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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화보] 익산 미륵사지 서측석탑에 기적처럼 보존된 국보급 유물

 

 

 

 

 

 

 

 

 

 

 

 

 

 

 

 

 

[우리문화신문=최 우 성 기자] 서기 600년대 백제 익산지역에 세워졌던 미륵사는 9층목탑과 더불어 9층석탑도 지어졌다. 석탑은 목탑에 비해 그 규모는 작았지만, 돌을 다듬어서 탑을 쌓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그 작업은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석탑은 가운데 세운 목탑의 좌우에 세우되 그 형태는 목탑의 형태를 흡사하게 하면서도 장식은 간략화 하였다.

 

그 재료는 돌(익산에서 나오는 황등 화강석)이었으나, 마치 목재로 집을 짓듯 땅을 다지고 기단을 만들어 기단위에 주초석을 앉혔다. 또 목조건물의 구석과 가운데는 3칸 집처럼 4개의 돌을 기둥처럼 세우고, 그 위에는 목조건축물처럼 처마에 장식성과 장엄성을 표현하는 공포를 두었다.


 각층 맨 위 지붕은 기와집처럼 경사지고, 처마는 곡선을 잡아서 다듬고 이를 마치 장난감 레고블럭을 쌓아 올리듯 9층까지 이르게 하였다.  맨 위에는 철제로 만든 찰주와 아름다운 상륜부를 세워 완성하였다. 이곳에 쓰인 돌들을 발굴해보니, 돌 하나의 무게가 2톤이 넘는 돌들도 많았다. 그렇게 크고 무거운 돌들을 정교하게 다듬는 일도 참으로 난해한 일이지만, 그 무거운 돌들을 어떻게 10m이상 높이 까지 올릴 수 있었는지....

 

지금처럼 거대한 건설장비나 크레인 같은 기구가 있어도 쉽지 않을 일인데, 그런 기계도 없는 상태에서 백제인들은 그 돌들을 미륵사 석탑을 조성하는데  쌓아 올렸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미륵사 탑에는 다른 사찰의 탑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당연히 모셔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탑이 많이 훼손되고 보니, 그 귀한 사리가 모두 사라진 것으로 여겼던 듯하다.  대개 탑에 봉안되는 불사리는 고귀한 부처님을 대신하는 것으로 이는 석탑의 경우 상륜부 가까운 곳에 안치하는 경우가 많다고한다.


그래서일까? 일제강점기 일인학자들은 목탑의 사리와 이미 그 형상과 자취가 사라진 동탑의 사리, 또 허물어져가는 서측석탑의 사리가 모두 사라진 것으로 판단하고, 더 이상 불사리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서측석탑이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 당시 발견한 상태대로 시멘트로 발라서 고정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광복된 대한민국의 학자들도 서측석탑에는 사리가 이미 망실된 것으로 체념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인학자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측의 무너져 가던 탑을 맨 아래까지 해체했더라면, 사리는 나왔을 지 모르나, 미륵사지 서측석탑은 그 형태를 영원히 복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미륵사의 서측석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그대로 있었다. 서측석탑의 1층 가운데 돌기둥 아래에 구멍을 파고 사리를 봉안한 뒤에 육중한 돌기둥을 덮어서 보호한 것이었다.

 

서측석탑을 오랜 논란끝에 해체보수하기로 결정한 뒤 여러 해에 걸쳐 최신 건설장비를 동원하여 석탑의 돌들을 하나 하나 내리고, 마지막 1층 심초석을 들어내자 꿈속에서도 그리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고이 봉안했던 사리장엄구들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이를 본 모든 문화재관계자들은 기적같은 일에 모두가 황홀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리와 함께 발견된 수많은 장엄구들과 또 미륵사를 세우게 된 내력을 기록한 금동판이 발견되자 상상속에 전설로만 내려오던 미륵사의 창건역사가 세상에 새롭게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미륵사를 창건한 왕이 백제 무왕인 것은 맞는데, 당시의 왕비가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사택적덕의 딸 이라는 기록이 나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과 달라 역사를 다시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화공주가 백제무왕의 비였는지, 왕비였다면 몇번째 왕비였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한 발굴이었다.

 

수많은 보물을 품고 있던 미륵사지 서측석탑과 그 석탑에서 발굴된 각종 보물들은 백제의 문물이 얼마나 세련되고 장엄했던 것인지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해체작업을 한 뒤 하나 둘 다시 해체이전의 상태대로 복원되고 있다.  지금처럼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내년 6월이면 미륵사지 서측석탑은 해체이전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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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