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단정하면서도 넉넉하게 생긴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능숙한 화원(畫員)의 솜씨로 보이는 무늬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합니다. 철화(鐵畫) 물감으로 그린 그림은 물감이 바탕흙[胎土]에 스며드는 성질 때문에 뭉그러진 부분도 있지만, 오히려 묵화(墨畫) 같은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킵니다. 한쪽 면에는 포도 넝쿨 사이에서 노니는 원숭이 한 마리가 보입니다. 조선 철화백자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몸체가 어깨부터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가 허리부터 서서히 좁아져 바닥에서 약간 벌어진 모습의 항아리입니다. 입 부분은 곧고 낮게 만들었는데, 이와 같은 형태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던 항아리들의 특징입니다. 철화 물감을 사용해 입 둘레에 연속적인 무늬를 장식하고, 어깨에서 허리 부분에 걸쳐 능숙한 필치로 포도와 넝쿨을 그려 넣었습니다. 원래 철화 물감은 태토에 스며드는 성질이 강한데, 이 작품의 경우 물감이 너무 많이 묻어서 포도와 잎이 엉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린 화원의 성숙한 필력(筆力)과 적절한 구도는 살펴볼 수 있지요. 장인(匠人)이 정성 들여 수비(水飛, 곡식의 가루나 그릇을 만드는 흙 따위를 물에 넣고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삼국시대 팔찌는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무덤에 묻힌 사람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팔찌의 재질이나 수량이 달라집니다. 왕족 무덤에서는 금, 금도금, 은으로 만든 팔찌가 같이 나올 때가 많고, 그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의 무덤에서는 은 또는 구리로 만든 팔찌가 적지 않게 확인됩니다. 특히 많은 수의 팔찌가 확인된 곳은 신라의 왕경(王京)이었던 ‘경주’로, 5~6세기 경주 곳곳에 만들어진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積石木槨墓]에서 수십 점의 팔찌가 출토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다양한 껴묻거리(부장품)를 통해 무덤에 묻힌 사람의 신분과 위계가 각기 달랐다는 데 대부분 동의합니다. 국립박물관에서 찬란한 빛을 뽐내고 있는 금관과 금제 허리띠, 금귀걸이와 금팔찌, 금반지 등은 모두 마립간(임금)과 부인, 자식 등 가족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황남대총과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무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가장 화려한 신라 목걸이, 그리고 ‘금팔찌’ 하지만 금관이 출토되지 않은 무덤에서 금팔찌가 확인된 예도 있습니다. 경주 노서리 215번지 무덤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일제강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1903년 겨울, 해가 어느덧 산 너머로 넘어가는 밤 충청북도 회인(懷仁, 지금의 보은 일대)에 살던 부자(富者) 정인원은 자기 집 사랑채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기엔 그저 평안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종잇장 하나를 들고 벌벌 떨고 있군요. 무엇이 그를 이렇게 떨게 했을까요. 일렁이는 호롱불 아래, 종잇장에 적힌 한글이 언뜻언뜻 드러납니다. 이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정인원의 어깨너머로 그 글을 읽어봅시다. 지금은 읽기도 힘든 옛한글입니다. 번역을 해보면, “활빈당(活貧黨) 발령(發令). 이상 발령하는 일은 전일에 전(錢) 5천 냥을 보내라 하였더니, 3백 냥만 보내니 괘씸한 마음을 어디에 다 말하랴 … 명령을 내니 이번에도 따르지 않으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로다.”라는 내용이네요. 허! 그냥 글이 아니었습니다. 홍길동(洪吉童)이 만들었던 도적 집단, 활빈당의 협박장입니다. 그러니 정인원이 이렇게 떨 수밖에요. 종이 위에 크게 박힌 화살 모양 수결(手決)이 그에겐 퍽 섬뜩했을 겁니다. 아니 그런데 잠깐, 활빈당은 고소설 《홍길동전》에 나오는 가상의 존재 아니었던가요? 한데 20세기로 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