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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신라의 보물에서 오늘의 보물로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9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는 집권체제가 정립되어 가던 6세기 전반 신라 사회의 신분 질서와 미감을 대표하는 꾸미개(장신구)입니다. 전체 길이가 8.4cm에 이르며, 신라 귀걸이의 특색을 압축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나눠보면, 크게 중심고리[主環]-노는고리[遊環]-연결금구(連結金具)-샛장식[中間飾](달개-구체-반구체-달개)-드림[垂下飾]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무늬 없이 간소한 중심고리는 3줄의 접합선과 2장의 막음판으로 볼 때, 5장의 금판을 사용해 성형된 것입니다. 그 지름이 3.7cm로 굵은 편인데, 신라 귀걸이의 중심고리는 굵은 형태와 가는 형태로 양분됩니다. 중심고리의 굵기는 당대 무덤에 묻힌 인물의 성별을 가리는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대체로 굵은고리는 여성의 것, 가는고리는 남성의 것으로 판단되고 있는데, 무덤 내에서 함께 발견되는 관ㆍ칼 등 여러 위세품과의 조합을 아우르면 판단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또한 큰 무덤에서 나온 중심고리의 선후관계를 기준으로 보면, 지름 크기는 귀걸이를 만든 시점을 짚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제작 시기상 늦은 단계의 중심고리가 빠른 단계의 고리보다 지름이 큰 편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귀걸이는 전체적으로 다소 길어지고 장식이 복잡해집니다. 이러한 특성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신라 귀걸이를 더욱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구성으로 짚어보는 귀걸이의 특성과 시간

 

 

노는고리는 중심고리와 그 아래의 장식을 잇는 기능을 합니다.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의 노는고리는 처진 부위가 다른 부위보다 상대적으로 굵은 점이 특징적입니다. 노는고리와 드림을 이어주는 연결금구에는 샛장식이 걸려 있습니다. 가장자리에 금알갱이를 붙인 달개 25개를 위아래로 매달아 더욱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복잡한 달개 역시, 이 귀걸이를 만든 때가 비교적 늦은 시기임을 나타냅니다.

 

귀걸이의 끝을 맺는 드림은 펜촉 모양입니다. 펜촉 모양 드림은 잎[心葉] 모양 드림보다 드물어서, 귀걸이의 특징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상 전체 형태와 기본 구성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양산 금조총 금귀걸이, 창녕 계성 Ⅱ지구 1호무덤 금귀걸이 등과 가깝습니다. 특히 경주의 귀걸이와 흡사한 것이 경주 바깥의 양산ㆍ창녕 등지에서 발견된 사실은 중요한 내려주어, 경주 외부 권역을 통제했던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금귀걸이의 발견, 그리고 의의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는 1949년 6월에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발견 지점은 ‘경주군 경주읍 황남리’였습니다. 귀걸이가 발견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유적에서 일어난 문제와 연관됩니다. 당시 이 일대가 고적 제69호로 지정되어 있었음에도 거주민들이 이곳을 경작하거나 토지 위에 가옥을 신축하면서 극심한 파괴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여러 기의 고분이 이미 봉토 일부 또는 전체가 파손되어 적석부가 드러나고 유물 부장층까지 열린 상태에 이르러, 이에 대한 보존이 크게 우려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국립박물관의 활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줄곧, 정부 수립 목표와 맞물려 일제강점기의 폐단 청산과 한국 사회의 안정 유지가 논의되고 이에 따른 사회 갈등이 잦았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국립박물관은 예산과 인력이 크게 부족한 사정을 감수해가며, 국가 대표 문화기관으로서 전시, 소장품 관리, 조사, 연구, 교육 등 각종 업무 수행에 큰 힘을 쏟았습니다.

 

고적 조사는 그러한 노력을 대표하는 주요 갈래였습니다. 1946년 5월 호우총 발굴을 발단으로 꾸준히 축적된 경험들은 황남리의 파괴 고분 조사에까지 이르러, 6월 18일부터 26일까지 3기의 고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미 파괴ㆍ도굴된 고분 2기에서는 유물이 조사되지 않았으나 다행스럽게도 반파된 1기(52호분)에서 이 금귀걸이와 금장식 작은 칼, 금도금 은팔찌, 토기 여러 점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2001호)로 ‘다시’ 자리매김하기까지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는 2018년 10월 11일에 열린 문화재청 ‘2018년도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 제8차 회의’에서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원래는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455호)이었다가 다시 지정된 것인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기존 보물 목록에는 제454호 경주 노서동 금팔찌 - 제455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 제456호 경주 노서동 금목걸이 순으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노서리 215번지 출토 유물 일부는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이듬해 반환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1967년에 열린 문화재위원회에서 이들을 보물로 지정하게 되는데, 이때 형태가 유사한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가 착오 속에서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로 수록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착오는 2000년 일본인 학자와 국립중앙박물관 직원에 의해 밝혀졌고 2009년 지정문화재 심의위원회에서 현안으로 다뤄졌습니다.

 

당시에는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가 보물의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지만, 결국 최근에 들어와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2001호)로 재지정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해가 계속된 시절에도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의 값어치는 뚜렷하게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박물관의 안전한 전시실에서 은근한 맵시로 관람객들에게 자기 정체성과 그 내력을 온전히 전하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옥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