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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언택트와 온택트, 그리고 세종 때의 강경과 제술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48]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믿음이 소중한 시대

 

‘코로나 19’ 사태는 단순히 사회적 변화가 아닌 시민의식, 경제 활동 등 전 영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근접공간학(Proxemics)》에서 인간관계의 공간을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친밀한 공간, 개인적 공간, 사회적 공간, 공적인 공간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공간'은 '거리'가 된다. 가령 친밀한 거리는 46㎝ 이내로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다. 연인이나 가족 이외에 허락 없이 누군가 그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본능적 거부감이 드는 거리다.

 

개인적 거리는 46~120㎝ 이내로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로 평소 호감을 가진 지인들과의 관계다. 사회적 거리는 120~360㎝ 정도의 거리로 일로 만나는 관계인 2m 안팎이 여기에 속한다. 공적인 거리는 강연이나 행사 등 360㎝ 이상의 거리로 이성적 영역이다. (백영옥 참고)

 

온택트(연결) 시대

 

'코로나 19'가 발생하면서 이미 언택트(untact, 비대면)가 전반적인 산업에 문화로 스며들고 있었으나 이제는 다시 새로운 온택트(ontact) 시대가 오고 있다.

 

온택트(Ontact)란 온라인을 통한 외부와의 ‘연결on’을 더한 개념이다. 언택트에 연결이라는 개념이 더해진 연결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기존 언택트는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 일을 수행했으나 이제는 간접적으로 만나는 온택트다. 온(on)이라는 것은 연결을 얘기하는 것이니 상대를 떨어져 보거나 화면으로 보거나 하는 간접 보기이다. 몇 가지 예를 보자.

 

가) 드라이브 스루 (drive through)

나) 온라인을 통한 전시와 온라인 공연(학업은 기존부터 있었으나 여러 수강생이 동시에 등장하는 실시간 화면도 나타나고 있다)

다) 격리생활에 지쳐 온라인으로 외부와 연결하여 쌍방향으로 활동하는 문화가 증가한다.

 

채용시장에서 언택트 채용이 화두가 되고 채용도 정기적인 채용이 아닌 필요한 때 필요한 인원을 보충해 가는 부정기 채용 방식이 늘고 있다. 각종 금융시장에서도 언택트 관련주가 급등하고 있다. 각종 금융서비스도 언택트 서비스가 시행되고 있다. 그간의 경향을 보면 가) 빅데이터 보고서에 따르면 언택트 관련사 언급량이 3배 증가했다. 나) 재택근무에 대한 언급이 올해 3월 이후 급증했다. (이노션 자료)

 

편의점, 카페 등에서 나왔던 언택트 활용이 이제는 전 분야에서 사용이 되고 있다. 거리는 유지하되 일상을 영위하고 사회를 정상 운영하기 위해 언제든 서로를 원활히 연결하는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온택트가 보편화하는 뉴노멀(시대 변화에 따라 새로 부상한 표준) 시대에 접어들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훨씬 먼 미래로 생각했던 디지털 온라인 시대가 더욱 가속화되고 우리의 삶도 바뀌어 간다. 그런데 이러한 온택트 시대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믿음[信]이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 모 대학 시험에서 커닝이 나타났다. 그리고 재택근무도 일을 열심히 하는지 어떤지가 일의 결과물로 나타나기는 하겠지만 성의 있게 일하는지 아닌지는 상호 신뢰의 문제로 남게 된다.

 

이렇듯 사회란 인간성의 구성과 사회적 신의가 중요하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세종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세종 조에서 가) 인재를 뽑는데 학문이냐 인간성이냐 또는 학습이냐 응용 제술이냐에 대한 대면과 비대면 방식 논의가 있었고 나) 시장에서 화폐의 사용이 믿음에 근거한다는 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강경(講經)과 제술(製述)

 

 

문과의 초장에서 사람을 뽑는데 강경하느냐 글을 쓰게 하느냐는 인재선발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구술ㆍ면접시험인 ‘강경’이란 과거시험에서 경서(經書) 가운데 어느 구절을 지정하여 외우고 설명하게 하는 것이다. 논술 방식인 ‘제술’이란 시나 글을 짓는 것을 말한다.

 

허조는 "제술은 능하되 강경에 부족한 자가 있게 마련인데, 강경에서 떨어지면 제술에 능한 자는 평생 재주를 펴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제학 변계량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는 "(강경으로 인해) 학생들이 한갓 읽고 외우는 것으로만 업을 삼고 있다"며 "강경은 시험관과 응시자가 대면하게 되는데 어찌 사심(私心)이 없겠느냐"면서 공정성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좌의정 황희ㆍ우의정 맹사성 등 16명은 ‘한쪽에 치우치거나 폐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며 번갈아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 호조판서 안순 등 51인은 ‘제술만 사용’을, 집현전 교리 권채 등 15명은 ‘강경만 사용’을 주장했다.

 

세종은 “제술을 시행하고자 한 다수 의논에 좇으라"라고 했다.

 

▪ 강경과 제술: (변계량이 문과의 초장에 강경하는 것의 불가함을 상서하니 제술을 위주로 하게 하다) 소위 어떤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쉬운 글[文]을 시험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통하기 어려운 뜻[義]을 시험하여, 사사로운 정의(情意)에 얽매여 몽롱하게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는다고 말하는 것은 대개 거짓말이 아닙니다.

 

이제 대면(對面)한 자리에서 합격시키고 떨어뜨리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말하기를, ‘대면한 자리에서 붙여 주고 떨어뜨린들 또한 어찌 사정(私情)이 용납될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10/4/23)

 

▪ 제술 : 변계량의 상서(上書)에 따라 강경(講經)은 없애고 오로지 제술(製述)만 쓰기로 하였으니, 장차 어떻게 처리하면 옳겠는가. (《세종실록》11/6/2)

▪ 강경 : 임금이 말하기를, 강경은 대면(對面)하여 사정(私情)을 쓰는 폐단이 있다. 그러므로 옛적에 권근은, ‘이것이 좋지 못하다.’ 하였고, 근년에 변계량도 좋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는데, 다만 박은(朴訔)이 강력히 태종께 말씀을 드리어 마침내 강경하는 법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세종실록》12/10/25)

 

▪ 강경과 제술 : 신의 생각으로는 강경이란 기억하고 외는 것뿐이요, 제술은 문장에만 힘쓰는 것이니, 성인의 성명도덕(性命道德)의 학문이 아닙니다. 역대에서 인재를 시험보이는 데에 모두 제술의 제도를 썼고, 또 명경(明經)의 과목이 있었습니다. 만일 경학(經學)과 역사에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리 기억하고 외는 공부를 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이치에 통달하며 사리를 알게 되는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베껴 모으는 것만 일삼고 실제의 학문에는 힘쓰지 않는 것이 오늘날에 있어서 큰 폐단이 되고 있사옵니다.

 

제술로 시험을 보이는 데도 오히려 ‘집에서 찰밥을 먹어도 과거에 이름이 오를 수 있다.’라는 비난이 있는데, 더구나, 면대(面對)하여 강경을 실시하는 데에 어찌 정실이 없다고 할 수야 있겠습니까. ... “이것은 사실 폐단이 있는 방법이다. 내가 다시 연구하여 시행하겠다." (《세종실록》 12/10/25)

 

세종의 말씀이 인재를 뽑는데 사적인 인정이나 연고가 작용하지 않고 그 사람됨을 보고 고른다는 ‘신뢰’의 원칙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대면과 비대면 방식의 차이에 따른 논의인 것이다.

 

믿음’이란 나라 경제를 좌우하고 시장에서도 필요한 사회적 약속이 된다.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믿음[信]을 보이는 것

 

믿음[信]을 보이는 것 : 전날에 돈과 저화를 겸용할 것을 정부와 육조에 널리 물어서 시행하게 하였는데... 참찬 탁신(卓愼)에게 뜻을 물으니, 전날 포폐(布幣)를 쓸 때에... 백성이 편안하게 여겼사오니... 전날에 저화를 백성이 매우 싫어하였는데, 이를 금방(禁防)하는 법을 엄격하게 세워서 어기는 자는 죄로 벌을 주게 되니, 백성들이 곤란을 겪게 되어 그 폐해가 적지 않았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처음에는 저화를 보물로 삼아 그것을 쓰게 하였다가, 이제 와서 오로지 돈만을 쓰게 하고 그것을 헛되이 버리게 된다면, 백성 중에 저화를 가지고 있는 자가 어찌 근심하고 한탄하지 아니하랴. 민간에 돈을 주고서 저화를 거둬들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저화는 많고 돈은 아직도 적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세종실록》7/4/14)

 

세종의 노력에도 조선 초기에는 돈의 분량, 저화와 동전의 겸용의 불편과 가치 변동, 돈의 시세 변화 등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한 시대가 포용할 수 있는 제도의 한계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장을 통해 백성과 만나는 경제 제도는 믿음에 근거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할 수 없는 진실일 것이다.

 

인재를 뽑는데 대면이 갖는 인정(人情)을 우려하며 객관적 방식을 통한 인재선발의 공정성 유지 노력 그리고 사회적 믿음에 근거해야 하는 화폐 유통(오늘날에는 비트코인 등의 문제가 있다)과 경제적 활동은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같은 상황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