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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때, 조선땅에 3,920체(体)의 신궁대마 봉안

맛있는 일본이야기<629> 연재 《일본 통치하의 해외신사》 2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선신궁 낙성식때 참석한 뒤 “화려했지만 왠지 쓸쓸한 모습” 이라고 낙성식 참석 소감을 촌평한 신도학자(神道学者) 오가사와라 쇼조(小笠原省三, 1892~1970)는 “일본 신사지만 조선신(단군)을 모셔야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일본신사에 단군을 모셔야한다는 주장은 언뜻 보면 조선을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내용면에서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조선의 조상인 단군을 모시려면 단군사당을 지어서 모셔야하는 것이지 왜 일본신사를 지어 단군을 모셔야한다고 주장한 것일까?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라는 이론으로 기다 사다기치(喜田貞吉, 1871~1939) 같은 학자는 〈일선양민족동원론〉이라는 논문을 통해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은 유물·언어·신화·풍습 등 다방면에서 같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 밑바닥 정서는 일제의 조선식민화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일선동조론은 3·1운동 이후 내선일체라는 구호를 통해 정책적으로 한층 심화되었으며, 만주사변 이후 한국인에게 강요된 창씨개명 등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민족말살정책의 토대가 되었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남산의 조선신궁 설치가 공식적인 것이지만(총독부가 주도적으로 세웠다는 의미로) 그 이전에도 일본인들은 조선땅 곳곳에 신사를 세웠다. 그 가운데 하나로 곤도히라신사(金刀比羅神社, 이후 용두산신사로 이름 변경)를 들 수 있다.

 

《일본 통치하의 해외신사》에 따르면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7)에 당시 부산에는 대마도 영주인 소우 요지자네(宗義真宗1639~1702)가 지금의 용두산 공원 꼭대기에 곤도히라신사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곤도히라신사는 에도시대, 해상무역이 활발하던 때에 이들 무역업자와 상인들 사이에 숭배되던 신앙으로 분사(分社)가 일본 전역에 설치되었으며 당시 대마도와 조선의 무역으로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용두산에 신사를 세워 신앙했던 것이다. (현재 일본 전역에 곤도히라신사는 약 600곳이 있다)

 

 

 

일제의 조선병합 이전인 1882년 5월에는 원산에 신궁요배소(神宮遙拜所, 훗날 원산신사)를 시작으로 1890년 10월에는 인천신궁요배소(훗날 인천대신궁) 등이 속속 들어섰다. 이러한 신궁요배소는 주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생겨난 것들이다. 신궁요배소는 말 그대로 신사참배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이곳에는 신궁대마(神宮大麻, 또는 신궁별대마)라고 해서 일종의 부적(위 사진 참고)을 봉안했다. (신궁대마‘神宮大麻’는 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발행한다) 러일전쟁(1904) 무렵에는 조선 전국에 3,920체(体)의 신궁대마를 모시는 봉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3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