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리암의 일출 ▲ 보리암의 해우소 ▲ 보리암의 풍광 ▲ 제석봉에서 본 보리암 ▲ 보리암 풍광 ▲ 보리암을 담는 사진작가 ▲ 보리암을 바라보며 ▲ 보리암의 전경 ▲ 보리암을 품은 금산 ▲ 보리암의 해수관세음보살 ▲ 해수관음을 향하여 ▲ 해수관세음보살과 주변 산세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기자] 아름다운 한려해상국립공원 남해 보리암을 다녀왔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이니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명소이다. 보리암이 있는 곳은 남해 금산인데, 그 금산은 비단으로 드리운 산이란 뜻이다. 그런데 금산으로 불리게 된유래가 각별하다. 본래 이곳에는 원효대사가 세운 보광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산이름은 보광산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 고려의 장군으로 왜구들을 물리치고 이곳 보리암에서 1백일 기도를 드린 적이 있는데 그 때 그가 기도하길 만약 훗날 임금이 된다면 산을 전부 비단으로 드리우겠다는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임금이 된 뒤에는 그 큰 산을 비단으로 드리울 방도가 없어 고민하다가, 누군가의 조언으로 산 이름을 바꾸어 금산(錦山)으로 바꾸어 부르게 하였고, 그 이후로 금산이 되었다고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 숙정문에서 한숨을 돌리고 백악봉을 향하여 다시 길을 나선다. 한양성의 북문 숙정문을 끼고 돌아 북쪽으로 오르면, 여기서부터는 신분확인을 한 뒤에야 오를 수 있다. 각자의 신분증을 제시한 뒤 번호명찰을 받아야만한다. ▲ 성벽 밖을 따라가다가 다시 성벽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구름다리를 넘어야 한다. 이곳은 성곽의 가장 험한 부분으로, 성안 남쪽으로는 경복궁과 한국의 심장부가 있는 곳이기에 삼엄한 경비와 외곽으로는 철책이 설치되어있는 것이다. 침투와 방어를 위하여 설치한 성곽의 밖으로 철책선까지 드리우고 보니 철옹성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그래서 아무나 무단으로 갈 수 없게 통제하고 있다. ▲ 무너진 성벽을 보강하여 쌓은 성벽과 여장 백악을 주봉으로 한 한양성의 가장 가파른 길이 바로 이곳이다. 처음에는 성을 쌓기도 힘들었을 것이나, 그 쌓았던 성벽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다시금 쌓았다. 처음 성벽과 다시 개보수한 성벽의 돌들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성을 쌓는 기법만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 가파른 성벽 가파른 성곽을 지나서 내려다본 성벽 ▲ 1.21사태 때 입은 상처, 총알맞은 소나무 196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우리 나라 불교미술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불보살로 알려진 보살상이 금동미륵보살 반가상사유상이다.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2점이 국보로지정되어있다. 2점 가운데가장 널리 알려진 보살상은 국보83호로지금은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으로 출타 중이시다. 지금 그곳 한국미술전에 출전하여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늘 소개하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이 작품은 국보78호다. 국보 83호와 국보 78호는 미륵보살이고 만든 재료도 동으로 만든 조각상에 금을 도금한 것이며, 앉아있는 자세와 크기도 비슷하나,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가 다르고, 몸에걸치고 있는옷이 차이가 난다. 그러나 둘 다 아름답고 세밀한 주조기법이 매우 우수하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과연 인간의 모습을 초탈한 듯 하여 보는 이를 감동시키는데는 차이가 없다. 미륵보살은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지금은 하늘나라 도솔천에서중생들을 보살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머나먼 훗날 바로 이곳 지상으로 나투시어 미륵불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천상에 있는 미륵보살의 지상에 구현한 모습이라 생각하고 음미하면서 감상하길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두물머리 양선자 아직 아침 햇살 비치기 전 어둠 저 편에서 부지런한 채비 채리는 자네 스며 들 것인가 함께 흘러 들 것인가 묻지 말게 다만 함께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향하여 가볼거나. 두물머리의해돋이를 보기 위해 오는 이들이 많다. 여명에서 해돋이 시간까지 카메라 렌즈를 맞추고 기다리는 시간은 강태공이 낚시대를 드리우고 무심한 강물의 흐름을 응시하는 기분과 견줄 수 있을까? 지난 4월, 진도 앞바다 물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물머리 해는 오늘도떠오른다. 무엇을 비추자는 것인지...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기자] ▲ 해체이전의 미륵사지 서탑 ▲ 미륵사지의 조감도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무왕이 선화공주와 사자사로 가는 도중 이곳 용화산 밑을 큰 연못을 지나다. 갑자기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행차를 멈추고미륵불에 예불을 드린 후선화공주가 미륵불을 모실 사찰을 짓도록무왕에게 건의하여 이곳에 절을 짓게되었다고 한다. 미륵사는 익산시 금마면 용화산(미륵산)아래 자리한 백제시대 사찰로 역사적으로 볼 때,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의 그 어느 절 보다도 그 권역이 넓고 컷던 절로 발굴조사 결과 판명되었다. 미륵사는 3원가람(중원, 동원, 서원)으로 절의 권역을 3구역으로 나누어 각 권역마다 금당과 탑으로 구성하고, 각각의 권역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근정전 처럼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 서 석탑의 해체후 모습(현재) ▲ 해체한 석탑의 돌들 ▲ 미륵사 주변에 흩어져 있던 동탑의 돌들 미륵사가 3개 권역으로 나누어진 연유는 불교의미륵신앙에 근거하는데 미륵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였으나 석가모니 부처님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미륵이 세상을 뜨기 전에 미륵에게 수기하기를 미륵은 다음생애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왕궁리5츧탑의 원경-1 원경-2 원경-3 왕궁리5층석탑 근경-1 근경-2 1965년 해체당시 사진 1965년 해체당시 사진 1965년 해체당시 기단하부 사리장엄구 위치 발굴 결과 나온 사리장엄구와 금박에 새긴 경전 전북 익산에는 국보로 지정된 석탑이 2기 서있다. 하나는 세계 최대의 단일 가람이었던 미륵사지 석탑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왕궁리5층석탑이다. 왕궁리5층석탑은 그 건립 연대를 정확히 알려주는 근거가 미약하여 여러 설이 있다, 더러는 백제말기에 왕궁이었던 이곳에 건립된 탑이라거니, 신라말 고려초기에 건립된 탑이라거니 논란거리이지만, 그 형식상으로 판단해 보면 왕궁리5층탑은 목조탑과 비슷한 옥개석으로 백제탑의 양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는 백제말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 무왕이 왕궁리에 도읍을 이전하기 위해 궁궐과 전각들을 건립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궁궐에다 바로 절을 건립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도 든다. 그래서 1965년 어렵게 해체복원을 해보았으나, 탑의 하단부에서 발굴된 사리장엄구들은 있었으나 절의 건립이나 탑의 건립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고, 오직 사리
▲ 능의 정면 아래에서 본 정릉과 정자각 ▲ 정릉의 홍살문 ▲ 정자각에서 본 수복방과 비각 ▲ 정자각에서 본 정릉 ▲ 능 아래에서 본 모습 ▲ 능 앞의 석물들과 능을 감싸고 있는 곡장 ▲ 문인석과 석마 ▲ 능상의 측면에서 본 모습 ▲ 정릉의 정면모습 ▲ 능의 정면(왕릉에는 아랫부분에 병풍처럼 둘러있는 병풍석이 있으나, 정릉에는 없다)본래 정동에 있을 때에는 이성계가 무척이나 호화롭게 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분명히 있었을 것이나 태종이 이곳으로 옮기면서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 능 앞의 석등(그 형상이 독특하다) ▲ 능 주변의 석호(돌로 만든 호랑이) ▲ 능 주변의 석양(돌로 만든 양) ▲ 능앞의 석물들(혼유석, 석등 망주석, 문인석) ▲ 신덕왕후 강씨를 호위하는 문인석과 석마(말)왕릉에 있는 무인석은 보이지 않는다. ▲ 능상에서 본 정자각과 시내 ▲ 정자각의 측면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정릉은 조선태조 이성계의 2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강윤성은 고려말 권문세가였기에 이성계가 정계에 진출하여 역량을 넓혀 조선을 개국하는데 큰 역할을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한양도성 톺아보기 3에서는 본래 자리를 벗어나서 세워진 혜화문을 둘러보고 성곽을 따라 올라가보는 코스이다. 혜화문 인근 성벽. 성벽은 있지만 여장은 다 사라지고 없다. 혜화문을 돌아 올라가면 성안팎에 크고작은 집들이 몰려있다.이들은한국전쟁 이후 전국에서 몰려든 난민들로 살집을 마련한다고성곽돌을 헐어다 집의 기초와 기단으로 썼다. 그래도 남아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니오히려 신기할 따름이다.남아있는 성곽을 살펴보자. 한국의 성곽은 아래에 든든한 지반석을 수평지게 가로로 깔고 그 위에 지상 노출된 부분부터 가능한 큰 돌들을 아래에 쌓고 차츰 차츰 적은 돌들로 쌓아 올라간다. 그 양식은 쌓은 시대별로 차이가 있으나, 성벽의 돌들을 마름모꼴로 쌓지 않고 장방형의 돌들을 수평지게 쌓는 다는 것이 고구려시기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성곽의 변치않는 철칙이었다. 과거에는 한양도성의 밖이어서 한적한 야산이었던 구릉지들이 서민주거단지가 되었다. 도성의 안쪽으로 산책로가 마련되었지만, 본래는 병사들이 성안쪽을 순찰하던 순라길이었다. 이제는 그 길을 따라 탐방객들이 산책을 한다. 가파른 성벽의 바로 앞까지 비탈진 언덕위에도 사
보성 댓재 녹차밭-1 보성 댓재 녹차밭-2 녹차 잎을 따는 아낙 - 1 녹차 잎을 따는 아낙-2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신록의 계절 5월이 되었다. 세월호의 참사로 온 세상이 침울과 분노로 들끓고 있지만, 계절의 변화만은 어김없이 변하고 있다. 따스한 햇볕을 받아 푸른 녹차의 여린 잎이 새움을 티우고, 여린 녹차잎을 따서 좋은 녹차를 만들려는 녹차농가의 일손은 바쁘다. 한국에 전통차가 들어온 것은 멀리 김수로왕비 허황옥이 서기 42년 무렵에 인도의 차를 들여왔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통일신라 흥덕왕때(82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차씨를 받아온 때를 그 기원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기록에는 없는 또 다른차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국에는 자생차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기원이야 어떻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까지는 차를 무척이나 아끼고 애용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유학인 성리학이 통치이념이 된 뒤로는 전통차는 차츰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조선 말에는 완전히 그 명맥이 끊기기까지 하였다. 그런 전통차가 되살아난 것은 1800년대 다산 정약용이 해남으로 귀양을 가면서 차를 가까이 하고 사찰에서 그 명맥이
갈 건너편에서 본 혜화문 제 자리가 아닌 조금 옮겨진 곳에 1992년 복원된 혜화문 혜화문 편액이 보이는 정면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한뒤 7년 한양도성을 축성하면서 동서남북으로 4대문을 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4개의 소문을 세웠다. 그래서동문과 북문사이에 세워진문이 바로 동소문이고 그 본래 이름은 홍화문이었다. 그런데 1483년 성종이 창경궁을 건립하고 궁의 정문을 홍화문으로 하자 홍화문이 2개가 있어 많은 혼란이 있었다. 그리하여1611년 중종때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으로 그대로 두고,동소문인 홍화문은 혜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한양에서 북쪽지방으로 나가려면혜화문을 통해야 동두천 의정부 양주로 나갈 수 있었다. 혜화문의건축형식은 성벽의 높이에 맞추어 육축을 쌓고 그위에 누각형의 목조로 집을 지었는데. 우리네 문루는 중국과 달랐다. 중국의 상징인 자금성을 보면 우리 궁전인 경복궁의 근정전처럼 지붕이 팔작지붕인 것이 형태상 바로 알 수 있는 차이점이다. 그런데 우리네 건축은 궁궐의 정문이나 성문은 팔작집이 아니라 대부분우진각지붕을 하고 궁궐의 정전은 팔작지붕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