 먹는다. ▲ 절의 공간이 비좁은 곳이라 계단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근로자들 오랫만에 고향음식 입맛이 딱 좋았다고 하며 맛있게 먹고 있다. ▲ '왓치싸라' 주지스님과 행사에 참여했던 봉사자들이 함께 ▲ 야외 모셔진 스리랑카부처님상 ▲ 우려낸 연꽃차를 찻잔에 따르는 자원봉사자들 ▲ 한국의 연꽃차를 우려내는 자원봉사자의 손 [그린경제/얼레빗=최 우성 기자] 한국에도 남방불교의 오랜 전통을 가진스리랑카 절이 있다. 스리랑카는 남방불교의 오랜 전통을 가진
▲ 청심대의 청심정 ▲ 깎아지른 절벽 청심대 ▲ 청심대에서 내려다 본 경치-1 ▲ 청심대에서 내려다 본 경치-2 ▲ 청심대에서 내려다 본 경치-3 ▲ 뒤에 보이는큰 바위가 청심대 ▲ 칭심대 아래있는 청심 사당 ▲ 청심사당 입구 행적을 기록한 비석 ▲ 청심사당 측면 ▲ 청심사당과 현판 [그린경제/얼레빗=최 우성 기자]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마평리에 오대천 천변에 있는 정자이다. '청심'은 조선조 초기 강릉의 기생 이름으로 '청심정'은 그 기생의 이름을 따서 붙인 정자이름이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 태종 때 강릉에서 강릉부사를 역임한 '박양수'는 강릉에 있을 때 관기인 ''청심''이와 무척 깊은 정이 들었다. 그런 '박양수'가 부사의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관직을 옮기게 되자 '청심'은 박부사에게이대로 헤어지기가 너무도 서운하니; 높은대관령 고개를 넘어 이곳 진부면까지 배웅하게 해달라고 애원하여 이곳에 이르렀다. 두사람은 경치 좋은 이곳 '청심대'에 이르러 석별의 정을 나누고 헤어지려는 순간 '청심'은 박부사를 향한 사모의 정을 영원히더럽힐 수 없다며 갑자기 바위벼랑에서 뛰어내려 죽고 말았다. 이후로
▲ 멀리 보이는 만과봉을 마주하며 할머니가 홀로 사는 작은 집이 한 채 있다. ▲ 만과봉이 보이는 풍경주변에는 대파를 많이 심었다 ▲ 만과봉에 올라본 답사객들 ▲ 만과봉 바로 앞에 사는 할머니의 친구인 백구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만과봉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간평리 월정동 상당히 넓은 평지의서쪽에 위치한 작은 언덕이다. 만과봉의 유래는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킨 뒤 왕위에 올랐으나, 문종의 비인 헌덕왕후(단종의 어머니)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조카를 내친 부도덕함을힐난하고세조를 향해 침을 뱉었는데침을 맞은곳에 종기가 나서 조선천지 용한 명의들의 처방에도 종기는 낫지 않아오랫동안피부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런 세조가 고질병이된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서 전국 각지를 다 찾아다녀 보았지만 낫지를 않았다. 그런데 옛부터 문수성지로 알려진평창 오대산 상원사를 찾아 기도하면 좋다는 말을 듣고 오대산 상원사를 찾게 되었다. 상원사에 들러 문수보살에 예를드린 뒤 시원한 계곡에서 목욕을 하게 되었는데, 지나가던 한동자가 나타나 세도의 등을 밀어주었고, 이후 피부병이 깨끗이 낫게 되었다. 그제서야 세조는 그 동자가 문수동자임을 알게 되었다.
▲ 임진각역 광장에 있는 낡은 비닐천막 ▲ 평화통일 촉진본부, 한국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본부치고는 너무도 협소하고 낡아서 안쓰럽기도 하다. ▲ 70이 넘은 노인이지만 우리민족의 통일이야 말로 가장 절실한 민족적 과제라는 열망을 가지고 자원봉사를 한다고 한다. 사진 오른쪽은 대표 장명하 씨 왼쪽은 할머니 자원봉사자 ▲ 평화통일촉진본부 대표 장명하 씨 ▲ 남과 북이 갈려 복구 되지 않은 임진강의 다리, 다리의 상판은 떨어져나간채 있다. ▲ 남과 북의 현실을 절실히 알게 하는 다리와 그 다리 아래는 낚시꾼들의 평화로운 낚시터가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 임진각 주변의 넘을 수 없는 철조망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리본이 가득하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임진각역 광장 한 모퉁이에 허름한 천막이 하나 있고 거기에는 누렇게 색이 바랜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넓은 광장에8년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비닐천막은 마치 공원의 뒷뜰에 있는 노숙자의 허름한 움집 같아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펼침막을 읽어보니 이것은 노숙자의 숙소가 아니었다. '평화통일 촉진 국민서명단' 비닐 천막 안 펼침막에 써놓은 글씨다. 눈에 잘
▲ 물이 있는 강가에 움집을 짓다 ▲ 박물관에 모형으로 지어진 움집 ▲ 뗀돌로 만든 주먹도끼 등 기구류 ▲ 큰 돌에서 떼어내 만든 기구들 ▲ 박물관 모습 ▲ 석장리 구석기박물관 정문 ▲ 구석기사람과 함께 선 현생인류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한국인이 살고 있는 한반도에는 유인원 시대로 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한국에는 구석기시대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이 일본보다 그 무엇이든 사람과 관계된문명이 일찍 시작되었다는 것을 일인학자들이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석기 유적들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그럴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결론부터 내리고 조사하였다.왜냐하면 한국이 일본보다 문명이 앞선 것이었다면 일본인들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할 우월적인 근거를말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석장리 구석기유적은구석기 가운데 후기에 속하는 유적에 속하지만, 1964년 공주 석장리에서 구석기에 살던 사람들의 움집터와 돌로 만든 연모와생활도구들 그리고 그들이 잡아먹었던 동물의 뼈가 대량으로 발굴되자 그 이후로는 그 어느 누구도 한국의 구석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사
▲ 정면에서 본 독립문. 독립문의 앞에는 돌기둥이 서있다. 그 돌기둥은 중국의 사신들이 올때 꼭 거쳐서 왔다고 한다. ▲ 북악산쪽으로 본 독립문 ▲ 옆에서 경사지게 본 독립문 ▲ 옆에서 경사지게 본 독립문 ▲ 독립문이라 새겨진 홍예돌문 ▲ 독립문 가운데 무지개 문 아래에 고가도로가 있고, 그 고가도로 밑에 서있는 돌기둥은 영은문의 기둥돌이다. ▲ 독립문 옆 잔디밭에는 비둘기들이 노닌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구한말 1895년 갑오개혁으로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개혁을 외쳤지만 이미 청나라와 일본의 눈치와 간섭으로 자주적인 개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학혁명은 백성이 스스로일어나 나라를 살리고자 하였으나 이미 스스로 개혁할 힘을 갖지 못한 조정은 자꾸만 외세의 간섭으로 자주성을 잃어만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미국과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인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은자주국가의 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1897년독립협회를 만들고, 이 협회를 중심으로 남의 나라에 의지하지 않고독립의 의지를 표현하고자 전국민이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세운 것이 화강석 홍예문이다. 이런 문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개선문을 모본으로 하여 세우게 되었다.
▲ 인왕문과 범종루로 쓰는 일음루(一音樓) ▲ 범종루와 천왕문 ▲ 범종루의 내부 ▲ 범종의 전체모습 ▲ 비파와 생황을 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상으로 나부끼는 옷과 구름을 보면 알 수 있다. ▲ 범종의 걸이로 용이 새겨져 있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기자] 성북구 정릉동에는 삼각산의 동남측면의 경사진 곳에 봉국사가 있다. 본래는 한양성 밖으로 삼각산의 동측면에 위치한 한적한 곳이었으나 서울의 팽창으로 이제는 한 복판이 되었다. 봉국사는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 친구인 무학대사가 절 짓기를 권유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후 세조때 중창되었으며 조선 조 기간 동안에는 숭유억불정책에 밀려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이마저 임오군란의 와중에 반란군의 방화로1882년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재건하지 못하고 허름한 판자집 같은 누추한 모습에그 이름만 유지하여 오다가 1977년 주지로 온 현근스님에 의하여 현재의 봉국사로 다시 태어났다. 가파른 경사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지은 일주문과 종루가 있는데, 이는 근세의 건축재료인철근콘크리트조 골조에 지붕만 한옥기와 지붕형태로 지었다. 종각의1층은 사람들의 통로로 활용하면서 2층에 종을 매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