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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750년 전 고려에 울려 퍼진 사랑 노래

《가시리》, 선유, 황소자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57-58)

가시리 가시렵니까 버리고 가시렵니까

나는 어떻게 살라고 버리고 가시렵니까

붙잡아 둘 것이지만 싫어지면 아니올까

서러운 님 보내오니 가시는 듯이 돌아오소서

 

높고 고운 나라, 고려(高麗)에는 노래가 참 많았다. 이 노래들을 우리는 ‘고려가요(高麗歌謠)’라 부른다. 지은이는 고백한다. 학창시절, 높고 고운 노래(高麗歌謠)를 접하자마자, 간절함 아래 흐르는 짙은 슬픔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그때는 삶도 문장도 서툴기만 하여 공책에 노랫말을 옮겨 적고 서랍 깊숙이 넣어뒀지만, 지금도 그 영혼들의 상처를 어루만질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 자신하긴 어렵지만, 더 미루면 영영 그 노래들을 이야기하지 못할 듯싶어 용기를 냈다고.

 

선유가 쓴 이 책 《가시리》는 입에서 입으로, 750년 후인 오늘까지 전해진 고려가요를 실타래 삼아 한 가인(歌人)과 그녀를 둘러싼 두 무사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고려시대 악사들이 소속되어 있던 기관 팔방상(坊廂)의 으뜸 가인 아청(鴉靑)과 좌별초와 우별초를 대표하는 무사로 이름 날린 좌(左), 우(右)가 그 주인공이다.

 

 

셋은 원나라가 고려를 침공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절, 고려가 원을 피해 도읍을 옮긴 강화경(강화도)에서 나고 자랐다. 서경(평양)에서 벗으로 지내던 셋의 아버지는 1232년 함께 배를 타고 강화경으로 들어왔다. 그로부터 38년이 지나고, 그 아이들이 우정을 물려받았다.

 

좌의 이름은 김성도, 우의 이름은 강병호였지만 아청은 그들을 처음 만난 세 살 때부터 좌! 우! 그렇게 불렀다. 아청의 왼쪽을 줄곧 지키던 좌는 강화경을 지키던 삼별초 가운데 좌별초에 들었고, 아청의 오른쪽에 머물던 우는 우별초에 들었다. 아청은 왕국 제일의 악사였던 아버지 고음(考音)의 재능을 물려받아 모두가 칭송하는 팔방상의 으뜸 가인이 되었다.

 

셋은 모두 친한 벗이었지만, 언제까지 그대로 갈 수는 없었다. 좌와 우 모두 아청을 사랑했다. 사실 아청의 마음은 확고했다. 언젠가는 그 마음을 드러내고, 한 사람을 따르려 했다. 그러나 셋이 함께하던 아름다운 시절은 갑자기 끝이 났다.

 

고려가 원 제국에 굴복하면서 강화경에서 나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우는 개경으로 함께 돌아가 원 제국을 따르려 했고, 좌는 삼별초와 함께 진도로 들어가 끝까지 맞서 싸우려 했다.

 

각자의 방향으로 배가 출발하던 날, 좌와 우는 아청을 서로의 배에 태우려 다급히 찾았지만 아청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배를 놓칠 수 없어 포기하고 내달리던 좌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p.41)

세찬 바닷바람을 뚫고 노래 한 자락이 마중을 나왔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천 년을 외따로 살아간들 믿음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좌는 다시 내달려 배에 올랐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삼별초와 그를 따르는 천여 척 선단이 강화경을 떠나기 시작했다. 최선봉 군선에서 부르는 아청의 노래는 새로운 희망의 출정가였다.

 

아청은 진도로 향하는 천여 척의 선단을 이끄는 배에서 병사들과 백성들을 격려하는 노래를 부른다. 한편, 아청이 진도로 향하는 선단에 합류했다는 것을 알게 된 우는 분노한다. 아청이 좌에게 납치됐다고 생각한 그는 아청이 탄 좌의 배를 습격하는 기습작전을 감행, 배를 침몰시키고 아청을 자신의 배에 태운다.

 

그러나 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원 제국에 끝까지 맞서겠다는 의지로 좌의 배에 올랐던 아청은 끼니도 거부하고 자결을 시도하며 우를 낙담케 했다. 아청이 자신보다 좌를 택했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누를 수 없었던 우는 좌를 죽여 없애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1271년 5월, 아청은 우의 군선 뱃머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진도로 향한다. 진도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은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해 꾸린 선단의 선봉이었다. 이는 아청이 자청한 것이었다. 삼별초를 토벌하고, 일본까지 정벌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고려에 온 제국의 대신 남(南)은 아청의 자발적인 참전에 흐뭇해한다.

 

아청은 어떻게든 진도로 가서 좌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좌도 이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아청의 마음과는 다르게 아청의 노래를 들은 삼별초 군사들은 점점 원에 투항하기 시작한다. 점점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삼별초의 패색이 짙어지자, 좌는 마지막 작전으로 아청을 우의 배에서 구해내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진도에서 살아남은 삼별초의 무리는 제주로 후퇴한다. 여기엔 좌도 함께였다. 제주에서 성을 쌓고 앞으로 다가올 두 번째 토벌을 대비했다. 시간을 벌려면 우가 건조 중인 원의 배들을 불태워야 했다. 원은 합포(오늘날의 마산)에서 삼별초와 일본을 정벌할 큰 배를 만들고 있었고, 아청은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고려 백성들을 노래를 불러 위로하고 있었다.

 

좌를 비롯한 삼별초 정예부대는 합포에 상륙, 이 배들을 불태우고 아청을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좌와 아청은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제주로 돌아온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 사랑하며 보냈다.

 

그러나 토벌은 예정된 순서였고, 마침내 우를 선봉으로 한 원의 대규모 선단이 제주로 진격한다. 삼별초의 장수 호가 용감히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쌓은 성도 별 소용이 없었다. 최후를 직감한 좌는, 20살 즈음의 어린 삼별초들을 이끌고 한라산으로 들어갔다. 이들만큼은 한라산에서 버텨, 언젠가 삼별초를 부활시켜주기를 바랐다.

 

좌는 이날을 대비해 미리 아청을 숨겨두었다. 아청이 동굴에서 잠든 사이, 식량을 넣어두고 동굴을 봉했다. 그리고 토벌군이 물러갔을 즈음인 석 달 뒤에 그 동굴을 열어주라고, 한 소년에게 부탁해두었다.

 

마침내 좌와 우는 맞닥뜨렸다. 이제 둘 가운데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결투를 벌이며 우는 아청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려 했지만, 우를 쓰러뜨린 좌는 자결로 입을 봉했다. 아청을 죽음으로 지켜낸 것이다.

 

석 달 뒤, 소년의 도움을 받은 아청이 나왔다. 아청을 찾으려 섬에 남았던 우는 아청을 발견한다. 그리고 달려간다. 그러나 아청은 이미 바닷속으로 몸을 던진 뒤였다. 우도 함께 몸을 던졌지만, 어디에도 아청은 없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사랑 노래를 대신할 뿐이었다.

 

이들이 불렀던 고려 노래들. 높고 아름다운 나라에 울려 퍼졌던 이 노래들은 시절을 잘못 만나 결국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그래도 아청과 좌, 그리고 우는 각자가 추구하는 이상에 따라 힘껏 살았고, 사랑했고, 750년 뒤 한 작가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피어났다.

 

지은이는 이 노래들을 아끼는 마음을 고백하며, 자신의 이야기가 750년 전 영혼들과의 중창(重唱)으로 들렸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혹 이미 짐작한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소설의 지은이는 김탁환이다. 소설을 쓰던 도중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도저히 사랑소설을 계속 쓸 수가 없어 접어두었다가 2017년 ‘선유’라는 필명으로 출간했다.

 

지금도 무수히 많은 노래가 나오고, 대부분은 잊히고, 아주 적은 수의 노래만 남아 오래도록 마음을 울린다. 고려도 그랬다. 노래를 연주한 악공, 노래를 부른 가인, 노래에 맞춰 춤춘 무사들도 피고 지고 한 줌 흙이 되었지만, 이들이 살며 사랑하며 불렀던 노래는 남았다. 이 서평을 읽는 독자들도, 오랜만에 고려가요를 읊조리며 750년 전 영혼들과의 아름다운 중창을 불러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