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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순절묘가 있는 묘역의 아래에는 영령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있다. 찾는이 드물어 대문이 닫혀있어 향도 사르지 못하고 산 등성이에 흩어져 있는 무덤들만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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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절묘역의 사당(왼쪽이 사당이고 오른쪽은 출입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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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의 왼쪽언덕에 풀숲이 우거지고 무덤들이 흩어져 있다. 사당 앞에는 자동차 10여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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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의 왼쪽으로 오르는 비탈길 옆에는 측백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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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 군데 자손이 있는 무덤에는 비석들이 있고, 대부분 묘역에는 작은 봉분만 있지 표지석도 없는 무명용사의 무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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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들이 있는 언덕. 햇살이 비치니 무덤의 봉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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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밝혀지고 자손이 있는 묘역에는 옛날 비석과 새로 만든 비석이 나란히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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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위에서 내려다본 무덤들과 아래동네. 묘역의 위에서 보니 햇빛에 봉분의 그림자가 져 무덤들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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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흘리며 무덤을 오르는 답사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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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아래 펼쳐진 진도의 논과 밭. 섬이면서도 논밭이 꽤 있어 살기에는 참 좋은 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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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이름이라도 밝혀진 무덤은 당시의 관직이나 재력이 있던 사람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진도 벽파진을 돌아 항몽유적이 있는 용장산성으로 가는 중간에 정유재란 순절묘가 있었다. 보배섬 진도에 들러 역사의 상처만을 어루 만지면서 지나 가자니 과연 이것이 진도의 보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보배라 하면 자연물이라면 기암절벽 아름다운 경치나, 소유할 물건이라면 집안이나 개인이 자랑삼아 지닐 수 있는 귀한 보석 또는 사람이 만든 정말 진귀한 것들일 것이나, 아직까지 진도에서 본 것들은 나라의 운명이 걸린 전란의 상처와 그 전란속에서 빛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공적뿐이었다.
벽파진충무공전첩비를 둘러보고 가슴 찡하고 애잔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찾은 곳은 또 하나의 슬픈사연이 깃든 "정유재란 순절묘역"이었다. 벽파진에서 거리로는 5km 남짓이나 자동차로 10여분 구불구불 산길을 지나다가 묘역 앞에 이르러 잠시 한눈 파는 사이에 안내표지판을 지나쳐서 백여미터를 되돌아 길 옆에 작은 3칸짜리 사당 건물이 있어, 이곳이 바로 그곳이라 생각하고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사당은 옛날 한옥으로 주변에 아담한 돌담장에 기와를 얹은 지붕으로 둘러쳤고, 작은 대문이 있었다. 대문 앞에는 정유재란순절묘의 사연이 적힌 안내판이 있었다.. 하지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 삼복더위에 이곳을 찾는 이는 우리 일행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더위를 피하여 깊은 산 계속이나 시원한 바닷가로 갔지, 옛날 민초들의 상처를 찾아 땀 흘리면서 유적을 찾는 이들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도대체 정유재란 당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누가 순절했다는 것인지... 궁금증이 들었다. 하여 안내판을 읽어보니.그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정유재란이란, 임진왜란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의 소서행장이 조선을 빼고 강화조약을 논하는 사이 서로 지쳐 싸움이 소강상태인 상황에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낮설고 물설은 조선땅에서 특히나 혹한의 겨울이면 얼어죽는 병사들이 많아지고, 이순신장군의 남해안 보급로 장악으로 군량등 보급품도 지원되지 못하자 왜군 주력군이 사기를 잃고 퇴각하였다. 한편 명분도 없는 남의나라 싸움에 끼어들었던 명나라와 명나라를 치겠다는 허황된 꿈에 사로잡혔던 일본이 서로 강화을 위한 명분을 찾다가 다시금 대군을 투입하여 발발한 것이 정유년(1597년)이었기에 붙은 이름이다.
대부분 주력왜군이 퇴각하자 이제 안심하던 선조는 다시 왜군이 처들어온다는 비보를 접하자, 고문으로 병이 깊은 이순신에게 백의종군을 명하였다가 싸울만한 배도 없는 삼도수군통제사직을 다시 제수하였는데, 이순신은 두말하지 않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선조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도 빈약한 수군의 형편을 짐작하여 무모한 전투로 희생당할까 두려우니 수군을 그만두고 육군으로 싸우라는 권고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장군은 자신에게는 아직 12척의 함선이 있고 또 자신이 죽지 않았으니 적이 조선군을 업수이 여기지 않을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까지 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처참한 것이다. 임진년 이후 5년동안 호남지역은 이순신장군의 위엄속에 아무런 피해도 없이 온전하였다. 그러다가 호남지역이 유린된 것은 바로 제2차 침략인 정유재란이 있은 뒤부터이니 그 때 남원을 통해 들어온 왜군은 전라도의 평야지역을 휩쓸고, 그동안 온전했던 대부분 목조문화재들이 모두가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런데 진도에서 정유재란순절묘역에 묻힌 사람들은 제2차 침공인 정유재란 당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의 휘하장병으로 참가하였다가 전사한 사람들이 아니고, 명량해전으로 완전히 패배한 왜적들이 그 패배의 보복을 하기 위하여 아무런 방비도 없는 선량한 진도주민들을 살육하였고, 그때 희생당한 사람들이 묻혀있는 공동묘지였다. 그 사연은 이러했다.
명량해전에 승리한 이순신장군은 이곳 진도 벽파진이나 해남 우수영에 수군의 진을 두지 않고, 왜적들의 또다른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심안당사도'로 수군 본진을 후퇴하였는데, 이때 이순신장군이 없는 틈을 타서 왜군들이 진도에 상륙하여 이순신장군을 도와준 주민들에게 분풀이를 한 것이다. 본래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도륙되었는지 모르나, 현재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232기의 무덤인데, 이들 중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진 사람은 16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그 이름조차 알수없는 처지이다.
국가의 존재 의미는 백성들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백성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국가를 위하여 세금도 내고, 노역도 하고, 특산품도 만들어 바치는 것이 옛날 백성들의 소박한 의무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백성이 도망친 군주를 대신하여 국가를 구하고자 목숨은 바쳤지만 백성을 보호해야 할 국가는 별로 한 일이 없는 것 같아 국가를 위해 싸우다 희생당한 백성들의 입장에서보면 국가의 존재가 왜 필요한 것이었는지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무고한 진도의 백성들이 무더기로 죽어서 묻혀있는 정유재란순절묘역을 답사하고서 생각해보는 것은 국가가 백성을 위하여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과 국민이 국가를 위해서 해야할 의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생명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와 군주를 위해서 끝도 없이 희생만 당하고서도 그것이 당연시 된다면 백성은 더이상 국가를 위해서 희생당하기를 거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면 백성들의 아우성이 봉기로 표출될 것이고, 국가는 위태롭게 되기 쉽다. 하지만 진도에서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는 너무도 선량한 백성들의 심성이 아닌가 싶다.
무더위 속에 찾아본 진도의 정유재란순절묘역은 푹푹찌는 삼복더위에 너무도 적막하고 쓸쓸하였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문화유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