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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교수의 환경이야기

환경은 생명이다

이상훈 교수의 환경이야기 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의 환경을 말하는 시평 <이상훈 교수의 환경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상훈 교수는 1985년 뉴욕주립대에서 환경과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토개발연구원 수석연구원수원대 환경공학과 교수한국환경영향평가학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특히 2013년부터 2015까지 수원대 교수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고질적인 학내 비리 해결 투쟁에 몸을 던져 일했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투명성기구가 주는 2015 투명사회상을 받았습니다. 이제 이상훈 전 교수는 그의 전문 분야인 환경이야기를 독자여러분께 쉽게 들려드리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추임새 부탁합니다. (편집자 말)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환경이라는 단어는 매우 익숙하다. 환경이라는 단어는 사회의 여러 영역에도 침투하였다. 환경법, 환경행정, 환경외교, 환경경영, 환경음악, 환경미술 등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 것을 보면, 모든 영역에서 환경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환경을 공부한 한 사람으로서 흐뭇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환경이라는 용어의 정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일반인들은 환경이라고 하면 환경오염을 연상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환경을 자연과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환경을 생태계와 관련시킬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환경(環境)유기체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는 너무 포괄적이다. ‘모든 것이라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것이다. 환경법에서는 환경이라 함은 자연환경과 생활환경을 말한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법률적으로는 하자가 없는 정의일지 몰라도 논리적으로 보면 순환 정의이다. 환경을 정의하면서 환경이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환경의 정의는 부분적으로 모두 맞는 정의이며 유용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환경의 정의는 환경은 생명이다라는 정의이다. 지금까지 환경의 정의는 인간과 환경을 구분지어 생각하는 이원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유기체 또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있고, 인간과 구별되는 객체로서 환경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환경은 생명이다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일원론적인 정의가 된다. 인간과 환경이 둘이 아니고 하나로 통한다고 보는 정의이다.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항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져 왔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환경을 세 번 바꾸었다. 처음에는 공동묘지 근처의 마을에서 살다가 시장 근처로 이사하고, 나중에는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갔다. 학교 근처로 이사하자 맹자가 열심히 책을 보더라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의 일화는 인간이 환경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한때 서울의 강남 8학군에 좋은 학원이 많아서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서 8학군에 전세로 이사하기도 했는데, 현대판 맹모삼천이었다.

 

깨끗하고 잘 정돈된 방에 들어가면 기분이 상쾌해지지만, 지저분하고 담배 연기가 꽉 찬 사무실에서는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지리학에서는 자연환경이 인간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환경결정론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간 행동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자연환경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본다.

 

환경결정론에서는 인간의 성품과 문화는 대부분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은 부지런하고 강인한 성격을 가지며,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은 게으르고 낙천적이라는 식의 설명이다. 산세가 좋은 고장에서 큰 인물이 난다는 등의 풍수지리설도 일종의 환경결정론이라고 볼 수 있다.

 

긴 세월에 걸쳐 받아들여진 환경결정론은 1920년대에 환경을 제한 요소로 보는 환경가능론에 의해 수정되었다. 인간은 환경이 부여하는 조건을 각자 다르게 선택하고 받아들이며, 똑같은 환경에서도 다른 품성의 인간이 형성되고 각기 다른 형태의 문화가 만들어진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과학 기술의 발달과 경제 성장에 따른 환경오염이 심각해지면서 환경 파괴론이 나오게 되었다. 주택단지를 만들기 위해 작은 산을 굴착기를 이용하여 평지로 만들어 버리는 건설 현장을 보면 환경 파괴론이 실감난다. 특히 전 지구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오존층 파괴, 지구 온난화, 산성비 등의 지구 환경 문제는 인류의 거주지인 지구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낳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보는 관점은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달랐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구성원을 무생물,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 분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무생물이라는 질료에 생장과 번식을 갖춘 것이 식물이고, 식물의 속성에 추가로 운동과 감각의 능력을 갖춘 것이 동물이고, 동물의 속성에 이성(理性)을 더한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을 식물이나 동물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로 보는 이러한 자연관은 인간의 자존심을 만족시켰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은 서양 철학의 원조격인 플라톤이 이어받고 신약성서의 서간문을 쓴 바울을 통하여 기독교에 흡수되었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을 가진 인간은 영혼이 없는 동식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 보았다.

 

서양의 자연관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원론이다.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은 기본적으로 물리화학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알 수 있는 물질 덩어리이며, 인간만이 물질 외에 영혼이라는 비물질적인 실체를 가진 존재라고 보는 사고방식이 이원론이다. 서양의 자연관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명확하다. 이원론적인 서양 사상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서 자연을 인간의 아래에 두고 인간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전통이 우세했다.

 

과학과 기술이 결합되어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자연에 대해서 인간은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에 영국의 베이컨은 지식은 힘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이롭도록 지식을 활용하라. 자연은 인간에게 순종시키고 정복하는 대상이다라고 주장하여 서양인의 이원론적인 자연관을 대변했다.

 

그러나 동양,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 통한다고 보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역할은 자연을 정복하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에 참여하고 지연과 조화롭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화초를 기르더라도 사랑스럽게 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길러야 화초가 잘 자란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집에서 기르는 가축도 가족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생구(生口)라고 표현하였다. 전통사상에서는 자연은 인간과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며 자연은 동식물을 길러주고 인간에게 삶을 제공하는 고마운 존재이다. 이러한 사상은 천지인(天地人:하늘, , 사람)의 조화를 목표로 하는 전통적인 자연관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각종 원소는 환경의 일부이며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우리가 마시는 물, 우리가 딛고 있는 땅, 이 모든 것이 환경의 일부이다. 내가 태어날 때에 몸무게는 3kg이었다는데, 지금은 63kg이다. 그렇다면 60kg은 어디에서 왔는가? 흙에 뿌리를 내리고 햇빛을 받으며 자란 곡식과 채소, 내가 먹은 육류와 물고기, 내가 마신 물과 내가 호흡한 공기에서 오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환경을 하나의 객체로 보지 않고 내 몸을 이루는 요소라고 본다면 환경과 인간은 그 경계를 긋기가 곤란하다.



 

내가 환경의 일부이고 환경이 나의 일부라고 보는 관점은 일원론적인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원론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면, 환경을 보호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보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환경 문제는 우리가 어느 정도 부유해진 다음에 관심을 가져도 되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환경을 보호한다는 것은 객체로서의 자연을 보호한다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아기를 키우는 부모들이 관심을 가지는 환경 호르몬은 일종의 환경오염물질로서 의학적으로는 내분비계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하는 화학 물질을 말한다. 여러 오염원에서 배출된 화학 물질이 인체나 생태계에 유입되어 마치 호르몬처럼 작용하기 때문에 환경 호르몬이라고 이름 붙였다. 환경 호르몬으로 분류되는 물질은 모두 67종으로, DDT, 말라티온 등의 각종 농약 성분, 절연제와 도료 등에 쓰이는 PCB, 폐기물을 소각할 때 발생하는 다이옥신 같은 독성 물질, 선박용 페인트에 쓰이는 TBT 등이 포함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에 해양 연구소에서 남해안의 소라, 고둥 등을 조사한 결과 암컷에 수컷의 생식기가 생겨 불임이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발표한 후에 환경호르몬이라는 용어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고둥의 불임 원인은 선박에 생물이 달라붙지 못하게 부착 방지제로 칠하는 TBT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환경 호르몬에 대한 연구는 최근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인체나 동물에 흡수되면 생식 기능을 저하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의 학술지 <Human Reproduction>의 보도에 의하면 프랑스 남성의 정자수가 17년 동안 3분의 2로 줄어들었다.

 

이 연구에서 남성 26000명을 조사한 결과 1989년에는 남성의 정액 1ml 당 정자수는 7360만 마리였는데, 2005년에는 4990만 마리로 줄어들었다. 일반적으로 정자 밀도가 5500만 이하로 되면 수태능력에 영향을 주며, 1500만을 밑돌면 불임의 원인이 된다. 이 연구에서는 정자수의 감소 원인으로서 환경호르몬을 의심하였다.

 

새집증후군, 아토피성 피부염 등의 원인도 환경호르몬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산업 발전의 부산물로 환경오염 물질이 발생되어 처음에는 공기와 물과 흙을 오염시키고,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을 죽이고 기어 다니는 곤충을 죽이더니, 이제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생식 작용마저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환경호르몬을 통제하지 못하면 지구 생태계의 생물종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된다. 환경 호르몬은 환경 운동이 생명을 지키는 운동임을 단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환경과 인간과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물고기는 물속의 생명체로서 물의 일부이다. 물이 오염되면 물고기는 죽는다.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치고 다닌다고 해서 물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는 생명을 잃는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환경을 떠나서는 생명 활동을 할 수 없다. 사람은 환경 안의 생명체로서 환경의 일부이다. 환경과 사람을 분리하여 대립한다고 보고서, 환경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환경이 오염되면 사람은 점차 생명을 잃어간다. 환경오염으로 동식물이 죽으면 결국에는 사람도 죽게 된다.

 

우리의 환경은 후손에게서 빌려 쓰는 것이라는 표어가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오염된 땅과 더러운 물 대신에 깨끗하고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물려줄 의무가 있다. 물질 위주의 현대 산업사회는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했지만, 인간의 행복이 정말로 늘어났는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부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도박을 하거나, 인생을 살아가거나, 어느 일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면 실패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환경 문제의 경우에, 얻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만 잃는 것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계산을 잘못하기 쉽다.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잃거나 손해 보는 것은 객체로서의 환경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환경 운동은 달리 말하면 우리 자신과 우리 자손의 생명을 지키자는 생명 운동이다.

 

환경 운동은 물질 위주의 문명을 생명 위주의 문명으로 돌리자는 생명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