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스리랑카 담바라 이윤옥 기자]
담바라(Cave Temples of Dambulla)에는 거대한 동굴사원이 있다. 기원전 1세기 남인도 타밀족의 공격을 받을 당시의 왕은 이 거대한 동굴로 몸을 피했다. 그러다가 왕권을 다시 찾은 왕은 부처님의 가피를 잊지 않고 이곳 담바라 동굴에 장엄한 사원을 지은 것이다.
담바라는 수도 콜롬보에서 148km 떨어진 곳이지만 기자 일행은 부처님이 두 번째 방문한 스리랑카 최북단 자푸나로부터 중간 중간의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담바라로 이동하는 바람에
콜롬보를 떠난 나흘만에야 어제(4일) 담바라에 도착했다. 담바라 역시 30도를 오르내리는 찜통더위였지만 나무 그늘에 서면 제법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담바라에는 모두 5개의 크고 작은 동굴사원이 있는 데 가장 큰 동굴은 제2동굴로 길이 50미터, 높이 7미터, 깊이 25미터로 동굴사원에 들어서면 끝이 아득할 정도로 넓다. 이 거대한 동굴사원에는 벽마다 부처님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빼곡하고 동굴 속에는 무려 56개의 불상들이 누워있거나(와불), 앉아있거나(좌상), 서있는 모습(입상)으로 가득하여 참배객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든다.
규모로 보면 중국 감숙성의 둔황 석굴이나 천불동 동굴사원과는 견줄 수 없는 작은 규모이지만 둔황 석굴이 각 동굴마다 부처님 한 분을 모셨다면 스리랑카의 동굴사원에는 수십 개의 불상이 한곳에 모셔지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점으로 다가왔다.
스리랑카의 수많은 불교유적지가 인도 타밀족의 침입으로 파괴되거나 온전한 게 없을 정도인데 견주어 담바라 동굴사원의 불상들은 거의 손상을 입지 않은 채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지상과는 먼 산 위에 자리 잡은 까닭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담바라 동굴사원을 만든 때가 기원 1세기 무렵이니 부처가 인도에서 불교를 탄생시키고 난뒤 400년이 흐른 뒤의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서력(西曆)으로 환산하면 2100여 년 전의 일이니 까마득하다면 까마득한 일이 아닌가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기원후 1세기 후한시대였고 이후로부터도 300년이 지안 4세기 무렵에 고대한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을 보면 스리랑카의 불교 역사의 유구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일본의 불교는 백제 성왕 때(552년)일이므로 6세기다.
이렇듯 아직 한ㆍ중ㆍ일에 불교가 전파되기 이전에 인도와 하나의 대륙이었던(2,500년 전에는 하나의 대륙으로 작은 강을 건너면 바로 스리랑카였다고 함)스리랑카에는 부처님 자신이 세 번이나 건너와서 직접 불법(佛法)을 전파했으니 그 기나긴 불교의 역사란 불교의 탄생 그 자체와 함께했다고 봐도 지나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일까? 인도양의 아름다운 보석 ‘스리랑카’는 곳곳이 거대한 불교 박물관이다. 다만 네덜란드ㆍ포루투칼ㆍ영국에 이르는 500년 동안의 식민의 역사와 남인도 타밀족의 끊임없는 침략, 그리고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뒤 겪은 30년간의 내전 등으로 곳곳에 불교 유적지는 파괴가 되어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내일은 스리랑카의 마지막 방문지인 남쪽의 골(Dutch Fort at Galle)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엊저녁 다시 콜롬보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