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4월 9일 문화재청은 수도 성곽인 한양도성, 대피성인 북한산성과 함께 조선후기 도성 방어체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화유산인 「탕춘대성」을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으로 지정했습니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고 있는 「탕춘대성」은 3개의 성이 유기적인 하나의 도성 방어체계를 구축하여 운용될 수 있도록 쌓은 독창적인 방어성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 도성 방어체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 41년(1715년) 축조를 시작하여 영조 30년(1754년)에 완성하였지요. 「탕춘대성」은 평시에는 성안에 설치된 군량 보관창고인 평창(平倉)을 지키고, 전시에는 평창(平倉)에 비축했던 군량을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에 보급하는 기지 역할을 하였다. 한양도성을 지키기 어려워지면 조정과 도성민이 북한산성으로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조선후기 3개의 성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방식의 도성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특히, 성곽의 잔존상태가 좋으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인접한 성을 연결하면서 군량 보급과 지휘를 하는 배후 성으로 한양도성, 북한산성과 함께 조선후기 도성 방어체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1817 이후)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풍속화가로 그의 그림으로는 <미인도>, <단오도>, <월하정인도> 등이 유명합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신윤복의 그림 가운데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아기 업은 여인〉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10년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 현 국립중앙박물관)이 일본인 곤도(近藤佐五郞)로부터 산 화첩 속에 포함되어 있지요. 이 화첩에는 김두량, 김득신, 김후신, 이인문, 변상벽, 그리고 강세황 같은 쟁쟁한 화원들의 그림도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오른쪽에는 “蕙園申可權字德如(혜원신가권자덕여)”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이에 따라 신윤복의 본명이 신가권이며, 자(어른이 되어 다시 붙인 이름)는 ‘덕여(德如)’임이 밝혀졌지요. 따라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윤복은 그의 필명일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유명한 〈미인도〉 그림에도 ‘신가권’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아기를 업은 여인>은 그림이 화면 왼쪽에 자리 잡았고, 오른쪽에는 그림에 대한 감상을 적은 부설거사(扶辥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1754) 윤4월 19일 자에는 “경기 지방에 호환(虎患)이 심하여 한 달 안에 먹혀 죽은 자가 1백 20여 인이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호랑이로 인한 인명 피해 곧 호환(虎患)이 컸기에 호환(虎患)에 대비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야 했지요. 그렇게 호랑이를 잡으려고 별도로 설치한 군대가 ‘착호갑사(捉虎甲士)’입니다. 착호갑사는 ‘호랑이 포획 담당 직업군인’인 셈이지요. 이 착호갑사는 1421년(세종 3)에 40명으로 처음 제도화되었고 그 뒤 《경국대전(조선의 법전)》 병전(兵典)에 보면 중앙 군사조직체계의 하나인 의흥위(義興衞)의 갑사 1,800명 가운데 착호갑사가 440명일 정도로 늘어납니다. 이들은 5교대로 88명이 여섯 달씩 복무했는데 착호갑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은 까다로웠습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180보 거리에서 활을 쏘아 명중시키기, 말 타고 활이나 창 쓰기, 일정 시간에 멀리 달리는 능력시험에서 250 걸음 이상 가기, 양손에 각각 50근씩 들고 100 걸음 이상 가는 시험 가운데 1가지에 합격해야만 했지요. 또 호랑이를 잡은 일반 백성은 시험을 면제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꼽히는 세종임금의 627돌 탄신일입니다. 세종임금은 한문에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백성을 위해 기득권을 내려놓고 <훈민정음>을 창제해 우리 겨레가 뛰어난 문화를 영위할 수 있도록 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세종임금이 태어난 준수방에는 그 흔한 기념관 하나도 없고, 길가에 초라하게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작은 표지석 하나만이 달랑 서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세종임금 탄신일에는 늘 문화재청이 여주 세종대왕 무덤(영릉)에서 숭모제를 열고 있어서 저는 이때만 되면 그에 대해 탄식을 해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5월 14~15일 경복궁과 세종문화회관에서 ‘세종 이도(李祹) 탄신 하례연’을 연다고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따라서 이를 취재하기 위해 14일 1시 30분 무렵 행사를 한다는 경복궁 수정전으로 갔지만, 아뿔싸 화요일은 경복궁이 쉬는 날이어서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문은 꽁꽁 닫혀있었습니다. 이에 경복궁을 한 바퀴 돌아 이날 쉬지 않는 고궁박물관으로도 들어가 봤지만, 그쪽도 닫혀있었고, 혹시나 해서 굳게 닫혀있다가 많은 이들의 청원에 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국가문화유산 가운데는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이 있습니다. 이 유물 이름은 반가부좌의 준말인 '반가(半跏)'와 생각하는 불상이라는 뜻의 '사유상(思惟像)'을 합친 말로, 의자 위에 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올려놓고,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손가락을 뺨에 댄 모습의 미륵보살상입니다. ‘미륵(’彌勒)이란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6억 칠천만 년이 지나면 세상에 와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한다.‘라는 미래의 부처지요. 이 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상징한다고 하여 박물관 2층 기증관 입구에 440㎡ 규모의 전용 공간을 조성해 놓은 두 점(옛 지정 번호 제78호와 제83호)과 삼성미술관 리움의 한 점(전 지정 번호 제118호)이 있습니다. 이 국내 미륵보살상들의 얼굴은 대부분 네모꼴에 가까운 풍만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일본 교토 광륭사(고류지)에도 한국에서 건너갔다는 일본 국보 제1호 미륵보살반가상이 있습니다. 한국 관광객들은 한국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의 옛 지정번호 국보 제83호와 똑 닮았다고들 말하는 이 광륭사 미륵상을 보러 많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4월 23일 일제강점기에 철거됐던 수원 화성행궁이 119년 만에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됐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 융릉으로 이장하고, 1789년(정조 13년) 화성행궁을 건립했는데 평상시에는 관청으로 쓰다가 임금이 수원에 행차할 때는 임금과 수행 관원들이 머무는 궁실(宮室)로 이용했습니다. 수원화성 축조 과정이 기록된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화성행궁은 약 600칸 규모로 정궁(正宮) 형태인데 조선시대 지방에 건립된 행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입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옮긴 1789년부터 모두 13차례 화성행궁에 머물렀고, 1795년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행궁에서 거행했습니다. 그렇게 19세기 말까지 궁실이자 관청으로 제 기능을 했던 화성행궁은 1905년 우화관에 수원공립소학교가 들어섰고, 1911년 봉수당은 자혜의원으로, 낙남헌은 수원군청으로, 북군영은 경찰서로 사용되면서 파괴되었지요. 더 나아가 1923년 일제는 화성행궁 일원을 허물고, 경기도립병원을 신축하면서 화성행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던 화성행궁은 수원시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17년 6월 프랑스 경매회사 타장의 경매에 대나무쪽에 글을 새긴 조선시대 죽책(竹冊) 한 점이 나왔습니다. 프랑스인 소장자가 제시한 경매 시작 가격은 1,000유로(약 132만 원). 소장자도, 경매회사도 별 값어치가 없는 고미술품이나 생활용품 정도로 생각했다는 얘기입니다. 당시 소장자는 죽책에 “조선시대 혼례 때 사용한 물건”이라는 설명을 달았다고 하지요. 하지만,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죽책을 판독해 본 결과 1866년 병인양요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던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곧 조선왕실 유물이었습니다. 재단은 문화재청과 협의해 “소중한 왕실 문화재이니, 한국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라고 프랑스 정부에 경매 중지를 요청했고 프랑스 정부가 다행히 경매 중지를 지시했지요. 재단은 소장자와 값을 협의해 죽책을 16만 유로(약 2억 1,000여만 원)로 조정했으며, 경매 수수료와 운송비 등을 합해 약 2억 5,000만 원에 죽책을 들여왔고 이듬해인 2018년 서울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됐는데 6면짜리로, 6면을 모두 펼친 너비는 102㎝이고 높이는 25㎝입니다. 이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병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가서 자세히 관찰하고 조사할 때 각기 제 주장대로 고집하여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좋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 심히 우려하고 있노라.” 위는 《세종실록》 12년 7월 5일 치 기록입니다. 세종임금은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백성이 싫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도자의 생각이 만능이 아닐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임금이라도 맘대로 정책을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벼슬아치들이 공정성을 잃어 양반과 부자만 좋게 하고 가난한 백성을 괴롭히고 있음도 꿰뚫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새종은 들판을 지나갈 때면 일산(日傘, 양산)과 부채를 쓰지 않았으며 말을 타고 가다가 농부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걸어갔음은 물론 농사가 잘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세종은 공법이라는 세제개혁을 시행하기에 앞서 직접 경기도 장단현 들판을 답사하기도 할 정도로 백성사랑에 철저했던 세종임금이지요. 이달 15일은 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790년(정조 14년)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인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소속 장교이자 무인인 백동수 등이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하여 펴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있습니다. 이 책은 《무예통지》ㆍ《무예도보》ㆍ《무예보》라고도 하며, 임금의 명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여 《어제무예도보통지(御製武藝圖譜通志)》 또는 《어정무예도보통지(御定武藝圖譜通志)》라고도 불립니다. 목판본으로 4권 4책의 한문본에 1권의 언해본(한글 해석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서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정조의 뜻이 실려있지요. 임진왜란 뒤 선조 때 곤봉(棍棒)ㆍ장창(長槍) 등 여섯 가지 기예를 다룬 《무예제보》가 편찬되었으며, 영조 때에는 여기에 죽장창(竹長槍)ㆍ예도(銳刀) 등 12기를 더하여 《무예신보》를 펴냈고, 다시 마상(馬上)ㆍ격구(擊球) 등 6기를 더하여 도합 24기로 된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것입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군의 교육용 교본이었던 만큼 사본들이 역사적 사료치고는 온전하게 많이 남아있는데 2017년 북한이 먼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렸습니다. 남한에서는 2019년에 《전통군영무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15년 극장가에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한 신재효와 최초의 여성 소리꾼 진채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이종필 감독의 <도리화가>가 상영되었습니다. 지금이야 많은 여성 소리꾼을 만날 수 있지만 그때는 여성 소리꾼이란 상상할 수가 없었지요. 신재효는 어렵게 진채선을 제자로 받아들여 으뜸 명창으로 키웠는데 진채선은 고종 때 경회루 낙성연에서 뛰어난 소리를 보여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전라북도 고창군 모양성 앞에는 신재효(申在孝, 1812~1884)를 기리기 위한 동리국악당(桐里國樂堂)이 세워져 있습니다.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 마당 곧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변강쇠타령〉의 체계를 잡아 작품화했기에 이 여섯 마당은 온전히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신재효는 자신의 집을 ‘동리정사(桐里精舍)’라고 이름을 붙이고 소리청을 만들었으며 이 소리청에 소리꾼들을 불러들여 많은 소리꾼을 키워냈고, 소리꾼들이 먹고 자는 일, 때로는 그들 가정의 생활비까지도 대주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또 유달리 인정이 많아 가난한 사람을 잘 도와주었고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