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우리는 대체로 학교교육을 받으며 정답은 하나뿐이라는 시험제도 아래에 성장했다. 사회인이 되고서도 무슨 자격시험이나 진급시험 같은 것을 치르면서 대체로 모두가 시험관 손아귀에 쥐여 있는 정답지와 일치하는 답안을 적어내지 못해 안달하게 되었다. 그 정답을 바로 맞혀내야만 그런대로 앞길이 트이게 될 판이니 그중에는 간이 크게 “커닝(훔쳐보기)”도 서슴지 않는 일부 “인사”들도 더러 생겨났다.
또한, 텔레비전의 “알아맞추기”같은 프로에서도 참가자들이 사회자의 구미에 맞는 대답을 하면 “딩동댕― 정답! 맞췄습니다. 축하합니다.”하고 박수를 받게 되지만 일단 한마디라도 어긋난 말을 하게 되면 단마디 명창 “땡!”하고 탈락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세상의 문제들은 정말 정답이 하나뿐일까. 모두가 “하나!” 하는데 누군가 “둘!” 하면 정말 맞아 죽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 모두가 러시아생물학자 파블로프의 “조건반사학설”에 잘 길들어진 강아지들처럼 일단 “호르륵―” 호각소리가 울리면 일제히 먹이구유를 향하여 죽기 살기로 뛰어가야만 하는 것일까.
문학예술이나 신화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은 희랍신화에 나오는 뮤즈가 시의 여신인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뮤즈가 뮤즈들인 것, 곧 시의 여신이 하나뿐인 것이 아니라 아홉 명이나 되며 뮤즈는 다만 이들 아홉 여신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인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 아홉 명의 여신들을 각기 호명하여본다면 다음과 같다. 서정시의 여신 애거니피데스, 서사시의 여신 칼리오페, 연애시의 여신 에라토, 찬양시의 여신 폴리힘니아, 역사시의 여신 클리오, 비극시의 여신 멜포메네, 목가시의 여신 탈리아, 무용시의 여신 테르프시코라 그리고 천문시의 여신 우라니아이다. 이들은 모두 희랍 중심부의 보에오티아에 있는 성산 헬리콘(Helicon)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 헬리콘산 기슭에는 누구나 한번 마시면 시적 영감을 얻는다는 시의 샘 애너니프가 있어 그녀들은 이 샘물을 마시고 시적 영감이 샘솟는 시의 여신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각기 자기의 잣대로 시를 평가하였다. 이 시의 여신, 아홉 뮤즈들이 살고 있는 산― 헬리콘은 곧 시작품의 우열을 가늠하는 상징이 되었는데 문제는 한편의 시작품을 두고 각기 다른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한 작품에 대한 평가가 각기 다르다니? 정답은 하나뿐이어야 하는데 결국 하나뿐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O이고 또 저렇게 보면 X라는 말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어찌 정답이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와서 학계에서는 이 헬리콘산 뮤즈들의 방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문예사조를 형성하자는 “네오―헬리콘시학(Neo―Helicon Poetics)”이 대두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사실주의, 랑만주의, 고전주의, 상징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과 구조주의, 해체비평등 다양한 방법과 이론에 의해서 여러 가지 시각으로 진행되어 온 연구에서 이제부터는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원심력으로서의 연구방법의 진행과정으로 종합하여 하나로 부르자는 견해다.
곧 헬리콘산의 시의 여신 뮤즈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작품을 파악했듯이 문학적 연구도 연구자 각자에 따라서 다르게 진행될 수 있으며 이것을 통칭하여 “네오―헬리콘시학”이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정말 하나의 작품에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식의 평가를 내려도 괜찮을까? 정답은 하나여야 하는데 이렇게 답이 엇갈려도 괜찮다는 말일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깊이 잠든 마음을 깨우자》라는 책을 쓴 미국의 실업가 뤄쟈 프 잉겔이 원형(A), 반원형(B), 불규칙한 초생달도형(C)과 삼각형(D) 등 네 도형을 두고 “이 네 도형 가운데서 기타 세 도형과 부동한 도형을 찾으라.”는 재미있는 문제를 낸 적이 있다.
그런데 정답은 A, B, C, D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여도 옳은 것이 된다. A는 유일하게 각이 없는 도형이니 정답이고 B는 유일하게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도형이니 정답이고 C는 유일한 비대칭도형이니 정답이며 D는 유일하게 직선으로 이루어진 도형이니 정답이라는 것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도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이런 사고방식이 우리들에게 어떤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들은 살면서 이런 얼렁뚱땅하고 시시비비가 엇갈리는 경우와 자주 마주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일례로 고혈압 환자에게 언제는 돼지비계 같은 동물성 고기는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던 것이 이제 와선 육류섭취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건강에 문제가 생겨 병이 악화할 수 있기에 고기를 먹으라는 식이거나 심장병 환자들에게 ‘술은 절대 금물이다.’라고 엄포를 놓다가도 술을 조금씩 먹어야 혈액순환이 잘되어서 치료에 도움이 된다든지 할 때는 도대체 어느 말을 따르고 어느 것을 택하여야 할지 어리벙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곧 오늘 모든 것이 빠른 변화를 가져오는 현시대에 와서 기존 확고부동하게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의미가 없어져 한동안 당황할 때 이와 같은 “네오―헬리콘시학” 혹은 “뤄쟈 프 잉겔문제”의 사고방식은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일깨움을 줄 것이다.
드팀(틈이 생기어 어긋나는 것) 없는 정설로 믿어왔던 뉴톤의 고전물리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여 휘청거린 것은 지난 세기의 이야기이고 현재는 이미 전자매체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원시와 문명, 원거리와 근거리, 지구와 외계 등 양분법이 무의미해진 “글로컬리즘(Glocalism 世邦主義)”시대에 진입하였다. “진리도 실천의 검증을 받으라.”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만고불변일 것 같던 진리도 검증을 거쳐 새롭게 바뀌고 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판단능력도 이에 따라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와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그래 좋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문제의 정답이 하나뿐이 아닌 것은 알 것 같은데 그러면 도대체 어느 장단을 맞추란 말인가. 여기서는 “쿵더쿵 쿵덕!” 굿거리장단인데 저기서는 “딴따딴따 딴따따―”휘모리장단이다. 낚시에 걸려든 붕어처럼 눈알이 히뜩 번져지고(뒤집어지고) 지붕 위에 매단 팔랑개비처럼 고개가 팔랑팔랑 마구 돌아갈 것만 같다. 그렇다. 여기까지! 우리의 혼돈은 여기까지면 이미 족하다. 남의 장단을 따르려 하지 말고 제 장단에 춤춰라. 그렇다! 제 장단에 춤추기, 제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비로소 신명이 나서 저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거려지고 팔다리가 너펄거려질 것이 아닌가.
각자가 내 마음의 정답을 풀 때, 우리는 비로소 제 장단을 두드리게 될 것이다. 정답, 그것은 하나뿐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