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255) 승정원은 ‘목구멍과 혀(喉舌)’에 해당하는 부서로, 왕명 출납을 맡아 옳은 것은 아뢰고,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은 거부하였으니, 그 임무가 막중하다. 개국 이래로 승지에 임명된 경우 사람들이 신선처럼 우러러 보았으며, 세속에서는 은대학사(銀臺學士)라고 일컬었다. 시중드는 하인들도 모두 은패(銀牌)를 차고 자색 옷을 차려 입고 스스로 영광스럽게 여겼다. 순암집》- 승정원. 오늘날로 말하면 비서실과 같은 관청이다. 임금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할 수 있어 소속 관원들의 자부심과 권한도 대단했다. 승정원은 관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면서도,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올곧게 왕명을 전달하는 청렴함과 과중한 업무를 이겨낼 수 있는 체력이 요구되는 곳이기도 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승정원일기번역팀이 펴낸 이 책, 《후설》은 승정원일기와 승정원에서 일하던 관원들을 자세히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보다 덜 알려져 있으면서도 분량이나 내용에서 뒤지지 않는 승정원일기를 조명하는 책이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작성한 일종의 ‘국정일기’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부처별 보고와 이에 대한 임금의 업무지시를 고스란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유명한 건 알겠는데, 왜 유명한 거야?” 우리 그림 가운데는 좋은 작품이 참 많다. 다만 서양 화가들의 그림과 견주어 접할 기회가 다소 부족했기에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학교에서도 서양화 중심으로 배우고, 한국화보다 서양화를 다루는 책들이 더 많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유명한 우리 그림에도 서양화 못지않은 이야깃거리와 의미가 물씬 배어있지만, 막상 왜 유명한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알면 알수록 조금 더 새롭게 보이는 것이 그림이다. 이유리가 쓴 이 책, 《왜 유명한 거야, 이 그림? 한국미술편》은 무심코 지나쳤던 명작들이 품고 있는 뜻을 하나하나 깨우쳐주는 책이다. 좋은 작가 뒤에는 좋은 후견인이 있었다. 안견과 정선이 대표적이다. 안견은 세종대왕의 아들이었던 안평대군이, 정선은 ‘이병연’이라는 인물이 든든한 후원자였다.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는 말 그대로 ‘꿈속에서 노닐었던 복숭아밭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으로, 안평대군의 꿈을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다. 안평대군은 예술을 사랑하는 당대 으뜸 수집가였다. 수집품이 무려 222점에 달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36점이 안견의 작품일 정도로 안견의 실력을 아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유배는 고달프다. 가시울타리에 갇히는 ‘위리안치형’을 받으면 일단 곤장 100대를 맞는다.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상태로 천릿길을 가다가 병이 들어 죽기도 하고, 섬으로 유배되면 풍랑을 만나 죽기도 한다. 어찌저찌 유배지까지 간다고 해도 가시울타리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는 데다, 언제 사약이 내려올지 모른다는 ‘시한부 인생’의 공포가 짓누른다. 삼평중학교 국어 교사 두 사람이 같이 쓴 이 책, 《유배도 예술은 막을 수 없어》는 거친 유배지에서도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예술혼을 꽃피운 7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책에 실린 허균, 윤선도, 김만중, 이광사, 김정희, 정약용, 조희룡은 오히려 유배가 ‘인생 한 수’라 할 만큼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남긴 눈부신 업적의 태반이 유배지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유배지에서 산다는 건 고달프긴 해도, 한편으로는 그동안 ‘일하느라 엄두도 못 냈던’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마음껏 하면서 시름을 달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조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선도 또한 유배지에 가서 시조를 짓기 시작했다. 윤선도는 언뜻 생각하면 평탄한 벼슬길을 걸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