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주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그 근거가 될 만한 유물은 아직 발굴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말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고 그의 사리탑이 있게 되어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 때는 200여칸에 달하는 전각들이 있어 대찰이기도 하였으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세종대왕의 영릉을 근처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 삼아 조선시대 불교의 맥을 이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기에 그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한편 신륵사(神勒寺)의 이름에 대한 설화는 남한강의 범람으로 인한 수해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부처님의 가피를 바라는 마음이 표현 된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의 명성을 높게하는 계기가 된 懶翁(나옹) 惠勤(혜근)스님은 고려후기인 忠肅王(충숙왕)7년(1320) 1월 15일에 태어나, 아직 어린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겪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를 겪은 뒤 20세 되는 해 공덕산 妙寂庵(묘적암)으로 了然(요연)선사를 찾아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얼마동안 요연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던 나옹은 요연선사와의 선문답으로 인가를 받고 요연선사로부터 더 큰 깨달음을 위하여 보다 나은 스승을 찾아 나설 것을 권유받고 만행에 나서기도 하였다.
나옹은 요연선사를 하직하고 4~5년 동안 명산대찰을 편력하다가 충숙왕(忠肅王) 5년(1344) 양주(陽州) 회암사(檜巖寺)에 이르러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용맹정진 수도하다가 일본에서 온 석옹(石翁)화상의 물음에 게송(偈頌)으로 답한 뒤 더 높은 경지를 터득하기 위하여 마침내 충목왕(忠穆王) 3년(1347) 11월 원나라로 구법 유학을 떠났다. 다음해 3월 원의 수도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 이르러 이곳에 머물던 인도에서 온 당대 최고의 스님 지공(指空)화상을 만나,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다.
처음 만나 지공과 나옹의 선문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과 물 대지(大地)…이 모든 것 눈 앞의 꽃이요
삼라만상(森羅萬象) 또한 그러하네
자성(自性)의 본래 청정함을 비로소 알았나니
한 티끌과 티끌, 나라와 나라가 바로 진리의 왕(法王身)이었네
나옹의 선시를 들은 지공(指空)은 “저 서방지역(印度)에 20등급의 인물(달마以前 28祖師)이 나오고 동방지역으로 와서는 72등급의 인물들이 배출됐다. 이중 나도 한 등급을 차지한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은)여기 또 있을 수 없다.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는 세상에 출현한 진리의 왕이니 다시 어디에 (나 같은)스승이 있겠는가”라고 답하니 다시 나옹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진리의 왕, 진리의 왕이시여
우주의 주인공이 되어 뭇 백성들을 이롭게 하시도다
1천 칼을 뽑아 부처와 조사를 베니
1백 태양이 두루 온 하늘을 비추네
내 지금 이러한 소식을 알고 나니
마치 내집에서 정혼(精魂)을 희롱함과 같네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부상(扶桑)의 해와 달이 서녘 하늘을 비추네"
이렇게 거침없이 답하자 지공은 마침내 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승 指空(지공)과의 선문답으로 인가를 받은 나옹(懶翁) 혜근(惠勤)은 그 깨달음의 덕이 퍼지게 된 후, 원나라 황제로부터 고승으로 추앙받아 금란가사(金襴袈裟)를 수여받고 고려로 돌아왔다. 이때는 고려 공민왕 7년(1358)년 이었는데, 나옹은 돌아와 오대산 상두암에 들어가 주석했다. 이에 공민왕은 고승으로 추앙받는 나옹을 궁중으로 모셔와 설법을 청하였으며, 설법을 듣고난 공민왕은 나옹화상의 덕을 칭송하며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水晶佛子)를 바쳤다.
나옹(懶翁)은 고려로 귀국한 뒤에 공양왕으로부터 왕사로 지극한 대우를 받으며 수도하였다. 또 홍건적이 침략하여 위급한 때를 당하여 공민왕은 개경을 버리고 피난하였으나, 나옹은 신광사에 머물며 홍건적의 두목에 조금도 두려움 없이 태연자약하며 그들을 맞이하니 그들이 오히려 침향(沈香)을 바치며 정중히 예를 다하고 물러났다.
나옹화상의 덕이 널리 퍼지자 원나라 태후(太后) 역시 나옹에게 금란가사를 선물하고, 국사와 왕사를 배출한 동방의 으뜸도량인 송광사에 주석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한동안 나옹은 송광사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옹은 송광사가 지공화상이 지적한 ‘산이 셋 있고 두 강물이 흐르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회암사로 돌아왔다. 회암사로 돌아온 나옹은 지공화상의 영골과 사리를 절의 북편 봉우리에 탑을 세우고 안치했다.
그런 뒤 1374년 공민왕이 23년 재위 후 서거하자 왕의 빈전에 나아가 분향하고 설법을 베풀고 조정에 올리는 글과 함께 왕사의 관인을 반납했다. 나옹은 우왕이 즉위한 뒤에도 왕사로 봉해지고, 왕명으로 밀양 영원사로 가는 도중 신륵사에 머물다가 열반하게 되었다. 그의 세속나이 57세요 법랍 37이었다. 이에 따라 나옹(懶翁)은 신륵사에서 다비식을 거쳐 수습한 사리를 신륵사 현재의 위치와 회암사에 나누어 봉안하게 되었다.
그뒤 신륵사에는 나옹(懶翁) 혜근(惠勤화상의 사리탑인 석종을 세웠고, 그 옆에 그의 행적을 기록한 석비 그리고 석종의 앞에는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조각된 석등이 들어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