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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을 뽑아 발표하였다.

 

정용기(1862.12.13~1907.9.2) 선생은 경북 영천 출신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략 책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고종은 시종관(侍從官) 정환직을 불러 의병을 일으킬 밀지(密旨)를 내렸고, 부친 정환직은 고종의 밀지를 받들어 그날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친 정환직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 1906년 1월경 ‘영천창의소’를 설치하고,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일본인들이 들어와 문명과 종사가 무너지는 것이 을사 5적들 때문임을 지탄하고, 충성심 있는 의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역적들과 왜적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대한독립만세의 기치를 들고 모두 함께 의병으로 나설 것 등을 호소하였다.

 

 

1906년 영남지역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이 모였으며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진호를 ‘산남의진(山南義陣)’으로 정하고 부대를 편성하였다. 선생은 신돌석 의진과 연합작전을 펴기 위해 진군하던 중 경주 진위대 간계로 대구감옥에 수감되어 4달 동안 고초를 겪고 석방되었다. 그 사이 선생의 구속으로 구심점을 잃은 병사들은 상당수는 떠나버렸고, 남은 군사들도 사기가 크게 떨어져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4달 동안의 고초와 시달림으로 몸을 안정시키고 있던 때에 대구에서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경북지역에서도 고령ㆍ성주ㆍ김천ㆍ상주 등 여러 지역에서 여러 관련 단체들이 조직되어 동참하였다. 영천지역에서는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가 조직되었으며 선생은 회장으로 취임하여 영천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1907년 4월에 선생은 의진을 다시 결성하여, 청하ㆍ영천ㆍ청송 등지로 진군하면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관동으로의 북상 준비 및 각 지대와의 연락을 위해 각지로 의병들을 파견한 뒤, 본진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청하군 죽장으로 이동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1907년 9월 주요 의병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선생이 전사한 뒤 부친 정환직이 의진 총수를 맡았으나 일본군 영천수비대에게 잡혀 대구로 압송 중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