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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공 아산 옛집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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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밖에서 본 충무공 옛집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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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문간에서 본 집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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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채 입구에서 본 안채, 대청마루가 넓게 열려있고, 뒷뜰에는 화초가 활짝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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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진 "ㅁ"자집의 터진쪽에서 본 본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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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과 안방의 앞에 아궁이가 있는 모습, 아궁이는 퇴칸마루의 아래를 이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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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대청마루에서 본 후원의 화초류들. 꽃이 활짝 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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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측면에 장독대와 우물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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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뜰과 장독대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민족이 일본에 완전히 먹히는 것을 막아낸 불세출의 민족영웅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사시던 옛집이다. 장군이 언제부터 이곳에 사셨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지금은 이 옛집 바로 옆에 현충사를 지어 충무공을 모신 사당으로 그를 기리는 한민족의 후손들이 그의 초상화 앞에 향을 사르며 추모의 예를 드리고 있다.
공의 옛집은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고 하며, 집 바로 앞에는 우물이 있어 당시 마을의 공동우물로 쓰였다고 한다. 공의 집은 앞쪽이 길게 8칸이 '一'자로 펼쳐진 사랑채가있고, 서남측으로 사랑방으로 쓰이던 방들이 있고, 그 사랑채 중간쯤에 1칸 대문간이 있다. 그리고 동남측으로는 4칸의 마루가 있어 개방적인 사랑채로 쓰였다. 가옥의 평면구조는 대문을 들어서면 전체적으로 평면구성이 'ㅁ'자로 막혀있는 듯 하나 서쪽으로 부분적으로 트여있어 터진 'ㅁ'집이다.
터진 'ㅁ'자의 옆에는 서쪽의 양지바른 곳에 장독대가 설치되어 있다. 현충사를 들러 공의 나라사랑의 정신에 깊은 감사와 함께 그가 살았던 집을 둘러봄으로서 옛 선조들의 생활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으로 생각되어 사진을 올려본다.
나라를 다시 세운 위대한 장군이었지만, 그 험난한 임진왜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군 분투했고, 혁혁한 전과는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날만큼 위대하고, 심지어 일본이 자랑하던 일본 해군제독으로 러시아함대를 격파한 도고 헤이하치로조차도 자신의 전과는 이순신장군의 전과에 견주면 하잘것이 없다고 했던 장군이었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선조로부터 그의 공이 그리 크게 인정되지도 못했다.
선조는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급급했고, 당시 목숨을 바쳐 이룩한 의병, 승병, 이순신장군등에 대하여는 극히 배타적으로 대하여 공을 깎아내리기에 급급했고, 원군으로 왔지만 민폐만 끼치며, 전투에는 별 전과도 없던 명나라에 대하여는 상국으로 지극한 예를 다 했으니, 너무도 한스럽기 그지 없다.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충무공의 공적은 빛이나고, 후대에 가서야 충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이제는 한민족 최고의 장군으로 '성웅 이순신'이라 불러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이제는 나라의 심장인 광화문 광장 맨 앞에 그의 동상을 세우고 그가 있었음에 늘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있으니 이제라도 온 국민의 흠모와 사랑을 함께 받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며칠 후면 현충일이 된다.
현충일을 맞이하여 1950년 한국전쟁에 희생된 용사들과 더불어, 조선시대 바람 앞에 등불같았던 1592년 임진왜란시기를 상기하며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다시 한 번 추모해본다. 나라를 위하여 한 몸 기꺼이 바치신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명복을 빌며..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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