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개운하다’. 흔히 ‘개운하다’라고 표현할 때 ‘운이 열린다’는 느낌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개운’은 ‘운명을 열다’라는 뜻이 담긴, 희망적인 표현이다. 개운한 느낌이 드는 행동을 했을 때 운명이 조금이지만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늘산’이라는 필명을 가진 지은이가 쓴 이 책, 《운명을 열다》는 운을 끌어올리는 개운법을 좋은 습관, 태도, 마음가짐 등 다양한 면에서 일러준다. 저자는 78퍼센트의 사람은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지만, 22퍼센트의 사람은 난관을 극복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다고 본다. (p.55) 개운(開運)은 역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입니다. 평소 우리는 어떠한 일이 꽉 막혀 있다가 해결되었을 때, 목욕을 하고 나서 몸이 아주 상쾌한 상태가 되었을 때 개운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어질러진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거나 묵혀두었던 과제를 마무리했을 때도 개운하다고 합니다. 지은이는 동양에서 개운법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으로 크게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귀인을 찾는 것이다. 절대자인 조물주는 우리들의 영혼 깊숙이 진실한 인연을 찾는 힘을 심어주셨으며, 이 방법이 개운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굿춤은 종교적 목적으로 추는 의례춤이다. 무당이 소정의 목적 달성을 위해 자신의 기(氣)를 상승시켜 신을 기쁘게 하거나 죽은 망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추어지는 신앙 행위의 춤인 것이다. 황홀경에 도취한 신바람의 율동은 굿춤의 결정체이며, 혼돈과 세속적 질서를 깨트려 삶의 아픔과 슬픔을 달래어 신탁을 받는다. 그리하여 활력을 재생산하여 삶의 활력소를 갖도록 하는 것이 굿춤의 궁극적 목표다. 또한, 죽은 망자의 한을 달랜 뒤 저승문을 열어서 좋은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도 굿춤이 추어진다. 이와 같은 신앙의례의 굿춤을 춤 예술로 전환하여 세간에 소개한 박병천의 굿춤은 제석춤, 지전춤, 고풀이춤이다. 미학적 율동을 앞세워 무대예술로 등극한 이러한 춤은 삶의 정서와 관념을 담론화하여 예술 미학의 극치를 드높인다. 제석춤은 인간의 재복, 수명, 자손 점지를 관장하는 제석신의 춤이다. 환인, 환웅, 단군왕검 등 삼신의 제석은 존엄함의 상징이기에 제석춤 또한 엄숙함과 위엄성의 극치를 표출한다. 이러한 신앙적 제석춤을 신명적 흥과 미학적 멋을 불어 넣어 예술 춤으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종이로 오려 만든 지전(紙錢)을 들고 죽은 망자를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잘 아는 이는 말하지 않고 말을 많이 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입을 다물고 욕망의 문을 닫아라. 날카로움을 꺾고 엉킨 것을 풀어라. 빛을 가리고 먼지와 같이 되어라. 이것을 본래의 하나 됨이라 하느니라.”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노자는 ‘화광동진 광이불요((和光同塵 光而不耀)’를 이야기합니다. 세상은 제 잘난 맛으로 살아갑니다. 자기 자랑으로 하루 해가 저무는 사람도 많습니다. 철원에 가면 숙취에 좋은 음료수를 만드는 공장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창업주의 박물관이 있지요. 그가 평소에 받은 감사장 및 상패, 각종 선물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제품 광고에 자신이 등장하는 것을 좋아하지요. 자랑으로 하루가 저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노자는 이야기합니다. "빛을 감추고 티끌 속에 섞여 있어라. 빛을 갖고 있으되 반짝이지 말아라." 비우고 또 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마음이 연못처럼 깊어야 세상을 품어낼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현동(玄同)이라는 말씀도 있지요. 검은 것은 현묘합니다. (玄妙之道) 아주 진한 빨강이나 아주 진한 파랑은 검은색으로 수렴합니다. 위에 열거한 색뿐 아니라 색 대부분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山上有山天出地 산 위에 또 산이 있어 하늘 가득 땅이로구나 水邊流水水中天 곳곳에 물이 흐르고 그 속에 또 하늘이 있네 蒼茫身在空虛裏 내 몸은 아득하고 텅 빈 하늘 속에 있으니 不是烟霞不是仙 내가 저녁 노을인가 혹은 신선인가 모르겠네 ... 「遊楓嶽和車紫洞 풍악에서 놀며 차자동에게 화답하다」 금강산이 좋아서 자신의 호도 봉래(蓬萊)라는 금강산의 여름 이름을 쓰던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금강산에 들어가 남긴 시 가운데 하나다. 금강산 하면 양봉래(楊蓬萊)를 생각할 정도로 그는 금강산을 노래한 많은 시를 썼고 멋진 바위에 글을 새겨 놓았다. 금강산 인근의 회양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이 자기 집 정원 격이었다. 그가 당시 만폭동 바위에 새겨 놓은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의 여덟 글자와 “만폭동(萬瀑洞)” 세 글자는 지금도 남아 있다. 어느 날 금강산 절승의 하나인 불정대(佛頂臺)에 올라 장쾌한 십이폭포(十二瀑布)를 바라보며 드디어는 눈앞의 자연과 하나가 된다. 山岳爲肴核 높고 낮은 산들을 안주 삼고 滄溟作酒池 동해 바다 물로 술 빚어라. 狂歌凋萬古 취해서 실컷 노래 부르고 不醉願無歸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57) “네가 들려준 소리들이 우리글을 만드는 데 크게 쓰였다. 아비의 마음 같아서는 온 백성들이 나의 딸이 함께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 정의는 또 얼마나 기뻤을까 생각했단다.” “아바마마….” “세상에 너의 공을 알리지 못함이 속상하지는 않더냐?” “그렇지 않사옵니다. 조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아바마마께서 직접 만드시고 이룩해내신 크나큰 업적이옵니다. 저는 다만 미력한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한글은 참 쉽다.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혀 금방 ‘까막눈’을 면할 수 있다. 글자를 모르고 살아가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한 임금, 세종은 어떻게 그 어려운 일을 집현전 학사나 신하들의 도움 없이 해낼 수 있었을까?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의 비밀 프로젝트였다. 나빠진 건강을 이유로 세자였던 문종에게 정무를 맡기고, 본인은 본격적으로 문자 연구에 매달렸다. 이때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큰 도움을 준 이가 바로 딸 정의공주였다. 박연아가 쓴 이 책, 《정의공주》는 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공신이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정의공주의 일생을 다룬다. 정의공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제가 바다를 처음 본 것이 아마도 10살 때가 아닌가 합니다. 충청남도 서천에 사는 외삼촌 댁을 방문했을 때였으니까요.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시절, 역마다 서는 비둘기호를 타고 일곱 시간을 달리고 황톳빛 길을 걸어 산을 하나 넘은 뒤에야 서천 외삼촌 댁에 도착했지요. 눈만 뜨면 산이 보이는 산골에서만 살다가 앞에 탁 트인 평야와 바다가 그리 신기할 수 없었습니다. 외삼촌 집에서 바라본 바다는 산 너머에 걸쳐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산 너머에 있는 바닷물이 흘러 넘어와 마을을 덮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이제 자가용을 타고 한 시간만 투자하면 너른 바다를 볼 수 있으니 참 좋은 세상이 된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삶은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는 크든 작든 늘 파도가 있습니다. 파도 없는 바다는 죽은 바다지요. 우리의 삶도 파도가 없으면 죽은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작든 크든 파도를 넘을 때 삶의 희열과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우린 삶의 바다에서 소소한 행복을 건져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작은 즐거움을 지나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일상에 소소한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겨울 산행은 멋진 상고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워 어렵기도 합니다. 추위가 심할 때는 슬기말틀(스마트폰)을 꺼내어 시간을 보기도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 스마트워치나 손목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이 가끔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문제는 3천만 원짜리 명품 시계나 시중에 단돈 만 원하는 시계나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60평이 넘는 으리으리한 집에서 잠을 자거나 15평 원룸에서 잠을 자거나 우리가 필요한 것은 반 평 남짓한 침대인 것은 똑같은 사실이고요. 넓은 집이 건강한 꿀잠을 제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천만 원하는 명품 모피코트를 입으나 몇십만 원하는 오리털 파카를 입으나 체온을 적절하게 유지하며 비바람을 막아주는 것은 같습니다. 가끔 술을 마시지만, 가장 좋아하는 주류는 소주입니다. 얼마 전에 지인이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500만 원짜리 술을 먹어 보기도 했지만 5천 원하는 소주와 취하는 것은 같았습니다. 퇴직 무렵에 차를 바꾸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차라고 생각하고 무리해서 좋은 차로 바꾸긴 했는데 대형 고급 차나 소형차나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것은 같았습니다. 그러니 우린 행복이 물질적인 것에서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김 삿갓이 아름다운 금강산을 보고 지은 시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다; 一步二步三步立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가다 멈추고 보니 山靑石白間間花 푸른 산, 하얀 돌 사이에 곳곳에 꽃이 천지구나 若使畵工模此景 만약 화공을 불러 이 경치를 그리게 한다면 其於林下鳥聲何 나무 사이에 들리는 새소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인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가 이 물음에 답을 그림으로 내었다.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라는 그림이다. 금방 꾀꼬리 소리를 듣고는 고삐를 당기고 꾀꼬리 소리를 확인하러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아 그 나뭇가지에 자그만 꾀꼬리가 있구나. 이렇게 꾀꼬리 소리가 그림 속에 영구히 잡혀 있다. 가야금의 명인이신 황병기(1936~2018) 님은 젊을 때 인사동 고미술 전시회에서 한 선비가 집 뒤 수풀 속에서 들리는 새소리를 듣고는 확인하려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림을 보고 빠져들었다. 심전 안중식(1861~1919)의 <성재수간(聲在樹間)>이란 그림이었다. 황병기님은 그 그림의 느낌을 가야금 곡으로 작곡해 내고는 '밤의 소리'라는 이름으로 발표해 가야금 음악의 전설이 되고 있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창의성이란 무엇일까? 창의성에 대해서는 많은 정의가 있지만, 대체로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이리저리 섞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기존에 있던 요소를 절묘하게 섞어 만드는 ‘융복합’이 창의성이라는 거다. 그렇게 보면 조선에서 창의성으로 으뜸가는 인재가 있다.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학자이자 정치가이고, 작가이자 교육자이고, 의사이자 건축 기술자였다. 요즘 말로 하면 문과, 이과가 다 되는 천재였던 것이다. 단지 문학, 사학, 철학만 잘한 것이 아니라 산술, 의학 등에도 능해 진정한 ‘융복합 인재’라 불릴 만했다. 고정욱이 쓴 책, 《다산, 조선을 바꾸다》는 ‘정약용에게 배우는 융합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정약용의 이런 다재다능한 면모를 조명한 책이다. 정약용은 ‘실학’의 선구자인 만큼 세상과 학문의 접목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고, 늘 배우며 협력하고, 정보를 모으며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삶의 태도가 ‘유배형’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시련을 만났을 때 오히려 아름답게 피어났다. 그러나 아무리 유배지에서 시간이 많았다지만 어떻게 그렇게 방대한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늙어서는 탐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욕심을 버리지 않는 것을 노욕(老慾)이라고 합니다. 그건 노추(老醜, 늙어서 추하게 됨)가 되기 쉽기 때문이지요. 물론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이 개인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요. 그런데 분수에 넘치고 도가 지나치면 탐욕이 되고 나이가 들어서도 개선이 되지 않으면 노욕이 됩니다. 앙드레 지드는 이런 말씀을 남깁니다. "늙기는 쉬워도 아름답게 늙기는 어렵다." 청년보다 노년이 죽음에 더 가깝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그러면 욕심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것보다는 많은 부분을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욕심을 내려놓고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것인데 인생을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문제이지요. 우린 물러날 줄 모르고 내려놓을 줄 모르고 움켜쥐려고만 하는 노욕이 심한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젊은이들에게 양심도 없는 자나 제 욕심만 가득 차고 관용도 없는 그런 존재로 보일 뿐이지요. 인생은 삶의 종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생이 끝나야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권력의 잘못을 단죄하지 못하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