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여느 때처럼 새벽에 일어나 인터넷을 검색하여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아보았다.
아타튀르크는 1923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뒤 본격적으로 정교(政敎)분리를 기본으로 한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오랫동안 터키에서는 정치 지도자인 술탄이 종교 지도자인 칼리프를 겸하는 정교일치 국가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그는 술탄제를 폐지하고 칼리프는 오직 이슬람 종교만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슬람 종교도 개혁의 대상이었다.
그는 터키 공화국의 기본 정신인 세속주의를 법으로 제정했다. 이슬람 율법에 기초한 모든 수도원과 교단을 폐쇄했다. 그는 “과학은 삶의 가장 믿음직한 안내자다”라고 말했는데, 종교적인 교육 체제를 폐지하고 현대식의 탈 종교적인 학교들을 설립했다. 오스만의 모든 법체계가 현대화되었으며 새로운 민법과 형법이 채택되었다.
그의 개혁정책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변화시켰다. 여성의 교육권을 보장하여 남녀평등 교육을 시행하였으며 민법을 개정하여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였다. “여성도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히잡 금지령을 도입하였다. 오랜 전통인 히잡을 강제로 금지하기에는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그는 고민 끝에 기발한 방법을 고안하였는데, “모든 매춘부는 어디서나 반드시 히잡을 착용해야 한다”라는 조항을 법안에 삽입하였다. 그리고 공무원에게는 히잡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많은 터키 여성들이 불편한 히잡을 벗어버렸다.
무슬림 남자는 기도할 때 모스크에 일렬로 서서 이마를 땅에 댄다. 이때 옆 사람과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 테두리가 없는 모자인 페즈를 착용한다. 이 페즈는 옥외에서 뜨거운 햇빛을 가릴 챙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그가 서양식 모자를 쓰라는 ‘모자 착용법’을 도입하자 우리나라에서 개화기의 단발령 반대처럼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는 개혁을 밀고 나갔다. 그밖에도 이슬람 달력인 하즈라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채택했다. 한 주일의 휴일을 금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꾸었다. 댄스, 무도회 그리고 그 밖의 남녀가 함께 즐기는 오락들이 권장되었다.
1928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터키 공화국의 국교는 이슬람교다.”라는 조항을 지우고 이슬람인 국민과 비이슬람인 국민 사이의 차별을 금지하였다. 또한, 어려운 아랍 문자를 빌려 쓰던 터키 문자를 폐지하고 로마자 표기법을 채택하여 문맹 타파에 이바지하였다. 1930년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였는데, 이것은 같은 이슬람 국가들로서 이란(1964년), 이집트(2008년), 사우디아라비아(2015년)에 견주면 엄청 빠른 것이다.
1933년 성(姓)의 사용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국회는 그에게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수여했는데 이후 그는 ‘케말 아타튀르크’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전까지 터키 사람은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한 동네에 같은 이름이 여러 명 있었다.)
경제 분야에서 민족 경제 정책을 추구한 그는 외국인의 모든 상회와 기업들을 국유화했다. 그는 정치, 법률, 문화 분야에서 여러 개혁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였으나 그 영향은 관료들과 도시의 소수 부유층에 그쳤다. 과거의 농업적 질서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가난한 농민들에게 생활의 변화는 느렸지만, 차츰차츰 세속주의는 전 국민에게 전파되었다. 현재 터키는 중동 지방에서 가장 세속화되고 근대화된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그는 42살인 1923년에 라티페라는 여인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는 일에만 몰두하고 한가한 시간에는 술을 즐겼다. 가정적이지 못했던 그는 2년 만에 결혼을 포기하고 이혼한 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독신으로 사는 동안 그는 13명의 자녀(아들 하나 딸 12명)를 입양했는데 그 가운데 8명이 고아였다. 그는 마지막 해를 중병으로 보냈는데 과로와 과음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아타튀르크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서 다음과 같은 유서를 작성했다. "모든 재산은 인민당에 기증할 것이며,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여동생 막볼레와 다섯 명의 딸(양녀)들에게 적당한 생활비를 기증하라." 그는 1938년 11월 10일 이스탄불에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죽었는데, 돌마바흐체 궁전의 모든 시계는 그가 죽은 시간인 아침 9시 5분을 가리키며 아직도 멈춰있다. 그는 죽기 전에 “나를 위한 기념관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는 터키의 국부인 아타튀르크와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을 비교해 보았다. 케말은 신생국 터키를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15년 동안 강압적 수단과 공포 정치를 동원했다. 그는 새로운 개혁정책을 “혁명적으로 실행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옛 체제에 향수를 느끼는 술탄과 칼리프들을 끊임없이 감시했고, 반대당을 해산시켰으며, 언론을 검열하고, 반정부적 언론사는 가차 없이 폐간시켰다. 그는 소수 민족인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해 반란 지도자들을 공개 처형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나라 국부들의 사후에 드러난 부정부패와 친인척 문제, 정적 암살과 민간인 학살, 개인의 신격화 같은 문제에 대해서 조금도 비난의 여지가 없었다.
이승만은 아타튀르크처럼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총을 들고 싸운 것은 아니다. 그의 독립운동은 미국을 등에 업은 외교 활동이었다. 아타튀르크는 처음부터 혁명을 위해서는 독재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15년 동안 일당독재를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헌 헌법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명시하였지만 사사오입 개헌을 했고, 3.15 부정선거를 하다가 4.19 학생혁명으로 물러났다. 그는 친일파를 중용하여 공산주의를 막으려고 했기 때문에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맹목적인 반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제주4.3항쟁, 여수ㆍ순천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 등 죄 없는 양민들이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는 김구 선생 등 정적 암살을 묵인하였다. 아니 암살을 지시했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북한과의 이념 대립은 결국 6.25 남침이라는 비극적인 전쟁을 초래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본인은 서울을 떠났는데, 국민에게는 안심하라고 거짓 방송을 하게 한 뒤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2019년 시사IN이 발표한 역대 대통령 신뢰도 조사에서 이승만은 2.5%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터키에서는 현재 모든 화폐에 아타튀르크가 새겨져 있으며 국부로서 존경받고 있다. 1951년, 일단의 이슬람 복고주의자들이 아타튀르크의 동상을 파괴하자 터키 국회는 ‘제5816호법’(형법의 제5816조를 말함)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아타튀르크를 모욕하거나 그를 상징하는 물건 혹은 건물을 파손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을 담고 있으며 아직도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결국, 아타튀르크도 공포정치를 했지만, 이승만과 달리 권력을 개인을 위해서 쓰지 않았으며, 오로지 개혁을 위해서만 썼다. 또 정적을 암살하는 일도 양민들이 학살되는 일도 아타튀르크 정권에서는 있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가까운 식당에 가서 아침 식사를 했는데 식당 주인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었다. 아침 식사 메뉴에 무려 여섯 종류의 치즈가 나왔고 요구르트까지 있었다. 식당 주인은 우리가 식사하는 모습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친절한 주인은 식후에 터키에서는 매우 드문 원두커피를 우리에게 무료로 대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