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야산 관촉사 일주문 현판 ▲ 미륵불을 찾아서 ▲ 계단을 오르고 올라가면 ▲ 계단위에 펼쳐진 대광명전 ▲ 미륵불을 조성하여 미륵정토가 되길 기원하였다(고려초 고려광종 때에 조성) ▲ 무표정한 듯 하면서도 친근감이 도는 미륵불은 손에 연꽃 한송이를 들고 있다. ▲ 꽃을 든 남자!!저 꽃을 든 이유는 뭘까요? ▲ 4각의 모자!미륵불은 대부분 4각의 모자를 쓰고 있다.그것이 미륵불임을 나타내는 징표인양! ▲ 미륵불을 그리며... ▲ 미륵불과 미륵전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왕실불교의 나라 신라가 고려로 이전되면서 불교는 그 성격도 변하였다.불교의 이상이 성불이라 하지만 성불이란 쉬운 것이 아니기에 성불하기 전에는 누구나윤회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생은 어디에 태어나야 할 것인가? 아미타불신앙은 세상살이를 마치고 나서 윤회를 하게 될 때에 아미타불이 계신다는 극락에 태어나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또 한편 미륵신앙에 따르면 현세에서복덕을 많이 지어서56억 7천만년 후에부처로 온다는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에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다. 그것이 곧 미륵 상생신앙이다. 그런데 세상이 하도 살기 힘들다보니미륵 상생신앙이
▲ 능사의 원경 ▲ 금당과 5층목탑 ▲ 금당과 5층목탑 ▲ 5층목탑의 상부 ▲ 백제의 불상(3존불) [그린경제=최우성 기자]1350년 전에 사라진 백제의 사찰 지금은 무척 생소해 보이지만 당시 백제의 절은 이러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본다고 합니다. 특히 목탑을 보면 지금 일본에 많이 있는 목탑과 같은 구조입니다. 금당의 부처님은 서산마애삼존불과 일본에 전해진 백제의 불상을 본으로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본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 문화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 백제 사비궁 ▲ 사비궁의 정문 정양문 ▲ 정전인 천정전 ▲ 건물의 구조(하앙식)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1350년 전에 사라진 백제의 모습을 재현하였습니다. 역사책에만 나오던 백제궁의 모습을 재현하면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 모습만으로는 조선시대의 궁궐이 아니라 일본의 궁궐모습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백제의 모습이라니... 조금은 어리둥절하기도 하지만 백제인들이 대부분의 문물을 전해준 일본이기에 그리된 것이라고 합니다.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본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 문화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 진흙뻘의 질주-1 ▲ 진흙뻘의 질주-2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서울 경마공원의 질주하는 말들 !! 마상의 기수들은 말들 보다 더 힘을 내는 듯 합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본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 문화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 다정한 기린가족 ▲ 더우니까 살 것 같다.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서울대공원의 기린들 아프리가 열대 사바나 같은 여름 !! 더운 여름이정말 좋아요 !!!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본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 문화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 낙산사7층석탑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 초기작품이다. 유교 성리학의 국가이념에 밀려 불교가 탄압받기 시작한 조선시대이지만 그래도 왕의 성향에 따라서는 가끔씩 불사가 이루어졌다. 낙산사7층석탑은 조선전기 세조대에 건립된 석탑으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달한 뒤 몸에 피부병이 걸려시달리다가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를 왔다가 관세음보살의 영험으로 유명한 이곳 낙산사에 들러 시주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본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 문화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 있는 모성정(慕聖亭) 1625년 학자이며 효자였던 이장원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우모정을 후손들이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고쳤다고한다. 이장원의 학덕과 효심을 높이사 그를 성인으로 높이고자 함이 이름에 묻어난다. 주변바위에는 많은 글들이 새겨져 있고, 정자내 현판에는 정자중수에 십시일반한 사람들의 덕도 함께 새겨져 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본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 문화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 방초정에서 본 마을 정원 ▲ 방초정의 원경 ▲ 방초정의 건축가구구성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김천시 구성면에 있는 방초정 마을 앞에 건립된 누각형의 정자로 정자에서 마을 앞을 훤히 내다볼 수 있어 외지인의 출입을 자연스럽게 통제할 수 있으며 마을 앞의 논밭도쉽게 관리할 수 있다. 정자의 2층에는 온돌방도 하나 있어 겨울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게 특이하다. 정자의 방문을 사방으로 열어제끼면 3칸 정자는 온전히 하나가 된다. 또 기둥과 기둥 사이로 보는 풍광은 마치 사진액자를 거쳐서 보는 듯한 멋도 느낀다. 정자에 올라 주변경계를 노래한 시인묵객들의 시들이 가득하여 그 연륜을 느끼게 한다. 정자 앞에는 연못과 정자나무가 있어 이 또한 운치가 좋다 1625년 인조때 건립되어 여러차례 중수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 장안성 동문 ▲ 성곽위의 도로와 누각들 ▲ 성밖의 해자와 풍경 ▲ 성문지붕의 잡상 ▲ 성문의 축벽 ▲ 성곽 밖의 풍경 ▲ 성문 출입구에서 본 성밖풍경 [그림경제=최우성 기자] 당나라 시대의 장안성 성곽일주. 장안성 성곽은 직사각형의 평면으로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았다. 성의동서남북에는 같은 규모의 성문이 정문으로 있다. 사방 성문 위에는 3층의 누각건축물이 서있는데 그 크기는 북경의 천안문보다 더 크고 육중한 건물이다. 목조건축물의 규모는 보통전면 기둥이 몇개가 서있는가에 따라 칸의 수로 말하는데북경의 천안문은 전면이 9칸인데견주어 장안성의 전면은 11칸이나 되었다.목조건축의 한칸은 2개의 기둥이 이루는 공간을 말하며 기둥이 12개가 병렬로 서있을 때에는 11칸이 된다. 참고로 서울의 숭례문은 5칸이니 그 크기로 보면 장안성의 성문은 서울성곽의 숭례문과는견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였다. 성벽의 높이는 약 10m이고 성의 둘레는 14.7m정도이며 성위에는 폭15m정도의 도로가 닦여있어서 말을 타고 달리거나 마차를 타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걸어서 한 바뀌 돌려면 하루 온종일 걸어야 할 듯하였다. 성밖으로는 해자를 파고 물을 끌어들
▲ 진시황릉의 병마용들 ▲ 보병부대 병마용 ▲ 열을 지어 서 있는 병마용 ▲ 병마용 말들 ▲ 부서진 병마용을 발굴하여 다시 맞춤한 병마용들 ▲ 재현환 병마용 ▲ 말과 마차를 재현한 모습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2200년 전 진시황이 죽은 뒤 진시황릉의 주변에 조성된 황토갱도에 묻힌 경마용들을 발굴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완성조립한 방마용 박물관의 모습.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들이 중국의 역사에서는 그저 보통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느껴본다. 진시황릉의 위치는 미궁 속에 묻혀있었는데 현재 진시황릉으로 확정되기까지는 많은 곡절이 있었다. 1974년 한 농부가 밭을 갈던 중 병마용의 머리부분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당국에 신고하고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다. 현재까지 발굴되지 못한 갱도가 너무도 넓고 커서 진시황릉의 경계는 아직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상상으로 그려보는 진시황릉은 과연 얼마쯤일까? 진시황릉을 한바퀴 돌아주는 관람차를 타고 돌아보았는데족히 1시간은 걸린 듯하다. 당시 백성들의 고혈인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이 무덤이훗날 전 세계인의 관광자원이 될 줄이야 진시황 자신도 미처 생각 못했을 것이다.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