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세미나가 있어 가니 초청강사 한 분이 파워포인트 자료로 특강을 하더군요. 맨 처음 비친 장면은 ‘과잉연결시대’의 화면이었습니다. 빨간 선이 얼키설키 둥근 원으로 그려져 있는 속에 인간이 갇혀 있더군요. 인터넷과 통신기기의 발달로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연결’이 인간 사이에 급속도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지요. 손말틀(휴대전화)은커녕 한 마을에 전화 한 대로 연결되던 시절이 불과 삼십여 년 전인 것을 기억하는 세대로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때 우리 동네에 전화기가 있던 집은 이장집뿐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버튼식이 아니라 손가락을 전화기 다이얼에 넣고 오른쪽으로 끝까지 돌리면 나사 풀리듯 디리릭 소리를 내며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고 그러면 다시 구멍에 손을 넣고 돌리는…. 박물관에나 가서 볼 수 있는 전화기를 쓸 때만 해도 과잉연결시대'라는 말을 상상도 못하던 시대였지요. 지난 성탄절 때도 그렇고 이번 새해 인사 역시 문자 메시지가 폭주까지는 아니지만 꽤 많이 들어왔는데 주로 보험회사와 슈퍼마켓, 서점, 심지어는 어디서 알았는지 아파트 분양회사까지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기분이 썩 좋은 것도 아니라서 문자를 열어본 기분이 떨떠름합니
한때는 이중과세라 하여 양력설만을 세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양력설과 음력설을 따로 세기도 하는 등 혼용되어 오다가 요즈음에는 달력에도 ‘설날’이라고만 표시되어 있어 조상 대대로 지내오던 우리 설이 정착되어 가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웃나라 일본의 설은 언제일까? 일본은 명치유신 때부터 음력을 버리고 양력으로만 모든 세시풍속을 지켜오고 있다. 따라서 설날도 양력설을 센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는 고로 한국 같은 명절분위기는 없다. 하지만, 일본 나름의 정초 행사가 있는데 다름 아닌 신사참배이다. 일본인들의 신사참배는 정초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우리네 어머니들이 가고 싶은 날 절에 가듯이 들르는 곳이 신사(神社)지만 특히 정초에 찾아가는 신사 참배를 가르켜 특별히 하츠모우데(初詣)라고 한다. 하츠(初)란 처음을 나타내는 말이고 모우데(詣)는 참배를 뜻하므로 하츠모우데는 정초 첫 신사참배를 말하는 것이다. 이맘때쯤 일본의 인터넷에서는 전국의 유명한 하츠모우데 신사(또는 절)를 소개하느라 서로 경쟁이 붙는다. 대부분 전국 지도를
연말연시에 볼 수 있는 일본의 장식문화 12월도 슬슬 중반이 넘어 월말로 접어드는 이때쯤 일본에서는 신년맞이 각종 집안 장식품들을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장식품이라고는 했지만 크리스마스 장식품 같은 것은 아니고 달리 말하면 부적에 가까운 것이라고 하는 게 이해가 빠를 것 같다. 한국에서는 요즈음 ‘부적’이라고 하면 악귀를 쫓으려고 몸에 지니거나 집안에 붙여두는 것쯤으로 알지만 일본의 신년 맞이용 장식품들은 거의 악귀를 쫓거나 신령을 맞이하고 복을 빌기 위한 매개체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카도마츠(門松)”이다. 카도마츠란 ‘문송(門松)’이라는 한자에서 보듯이 대문 앞에 세워두는 소나무 가지를 말한다. 예전에는 나뭇가지 끝(木の梢, 고즈에)에 신(神)이 머무른다고 믿었기에, 문 앞에 소나무가지를 세워두는 것은 바로 신을 맞이한다는 뜻이 있다. 일본사람들은 정초 집 앞에 소나무가지를 세워두는 일을 아주 소중히 여겼는데 정초에 신을 맞이하지 않으면 그 한해는 불행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신을 맞이하는 매개체로 쓰이는 것은 소나무 가지 말고도 사카키나 동백 같은 상록수가 쓰이지만 지금은 거의 소나무만 쓴다. 헤이안시대(794-1
일본 시가현 호남시 불교미술 서울 나들이 비파호를 끼고 있는 시가현은 일본의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많이 간직한 도시들 가운데 4번째로 꼽히는 곳이다. 이곳의 보물들이 “일본 불교미술 비파호 주변의 불교신앙”이란 주제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릴 예정(12월 20일~)이다. 시가현에 있는 절과 신사에서 소유하고 있는 국보 4건과 중요문화재 31건 등 모두 94점을 선보인다. 이러한 기사가 실린 2011년 11월 22일 자 교토신문을 오려 보내온 분은 시가현 상락사의 다케우치 씨이다. 붉은 단풍이 상락사를 물들이던 지난 11월 21일 나는 백제계 양변 스님의 발원으로 지어진 상락사를 찾았는데 상락사 들머리에 있는 삼성신사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절 안내소에 있는 다케우치 씨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 다케우치 씨는 “좀 더 알아보고 한국으로 자료를 보내겠다.”라는 약속을 했다. 그로부터 3주쯤 지난 엊그제 명동 로얄호텔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재일교포 오영환씨였다. 시가현에서 다케우치 씨와 친하게 지내는 분이라며 서울 나들이 길에 다케우치 씨의 삼성신사(三聖神社)에 대한 자료를 손수 가지고 왔다면서 전해준 누런 봉투 속에는 다케우치 씨가 직접 붓으로
연말에 붐비는 도쿄 재래시장 ‘아메요코’ 연말이 다가오면 사람들의 마음은 바쁘다. 특히 외국에서 연말연시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고국에 대한 향수가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일본에 있을 때 마음이 착잡할 때마다 찾아가던 곳이 있는데 우에노에 있는 재래시장인 ‘아메요코(アメ橫)’ 시장이다. 우에노 역에서 오카치마치 역까지 기다랗게 형성되어 있는 ‘아메요코’시장은 옷, 구두, 꾸미개(액세서리) 따위의 잡화를 비롯하여 사탕이며 과자는 물론이고 채소와 생선, 과일 따위를 파는 식품 가게 등 가짓수도 헤아릴 수 없는 점포가 들어서서 장사를 하는 것이 꼭 서울의 남대문 시장 같은 분위기다. 특히 아메요코 시장의 유래가 재미있다. 2차 대전 패전 뒤 사탕(일본말로 아메)을 팔던 가게가 200여 곳이 있어 붙여졌다는 이야기와 당시에 일본에 남아 있던 미군들이 본국에서 가져온 꾸미개나 값싸게 들여온 텔레비전, 냉장고 따위를 팔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부르던 ‘아메리카요코쵸’가 줄어서 ‘아메요코’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패전 뒤 일본의 경제가 어렵던 시절과 관련이 있음이 틀림없다.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던 수도 도쿄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달콤한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파호(琵琶湖)를 끼고 있는 시가현(滋賀)은 교토와 오사카에 면해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이곳은 1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하여 55건의 국보 그리고 806건의 중요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도시로 국보보유로 치면 교토부, 도쿄도, 나라현, 오사카부 다음으로 많은 곳이다. 에도시대에는 강남, 강서, 강동 지역으로 나누던 것을 명치시대 이후에는 비파호를 중심으로 호남, 호동, 호북, 호서 4곳으로 생활권역을 구분하고 있다. 예부터 관동지방으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교통의 요지인 이곳은 전국 어디서나 접근성이 좋은데다가 특히 가을철 단풍의 명소로 꼽혀 단풍철에는 숙박을 정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일 정도로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은 지역이다. 이에 맞춰 “호동3산 순례”라든가 “호남3산 순례”와 같은 유서 깊은 절 순례코스를 만들어 놓고 임시버스를 운행하는 등 지역 관관협회의 홍보도 매우 적극적이다. “호남3산 순례길”을 나선 것은 지난 11월 21일 월요일이었다. JR고세이 역에서 탑승한 임시버스는 맨 처음 우리를 선수사에 내려 주었다. 국보답게 고색창연한 본
“지금의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은 오오츠시청 서쪽에 있다. 일찍이 북원(北院)에는 신라선신당을 중심으로 많은 가람과 승방이 있었으나 명치유신 때 정부가 신라선신당과 페노로사묘(1853-1908, 미국인으로 일본의 미술을 서구에 소개함)가 있는 법명원(法明院)만 남기고 모두 헐어 버렸다. 전후 미군의 캠프로 쓰이다가 현재는 오오츠시청과 현립오오츠상업고교, 황자공원이 들어 서 있다.” 위는 삼정사(三井寺, 미이데라) 누리집에 있는 신라선신당의 이야기로 당시에는 무척 규모가 컸으나 지금은 본당 건물 하나만 달랑 남아있다. 삼정사는 일본 남부 시가현(滋賀縣) 오오츠 시에 있는 유서 깊은 절로 원래 이름은 원성사(園城寺)이다. ‘三井’이라 하니까 우물이 세 개나 있어 보이는데 실제 이렇게 절 이름이 바뀐 것은 우물과 관련이 있다. 삼정사 안에는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천지왕(天智天皇), 천무왕(天武天皇), 지통왕(持統天皇)이 태어났을 때 산탕(産湯, 갓 태어난 아기 목욕물)으로 쓰였다고 해서 붙인 것으로 이 절이 고대 황실과 밀접했음을 보여준다. 이 절을 세운 사람은 지증대사 원진으로 원진스님(円珍,814-891)은 도쿄대 이노우에(井上光貞) 교수가 쓴 《왕인의 후
우리 애들 어렸을 때만 해도 돌잔치는 집에서 치르는 줄 알았다. 지금은 이십대 중반이 된 아이들이 첫돌을 맞았을 때 친정어머니의 일손은 바빴다. 수수팥단지를 만들고 삼신할머니에게 올릴 시루떡도 손수 쪄내느라 좁은 집은 수선스러웠다. 어디 그뿐인가! 금반지 반 돈이라도 해 들고 찾아오는 일가친지를 맞아들일 준비도 하고 돌날 아침 돌잡이 상도 따로 봐야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일을 집에서 하는 아이 엄마는 없다. 아이가 태어나서 맞이하는 백일과 돌잔치는 어느새 거대한 이벤트화 되어 호텔마다 젊은 부부들의 아기 돌잔치 예약이 넘쳐난다. 손님들도 금값이 비싼 지금은 현금 봉투를 들고 돌잔치가 열리는 뷔페식당이나 값비싼 호텔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웃나라 일본의 돌잔치는 어떠한가 보자. 일본은 돌잔치가 없다. 엑? 하고 놀랄 분들이 계시겠지만 태어나서 치르는 첫 생일인 ‘돌’이라 부르는 특별한 잔치는 없다. 그 대신 ‘오미야마이리(お宮參り)’라고 해서 핏덩이를 막 벗어난 한 달 정도 되는 아기를 강보에 싸서 신사 참배를 한다. 그 이후에 남자아이는 3살과 5살 때 여자아이는 3살과 7살이 되는 해에 일본 전통옷을 곱게 입혀 신사 참배를 시
“소나무 숲 사이에 핀 잔잔한 들국화 한 송이 꺾어 내려오는 쓸쓸한 저녁”-牟田口龜代- “북한산 산마루에 흰 구름 비추니 오늘은 맑겠구나” -久保靜湖- 위 노래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이치야마(市山盛雄) 씨가 펴낸 조선풍토가집에 나오는 일본의 단가(短歌)이다. 이 노래집에는 816명이 조선을 다녀가면서 읊은 노래들이 실려 있는데 온돌, 한약방, 주막, 고려자기, 무녀, 기생, 양반, 조선요리와 같은 조선의 풍속에 관련된 노래가 있는가 하면 쑥, 무궁화, 소나무, 작약, 조선인삼 같은 식물류와 까치, 학, 매, 뻐꾸기, 호랑이 같은 동물류도 노래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땅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바를 노래로 기록해두고 있다. “내가 조선을 회고하건대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맑고 투명한 하늘의 아름다움이다. 그 중에서도 남선(조선을 남북으로 볼 때 남쪽)의 하늘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빛이다.”라고 와카야마(若山喜志子) 씨는 서문에서 조선에 대한 인상을 쓰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매력에 빠져 여러 번 조선 땅을 밟았다는 사람도 있다. 1936년이라면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 된 지 26년째로 조
이이오겐시 씨가 쓴 “최을순 상신서” “재판관님. 저는 본국(한국)으로의 송환을 기다리며 오무라(大村) 입국자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주부입니다. 본적은 조선 경상남도 함안군이고, 이름은 최을순(30세)이라 합니다. 제가 귀국(일본)에 불법 입국하게 된 것은 쇼와(昭和 32년, 1957년) 5월 열여섯의 나이였을 때입니다. 일본에서 살아온 남편이나 저, 그리고 제 부모님이나 형제가 귀국과 연관된 것들에 대해 재판장님께서 제 이야기를 직접 들어주셨으면 하여, 반년 이상 살아온 수용소의 다다미방에서 썩 능숙하지는 않지만 일본어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서른 살의 최을순은 세 살과 한 살짜리 아기엄마였다. 180여 일을 눅진 다다미방에서 강제 송환이라는 절차를 기다리며 오죽 답답했으면 재판관에게 자신의 심경을 써 내려갔을까? 최을순의 변론을 맡은 시미즈 변호사는 이런 사건을 전적으로 도맡다시피 한 변호사이다. 그의 책상에는 언제나 수북하게 이러한 사연이 쌓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찡그리는 적이 없다. “독(毒)도 약(藥)도 되지 않는 외국인은 모두 돌려보낼 생각이다. 그게 우리나라의 정책이니까. ‘외국인은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자유’”라고 당당히 말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