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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최치원의 행적이 남은 하동 쌍계사의 모든 것

 

   
쌍계사의 승탑, 교구본사로 또 유서깊은 역사에 견주었을 때는 너무도 소박하고 그 수도 적었다.

 

   
쌍계사 극락교, 사찰의 대웅전은 부처님을 모신 곳으로 그곳은 극락세계에 비유된다. 그 극락세계를 가려면 많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야 이를 수 있다고 가정하고 돌다리도 건너고 계곡도 건너고 굽이 굽이 산길도 돌아가야만 되는데, 극락교는 이제 부처님의 세계인 극락에 거의 다다았다는 뜻이다.

 

   
일주문에 이르면 이제부터 부처님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일주문을 자나면 금강문이 있다. 금각문에는 극락세계를 지키는 수호신인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다.

 

   
쌍계사 천왕문, 천왕문은 하늘의 세계를 동서남북으로 크게 나누어서 각각의 방위를 지키는 수호신장들이 지키는 곳이다. 실제로는 한곳에 모아놓았지만, 4명의 천왕은 각각의 동서남북 방향에 따라 지키는 범위가 다르다.

 

   
 ▲ 천왕문을 지나면 이제 대웅전에 이르기 전 마지막 단계로 누문이 있다. 그런데 쌍계사에서는 8각9층석탑을 대웅전 앞이 아닌 누문앞에 세웠다. 대웅전 앞에는 세울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 세운지 얼마 안되는 8각9층석탑인데 이 탑은 월정사 8각9층석탑을 본떠 세웠다.

 

   
쌍계사 대웅전, 대웅전 앞 뜰에는 신라시대 글을 잘 짓기로 당나라에서까지 이름을 날리던 최치원이 쓴 신라시대 고승 진감국사탑비가 있다.

 

   
최치원이 쓴 붓글씨가 남아있는 진감선사탑비. 전란에 많이 훼손되었지만 최치원의 글을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유적으로 국보 47호.

 

   
대웅전 앞 뜰에 세워진 진감선사탑을 살피는 탐방객들

 

   
쌍계사 경내 건축물들과 건물사이를 연결하는 통로

 

   
쌍계사 대웅전의 부처님 삼존불과 협시보살이 부처님 좌우에 있다.

 

   
대웅전 뒷편에 새겨진 석가삼존불

 

   
 

 

   
 ▲ 금강계단의 세부모습. 석탑처럼 기단을 쌓고 위에는 연꽃대좌에 석종형으로 탑을 세웠다.

 

   
쌍계사 전각들의 지붕, 겹친 지붕돠 처마와 나무들이 정겹다.

 

   
 ▲ 쌍계사 경내 석불좌상

 

   
쌍계사 선원, 스님들이 참선을 하는 공부방으로 저 위에는 선종의 맥을 이어받아 많은 선사들을 배출했던 서기 600년대 중국 당나라 6조 혜능대사의 머리를 모신 전각이 있다.

 

 

 
 
   
육조혜능대사의 머리를 모신 곳이 저 안에 있건만, 참선 동안거기간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문만 보고 돌아서니 아쉽기 그지 없었다.

 

   
쌍계사 전각들의 어우러진 모습
   
쌍계사 계곡, 겨울 가뭄으로 계곡물도 말랐다.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하동 쌍계사는 한국의 지역별 권역으로 나누어 절을 총괄하는 현재의 불교행정제도상 제13교구 본사로 쌍계사는 근처 50여 절을 관할한다.

본래 쌍계사는 신라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대사의 제자였던 삼법스님이 723년에 세웠는데. 삼범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오는 중에 선종의 조사로 법을 이어받은 뒤, 스승에서 제자 한사람에게만 이어주던 조사로서 중국에서 이어받은 6대조사였으나, 자신의 제자 한사람에게만 그 지위를 물려주지 않고 선을 세상에 대중화 하는데 큰 공이 있는 6조혜능대사의 머리를 꿈속에서 받은 계시에 따라 모셔다가 바로 이곳 쌍계사에 육조정상을 모시고, 쌍계사를 개창하였다고 한다.

그 때 산법스님이 육조정상을 모시고 안치할 곳을 찾아 전국의 유명한 산들을 다 돌았으나, 모실 곳을 찾지 못하다가, 이곳 지리산에 이르자 호랑이가 삼법스님을 안내하여 쌍계사 금당구역(현재 옥조정상전이 있는 구역)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 금당구역이고, 이와 달리 현재의 대웅전구역은 후에 중창된 권역이다.

금당구역에는 육조혜능대사의 머리를 모신 전각이 중심이 되어 남향으로 배치되어 건축물들은 남북축으로 되어있으며, 현재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축은 동서방향으로 현재 대웅전은 서향이다. 금당구역은 비탈이 심하고 전각을 지을 만한 땅이 협소하였기 때문에  좀더 넓은 곳을 찾아 새롭게 배치한 것이 현재의 대웅전 구역이 되는 것이다..

현재 쌍계사 대웅전 앞뜰에는 신라인으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급제하여 당의 고위 관직에 까지 진출했던 신라의 대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이 남긴 붓글씨가 전하는 진감선사탑비이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고국인 신라에서 바른 정치를 하고자 귀국하였으나 육두품이라는 타고난 신분제의 벽에 걸려 자신의 큰 뜻을 펼치지 못하고, 후일 결국 지리산에 들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골품제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었어도 어쩔수가 없었다. 이때는 신라가 거의 종말을 향하여 기울던 때이기도 하다.

고운 최치원은 군대의 힘으로 진압할 수 없었던 황소의 난을  뛰어난 문장으로 진압해서 유명한데, 당시 당나라 후기 관리들의 수탈과 민폐에 불만을 품은 황소라는 사람이 일으킨 반란의 기세를  아무리 뛰어난 장수를 보내어도 진압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황소의 무리는 그 세를 키워 당나라 수도인 장안까지 점령하여 더이상 어찌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최치원이 쓴 "토 황소격문" 하나로 반란지역 이곳 저곳에 방을 붙였는데 이를 본 황소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항복했다는 것이니, 그의 글재주가 얼마나 대단했던가 새삼 스럽다.

최치원은 신라로 돌아와 바른 정치를 위하여 시무10조를 건의하였으나, 이미 기울기 시작한 시기의 임금이었던 진성여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명산을 두루 거닐며 노닐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살아있을 때  열반하신 진감선사라는 분의 행적을 쓴 기록이니, 진감선사의 덕이 무척 놓았을 것 같다.

이런 역사와 전설이 숫하게 전하는 하동 쌍계사에는 육조혜능대사의 정상을 모신 육조정상전이 있고, 그 외에도 수많은 보물과 국보가 수두룩하다. 또 현재 절의 본당인 대웅전에 이르는 단계들이 잘 갖추어져있어 문을 지나고 계곡을 지나고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과연 극락세계에 이르는 듯한 느낌도 든다. 최근에 세운 대웅전 뒤에 금강계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하니, 이곳이 바로 부처님이 계신다는 극락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