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에는 “오츄겐(お中元, 御中元)”이라고 해서 평소 신세진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무더위를 잘 이겨내라는 뜻의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이 있다. 오츄겐 시기는 도쿄를 비롯한 관동지방은 7월 초에서 중순까지이고 오사카 지역 등의 관서지방은 1달 늦은 8월 초부터 중순에 선물을 주고받지만 요즈음은 지역과 상관없이 대충 7월 중순쯤 주고받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오츄겐은 고대 중국에서 전해온 산겐(三元)에서 유래한다. 산겐이란 상원(上元, 1월 15일), 중원(中元, 7월 15일), 하원(下元, 10월 15일)을 말하며 오츄겐은 이 가운데 중원(中元)으로 이것은 고대 일본의 어령제(御霊祭)와 불교에서 유래한 우란분재(7월 15일)가 겹친 것으로 여름에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오츄겐 때 주고받는 선물은 어떤 것일까? 한 조사에 따르면 1위는 프레미엄 맥주, 상품권, 와인, 양과자로 조사되었지만 사실은 오츄겐의 선물로는 술, 과일, 햄, 소면, 과자, 아이스크림 등등 다양하다. 온라인쇼핑몰 다이마루(大丸)・마츠자카야(松坂屋) 등에서는 대대적인 오츄겐 선물 특집을 만들어 놓고 일본 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키나와전(沖縄戦) 전몰자 유골의 DNA 감정에 대해서 후생성은 빠르면 7월부터 민간인 유족도 적용하여 신청을 받는다. 지금까지 사실상 전몰자 DNA는 군인, 군속 유족만 해당되었다. 민간인 유족 감정 참가에 대해서는 오키나와전 유골수습 봉사단인 '가마후야'가 7월에 후생성에 집단 신청할 예정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후생성은 신청방법 등을 각 현(県)과 조정을 추진 중에 있다." 이는 오키나와에 있는 류큐신보(琉球新報)가 6월 20일 보도한 기사다. 지금 한국에서는 저가항공사의 오키나와 취항으로 여행상품이 많이 생겨 손쉽게 찾아가는 관광지가 되었지만 이곳은 태평양전쟁 때 군국주의 광풍의 회오리바람이 거셌던 곳이다. 특히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이 이곳 오키나와 전투에서 1만여 명 희생되었지만 정확한 조사는 아직도 이뤄지고 있지 않다. 1945년 4월부터 3달 동안 이어진 오키나와전투에서 미군 약 1만 5천명, 일본군 6만 5000여명을 비롯하여 일본쪽 민간인 사망자 20만여 명이 나왔는데 이렇게 민간인 희생자가 컸던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이른바 죽더라도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는 ‘옥쇄작전’으로 희생된 이들이 더욱 많았던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예순 살에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하여 82살에 게임 앱을 개발한 할머니, 이른바 컴퓨터 할머니로 알려진 일본인 와카미야 마사코(若宮正子, 82살) 씨는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일약 스타가 되어가고 있다. 일본에는 아흔 살에 마라톤 현역이 있는가하면 아흔 살 시인이 있고 여든 살에 컴퓨터 게임 앱을 만드는 등 고령의 파워가 만만치 않다. 히나단이라는 인형놀이를 게임 앱으로 개발한 와카미야 마사코 씨는 평생 다니던 은행을 퇴직하고 늙은 노모 간병을 위해 집안에 들어앉았다. 어느 날 집에 있으면서도 컴퓨터가 있으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컴퓨터 한 대를 산 것이 컴퓨터와의 인연이다. 와카야미야 씨가 예순 살 먹던 해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일이다. 그는 난생 처음 접한 컴퓨터를 거의 독학으로 익혀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타자치는 법부터 익혀 나간 그는 컴퓨터로 그림 그리는 법도 익혔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정도 컴퓨터에 익숙해지자 노인층을 대상으로 하는 ‘멜로우 클럽’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인터넷과 IT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컴퓨터의 매력에 빠져든 와카미야 씨는 독자적인 아이디어로 컴퓨터 활용법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 기상청은 6일, 큐슈 북부와 남부가 장마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이는 평년보다 약 6일 늦은 것으로 일본의 장마는 우리나라 보다 대개 1달 이상 빨리 찾아온다. 츠유(梅雨)라고 부르는 일본의 장마 소식과 함께 실린 사진은 보랏빛 ‘수국꽃’이다. ‘아지사이’라고 부르는 수국꽃은 장마=수국으로 인식될 만큼 장마철 일본의 정원을 수놓는 꽃 가운데 하나다. 서일본신문(西日本新聞) 6월 6일치에는 수국꽃으로 아름다운 후쿠오카 하코자키신사(筥崎宮, 福岡県 福岡市 東区箱崎 소재)의 활짝 핀 수국꽃을 소개하고 있다. 1991년 신사 안에 정원(신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신원(神苑)’이라 한다)을 조성할 당시에 심어둔 수국꽃은 이제 하코자키신사의 명물이 될 만큼 자라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코자키신사는 서기 921년에 세운 신사로 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지난해 8월 26일부터 9월4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한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이라는 특별전에 이 신사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코자키신사의 이름이 나오는 신안해저선은 1323년 원나라 저장성 경원(慶元, 현 닝보 '寧波')항에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 땡볕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결코 화내지 아니하며 늘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깨달아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 숲속 그늘에 지붕을 새로 이은 작은 오두막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돌봐주고 서쪽에 고단한 어머니가 계시면 가서 그 볏단을 져주고 남쪽에 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해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부질없는 짓이니 그만 두라고 말리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위 닥친 여름에는 어찌할 바 몰라 허둥거리고 모든 사람에게 바보 소리를 들으며 칭찬도 듣지 않지만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이는 일본의 국민작가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1896년 8월 27일 ~ 1933년 9월 21일)가 지은 유명한 ‘비에도 지지 않고(雨ニモマケズ)’ 시다. 고향 이와테에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겐지는 도쿄로의 진출을 꿈꾸다가 25살 때(1921년) 대도시 도쿄로 무작정 상경을 한다. 먹고 잘 곳도 없는데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상님들의 이름자만이라도 새겨진 족보들을 고국으로 보내드리는 것이 후손된 도리를 다하는 것 같아 기증하게 되었다. 일본에는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한국과 관련된 유물들을 소장하다가 후대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지난 4월 21일(금) 재일동포 정아미(鄭雅美, 일본이름 마쓰무라마사미(松村雅美), 여 51살)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 등 고문서 7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며 남긴 말이다. 정아미 씨가 기증한 책은 《영산신씨파보(靈山辛氏派譜)》(2책, 1904년, 목활자본)와 《영산신씨세계(靈山辛氏世系)》(2책, 필사본), 《영산신씨가승(靈山辛氏家乘)》(1책, 필사본), 《개국정사좌명공신회맹문(開國定社佐命功臣會盟文)》(1책, 1791년, 목판본), 《종부지증(種付之證)》(1점, 1918년) 등 7점이다. 기증 자료는 기증자의 친정어머니 신애자(辛愛子)씨가 보관해오던 것으로 어머니는 경남 하동에서 살다 한국전쟁(1950년) 당시 아버지 신재호(辛在昊)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가지고 간 자료들이다. 두 분은 모두 고인이다. 《영산신씨파보》는 우리나라 어느 기관에서도 소장하고 있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몇 해 전 필자는 일제국주의가 저지른 남경대학살(1937~1938년, 중일전쟁 중에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 현장을 답사한 적이 있다. 인류의 비극인 남경대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인 아이리스 장(Iris Chang, 張純如)의 《남경의 강간, The Rape of Nanking》에 자세히 나와 있어 사족을 달 필요는 없지만 이 한 권의 책이 잔혹하기 짝이 없는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크나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남경대학살 현장에서 유난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진 한 장이 있다. 그것은 목이 잘린 중국인의 머리를 나무 가지 위에 올려놓고 입에는 담배꽁초를 물려 놓은 모습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진이 《일본잔혹사진사(日本殘酷寫眞史), 2006, 도쿄 사쿠힌샤》에 실려 있어 섬뜩했다. 《일본잔혹사진사(日本殘酷寫眞史)》란 다름 아닌 시모카와 코우시(下川 耿史, 1942~) 씨가 쓴 책으로 이 책 29쪽에 실린 목 잘린 남자의 사진은 필자가 남경대학살에서 본 사진과 흡사하다. 일본군이 저지른 남경대학살의 참상은 이미 일본 내에서 학습(?)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창업 10년 된 회사가 어떻게 해서 아프리카 굴지의 기업이 되었는가? 그 비밀의 열쇠가 한권의 책 속에 들어있다. 책 제목이 좀 길지만 《아프리카의 초인기 일본기업 비포워드의 성공 철학》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비포워드를 창업한 아먀가와 히로노리(山川博功, 46살) 씨다. 그는 20대 때 중고자동차 매매업을 시작했는데 해외 비즈니스 시장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여 실패를 거듭했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가 주로 공략한 것은 현지의 유력한 조력자를 얻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비포워드와 손잡을 파트너 기업을 찾아서 고용을 창출하고 신뢰를 구축해 나간 것이 주효했다. 또한 아프리카의 SNS 환경이 일본 이상으로 유행하고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입소문에 의한 평판이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야마가와 씨는 브랜드를 광고하기 위해 마우라이의 인기 축구팀을 사들여 팀 이름을 아예 비포워드라고 회사이름을 붙여 버렸다. 현재 비포워드는 매출이 500억 엔까지 성장했다. 28개국 지점에 52명의 외국인 스탭이 있는 등 국제적인 기업이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소개한 《아프리카의 초인기 일본기업 비포워드의 성공 철학》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의 안데르센이라 불리는 오가와미메이(小川未明,1882-1961)의 작품 가운데 “찔레꽃” 이란 게 있다. 원래 일본말로는 노바라(野ばら)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찔레꽃” 또는 “들장미”로 번역할 수 있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들장미”와 “찔레꽃”은 사뭇 다른 이미지로 다가서지만 일본말은 이 둘을 가리키는 말이 “노바라(野ばら)”다. 오가와미메이의 작품 ‘노바라(野ばら)’를 필자는 “찔레꽃”으로 번역하고 싶다. 가수 장사익은 찔레꽃 향기가 짙어 너무 슬프다고 했는가? 오가와미메이의 “찔레꽃” 줄거리는, 국경선을 사이에 둔 두 나라 병사가 전쟁이 없는 상황에서 친하게 되어 장기도 두고 말동무도 하다가 갑자기 한쪽의 병사가 전쟁으로 국경 수비대를 떠나야 하는 일이 생긴다. 두 나라 병사는 한쪽이 노인이고 한쪽이 젊은이었다. 젊은이가 국경 수비대를 떠나기 전까지 두 병사는 날마다 마주치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바로 찔레꽃 필 무렵이었다. 유독 가슴 시린 향기를 내뿜는 찔레꽃 주변에는 언제나 꿀벌들이 날아들었고 적이자 동지가 된 두 사람은 마치 친아버지와 아들처럼 친하게 되지만 결국 젊은이는 전쟁터로 배치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 사람이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선 캘릭호를 타고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이 최초다. 이때부터 1905년 8월 8일까지 56회에 걸쳐 하와이 땅을 밟은 사람은 7,291명에 이르렀다. 초기 이민선을 탄 사람들은 사탕수수 밭 노동을 위해 건너 간 사람들이다. 1905년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전체 노동자 48,229명 가운데 한인은 4,683명으로 9.71%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일본사람들이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것은 언제일까? 일본인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것은 1830년대지만 본격적인 이민의 역사는 1868년이다. 이후 1902년 사탕수수밭 노동자의 70%를 일본인이 차지할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이 하와이 땅을 밟았다. 그러나 1924년 일본인의 입국을 저지하는 이른바 배일이민법(排日移民法)이 가동되면서 하와이 이민자 수는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24년 7월 1일 미국의 이민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은 각국으로부터 하와이로 들어오는 노동자 수를 무제한 받아들이지 않고 연간 제한을 두는 법으로 배일이민법은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와이 사탕수수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