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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흑해, ‘검은 바다’가 아닌 ‘터키 북쪽 바다’

1099년 십자군,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무슬림 7만 명 죽여
<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2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조지아 제2의 도시 바투미로 이동하는 날이다. 우리는 트빌리시에 도착했을 때 바투미로 가는 기차표를 예약해 두었다. 기차는 트빌리시역에서 아침 10시 30분에 출발하는데 거리는 381km, 5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숙소에서 나와 가방을 끌고서 버스 타는 곳까지 걸어갔다. 버스를 타고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이동한 뒤에 지하철을 타고 트빌리시역으로 갔다. 보통의 여행객이라면 숙소에서 택시를 타고 직접 역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순례자이고 사람들을 만나 생명탈핵을 전파해야 하므로 대개는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버스 안이나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준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하였다. 기차에는 2층 칸이 있었고 시설이 깨끗하고 쾌적했다. 나는 안사리의 책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을 꺼내어 십자군에 관해서 읽었다. 궁금한 사항은 손말틀(휴대폰)로 인터넷을 검색하여 확인하였다. 안사리는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내가 세계사 교과서를 통하여 배운 것과는 다르게 설명을 하였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인의 성지이면서 동시에 이슬람의 성지이다. 예루살렘이 무슬림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함마드가 이 도시에서 자신이 하늘로 잠시 올라가는 환상을 보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2대 칼리프인 우마르가 638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후 오랫동안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 아래 있었다.

 

역사가들이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중세는 유럽 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던 5세기부터 기독교가 사회를 통제한 15세기까지의 1,000년을 말한다. 이 시기에 유럽 인구의 대부분은 가난한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노예는 아니었지만, 식량을 생산하기 위하여 새벽부터 밤까지 힘들게 일하였다. 농민들은 성직자와 기사들까지 먹여 살려야 했는데 농업 생산량은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1세기 어느 때부터인가 사소한 기술 혁신이 축적되어 농산물의 생산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첫째는 새로운 쟁기의 발명이었다. 당시 사용하던 나무 쟁기의 끝에 철을 덧댄 묵직한 쟁기를 누군가 발명했다. 새로운 쟁기로 고랑을 더 깊게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숲을 개간하여 농토가 넓어졌다. 둘째는 말의 가슴걸이 발명이었다. 이전에는 멍에는 소에게만 씌울 수 있었는데, 누군가 멍에를 변형시켜 말에 씌울 수 있게 만들었다. 말은 황소보다 50% 빨리 밭을 갈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아졌다.

 

셋째는 삼포작 방식의 도입이다. 매년 연달아 농사를 지으면 토양이 척박해지기 때문에 농부들은 농경지를 반으로 나누어 작물을 심고 나머지 반은 땅을 묵혔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농경지를 2년에 한 번 쉴 필요가 없이 3년에 한 번 쉬어도 토양의 비옥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1/6 늘어났다.

 

농업의 생산성이 높아지자 잉여농산물을 교환할 시장이 생기고 수공예품이 시장에 나오고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화폐 사용이 활성화되고 상인이 나타나고 부자가 생기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럽의 부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인 팔레스타인까지 순례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순례자들은 예루살렘 성지에서 지배자인 무슬림들에게서 푸대접을 받고 모욕과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였다.

 

순례자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지자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클레르몽이라는 프랑스 수도원에서 열띤 연설을 했다. 교황은 예루살렘에서 튀르크족을 쫓아내자고 신자들을 충동했다. 교황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유럽인들이 십자가 모양의 붉은 천 조각을 달아서 성전(聖戰)의 상징으로 삼자고 제안했고, 이것이 십자군의 시작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2세기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슬람과 십자군은 모두 8번 충돌하였다. 1099년 십자군이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대학살이 일어났다. 영국의 역사가 기번에 따르면 십자군은 이틀 동안에 예루살렘의 무슬림 7만 명을 죽였고 유대인들도 모두 죽였다. 정교회 소속 기독교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모두 추방되었다. 승리를 거둔 십자군은 이 지역에 4개의 작은 십자군 국가를 세웠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88년이 지난 1187년에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는데, 살라딘은 십자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사리의 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살라딘은 도시를 평화롭게 양도하라는 제안서를 보냈다. 그 대신 떠나고자 하는 기독교도는 재산을 챙겨서 떠날 수 있고, 혹은 남고자 한다면 예루살렘에서 탄압받지 않고 그들의 종교를 믿을 수도 있고 기독교 성소들은 보호받을 것이며 순례자들은 얼마든지 오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투항을 거부했고 살라딘은 도시를 포위하고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점령한 뒤에 학살이나 약탈은 없었으며 모든 시민은 몸값을 받고서 풀어주었다.”

 

십자군 전쟁을 유럽의 사가들은 두 문명 간의 충돌이라고 묘사하지만, 아랍의 사가들은 십자군 전쟁을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엄청난 싸움이라고 보지 않았다. 우선 아랍 사람들은 십자군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아랍인들은 ‘프랑크인들의 침략’이라고 표현하였다. 프랑크인(Fracs)이라는 말은 유럽 사람들을 지칭하는 보편적인 단어인데 특히 프랑스인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무슬림들은 프랑크를 야만인으로 보았다. 프랑크에게서 문명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십자군은 팔레스타인 서부 해안에 사는 무슬림에게는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바그다드나 메카, 또는 메디나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국경 전쟁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십자군은 어차피 실패한 전쟁이었으므로 무슬림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아랍에서 처음으로 십자군에 관한 역사가 쓰인 것은 놀랍게도 1899년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멸망한 뒤에 유럽의 식민 열강이 중동을 지배하게 되면서 식민 교육을 통해 십자군 전쟁이 “중동에 문명을 가져다 주기 위한 영웅적인 전쟁”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십자군에 관하여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확인하다 보니 시간이 빨리 갔다. 오후 3시 30분에 기차는 바투미 역에 도착하였다. 바투미 역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있었다.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우리는 흑해(黑海) 바닷가 길을 걸어서 숙소로 향하였다. 흑해는 면적 436,402㎢로서 한반도의 2배 크기이다. 최고 수심은 2,000m를 넘는다. 왜 흑해라는 이름이 생겼을까?

 

 

 

흑해를 영어로는 Black Sea라고 하는데, 내가 걸으면서 보기에 바다 색깔이 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나라 동해처럼 맑지는 않아도 서해처럼 탁하지도 않았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두 가지 설이 소개되어 있다. 첫째는 통설이라고 볼 수 있는데, 흑해에는 황화수소가 바다 밑에 포화되어 있어서 물의 색깔이 검게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터키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터키어로 흑해는 Karadeniz(검은 바다)라고 하는데,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터키에 진출하고 나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여기서 검다는 뜻의 'kara'는 단순히 검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튀르크족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검은색은 '북쪽'을 상징한다. 지중해는 터키의 서쪽에 있는데, 바다 색깔이 흰색도 아닌데도 Akdeniz(흰 바다)라고 부른다. 여기서 흰색(ak)은 전통적으로 색깔이 아니라 서쪽을 가리킨다.

 

터키의 많은 지명에는 kara와 ak이 붙는다. 예를 들어 흑해 인근의 도시인 삼순(Samsun) 근처에 있는 호수인 악괼(Akgöl)과 카라괼(karagöl)은 호수 위치가 삼순 기준으로 각각 서쪽과 북쪽에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을 뿐 '흰 호수', '검은 호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튀르크인은 오방색을 방향과 연결 짓는데, 오방색은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와 똑같은 방향과 연결된다. (참고로 음양오행에서 오행은 5가지 방향과 5가지 색깔과 연결되는데, 동은 청색, 서는 백색, 남은 적색, 북은 흑색, 그리고 중앙은 황색과 연결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터키는 동양의 유목 민족인 튀르크(돌궐)에서부터 기원하므로 이러한 해석에는 근거가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터키 북쪽에 있는 바다를 지칭하는 karadeniz라는 단어가 유럽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와전되어 ‘북쪽에 있는 바다’가 ‘검은 바다’가 되고 말았다는 설명이다.

 

우리는 흑해 해안 길을 4km쯤 걷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갔다. 바투미에서의 숙소도 병산이 에어비앤비를 통하여 예약해 두었다. 해안가의 고층 아파트 건물에 있는 숙소였는데, 흑해가 가까이 내려다보이고 작은 베란다가 딸린 좋은 숙소이었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한 뒤에 병산이 저녁밥을 간단히 만들어서 함께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