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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풍물광대 70년 세월, 그래도 후회는 없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06]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남사당의 제6종목 가운데 ‘인형극’을 소개하였는데, 그 주된 내용은 지배층 구조에 항의하거나, 그들의 횡포에 저항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남사당의 꼭두쇠 역할을 맡은 지운하의 고향은 인천이고, 동네 농악단의 장구가락이나 쇠가락을 듣고 자랐다는 이야기, 인천 <숭의국민학교> 학예회에서 농악의 상모 돌리는 역할이 계기가 되어 풍물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위계질서가 엄격한 단체생활을 하며 기본질서를 몸에 익혔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가 국립국악원에 재직하고 있을 당시, 나라 밖 청소년들에게 사물놀이를 전파하는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지운하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는 평판이 자자하다. 그의 말이다.

 

“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남기문을 비롯하여 실력과 애정을 지닌 젊은 단원들과 함께 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러시아,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닌 것은 큰 보람이고 영광이지요. 고려인들이나 조선족들이 3세만 되면 우리말을 잊어버리는데, 아마도 50년 뒤에는 우리말을 완전히 잊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통해서 배운 장구나 꽹과리 가락은 잊지 못할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의 민속음악을 동포 2~3세에게 전파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준 것은 저희의 사업 가운데, 매우 의미가 있는 보람된 사업의 하나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잔치마당의 서광일 대표가 처음으로 지 명인을 만난 시기는 1988년도였다고 한다. 당시 풍물에 흥미를 느낀 서 대표가 이를 체계적으로 배울 생각에 서울 강남구에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관, 남사당놀이보존회 사무실을 찾아가 지운하 명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꽹과리를 비롯한 풍물 전반을 배웠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년 뒤, 부평풍물대축제를 발굴하면서 기획과 연출을 맡게 되었고 자연스레 지운하 명인의 활동도 본격적으로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지운하 명인은 2015년, 그의 풍물인생 60돌을 기린 <예인의 길ㆍ유랑의 길>이라는 공연을 무대에 올리며 인천 시민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고 회고한다. 이 공연은 <인천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역 협력형 사업으로 선정되었는데, <남사당놀이보존회>와 <사단법인 유랑>이 주최하고, <남사당놀이 인천시지회>가 주관하였으며 서광일 대표가 총괄, 기획한 기념공연이었다.

 

이 공연에는 남사당의 후배 명인들과 국악계 명인 등, 동료 국악인들이 특별 출연하여 무대를 빛내 주었고, 단체팀으로는 남사당놀이 <인천시 지회>와 <사물놀이 진쇠>,그리고 <국가무형문화재 제11호 평택농악보존회> 등 관련 풍물 단체들이 우정 출연하여 객석이 환호의 응답을 하였다.

 

 

제1부 ‘예인의 길’ 공연에서는 남기문의 비나리로 시작하여 서도소리의 유지숙 명창, 최경만의 피리 시나위, 김덕수ㆍ지운하ㆍ진명환ㆍ최종석의 사물놀이, 진쇠의 걸립굿, 지운하의 소고놀이와 열두 발 상모놀이, 최종실의 소고춤, 원장현의 태평소 시나위, 강향란의 징 춤, 김수연의 판소리(고수 송원조) 등으로 신명나는 국악한마당이 펼쳐진 것이다.

 

제2부 ‘유랑의 길’에서는 권원태의 줄타기와 <남사당놀이 인천시 지회>의 풍물 판굿, <평택농악보존회>의 공연마당 순으로 지운하 명인의 60평생 풍물 광대로 살아온 이야기를 풍물 연희로 풀어냈다. 지 명인은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진솔한 이야기를 했다.

 

“60년 동안 우리 전통 연희에만 매달려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뒤를 돌아보니 나보다 더 뛰어난 후배들과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전통을 지키고 발전시킬 든든한 동료들을 보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지운하 그는 1947년 인천 남구 도화동에서 태어났다.

 

도화동 마을 풍물패에서 상쇠를 도맡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찌감치 풍물을 접하며 자랐다. 마을 풍물패의 상쇠였던 아버지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1955년 초등학교 2학년 학교 수업을 받던 어느 날, 창문 밖으로 들리던 풍물 소리를 듣고, 선생님께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온종일 풍물패를 따라다니다 밤늦게 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훗날, 성공한 예술인들 가운데는 자신이 좋아하거나 흥미가 있는 공연, 또는 노랫소리나 악기 소리가 들리면 학교 수업은 뒤로 하고, 어떻게든 참여했다가 후에 선생님에게 혼쭐이 났다는 경험담을 털어놓는 사례를 많이 들었다. 지운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듯싶다. 그날 이후부터 아버지에게 본격적으로 풍물을 배우기 시작한 점이 그렇고, 도화동의 지역 풍물패에 정식 단원이 된 배경도 그의 몸속에 풍물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방증이라 할 것이다.

 

동네 풍물패는 어린이들의 참여도 필요하기에 있어야 한다.

그가 동네 풍물패의 일원이 된 다음 해, 곧 1959년도에 그는 인천 대성목재의 농악단 단원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경기도 대표로 출전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당시 장관상을 받았다고 하며, 그다음 해인 1960년도에는 팀이 대통령상을 받는 데 이바지했다고 하니,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의 끼를 예견한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