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소조 불상은 흙으로 빚은 부처님의 형상입니다. 원오리(元五里) 절터에서 출토된 소조 불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고구려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소조 불상의 특징 부처님의 형상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재료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흙으로 만든 부처님은 소조(塑造) 불상, 나무로 만든 부처님은 목조(木造) 불상, 돌로 만든 부처님은 석조(石造) 불상이라고 합니다, 동으로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고 표면에 도금한 금동(金銅) 불상, 그리고 흙으로 부처님을 만들어 삼베[麻]로 감싼 뒤 옻칠을 하고 칠이 굳으면 다시 흙을 제거하는 건칠(乾漆) 불상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소조 불상은 조형 재료로 점토를 사용하는데 재료의 특성상 물기가 마르면 수축하여 변형과 균열이 생기고 결국에는 부서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약점 탓에 지금까지 완성된 형태로 전하는 소조 불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출토 사례가 적지 않은 점을 보면 부처님 형상을 만들 때 흙을 널리 이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흙은 우리 주변에서 비교적 손쉽게 구하는 경제적인 재료였기 때문에 소조 불상은 값싸고 빠르게 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소조 불상
[우리문화신문=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수행기》는 1833년(순조33) 공청우도(公淸右道, 오늘날 충청남도) 암행어사로 활동한 황협(黃 , 1778~1856)이 남긴 보고서를 필사한 책입니다. 이 책에는 19세기 초반 공청우도 관리들의 업적과 잘못을 비롯하여 백성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책 제목에서 ‘수(繡)’는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또 다른 이름인 ‘수의(繡衣)’를 뜻합니다. 제목 옆 ‘경랍(庚臘)’이라는 글씨와 책 안의 “경자년 납월 초칠일(庚子臘月初七日)”이라는 기록으로 1840년(헌종6) 무렵 편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협, 55살에 암행어사가 되다 《수행기》를 남긴 황협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황협은 1825년(순조25) 47살에 이르러서야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이후 공충도사(公忠都事), 홍원현감(洪原縣監),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등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지냈습니다. 1832년(순조32) 11월에는 비변사(備邊司)로부터 암행어사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추천을 받습니다. 황협은 55살인 1833년 1월 7일 임금으로부터 공청우도 암행어사로 삼는다는 봉서(封書) 1통, 어사의 임무를 적은 사목책(事目冊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단정하면서도 넉넉하게 생긴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능숙한 화원(畫員)의 솜씨로 보이는 무늬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합니다. 철화(鐵畫) 물감으로 그린 그림은 물감이 바탕흙[胎土]에 스며드는 성질 때문에 뭉그러진 부분도 있지만, 오히려 묵화(墨畫) 같은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킵니다. 한쪽 면에는 포도 넝쿨 사이에서 노니는 원숭이 한 마리가 보입니다. 조선 철화백자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몸체가 어깨부터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가 허리부터 서서히 좁아져 바닥에서 약간 벌어진 모습의 항아리입니다. 입 부분은 곧고 낮게 만들었는데, 이와 같은 형태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던 항아리들의 특징입니다. 철화 물감을 사용해 입 둘레에 연속적인 무늬를 장식하고, 어깨에서 허리 부분에 걸쳐 능숙한 필치로 포도와 넝쿨을 그려 넣었습니다. 원래 철화 물감은 태토에 스며드는 성질이 강한데, 이 작품의 경우 물감이 너무 많이 묻어서 포도와 잎이 엉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린 화원의 성숙한 필력(筆力)과 적절한 구도는 살펴볼 수 있지요. 장인(匠人)이 정성 들여 수비(水飛, 곡식의 가루나 그릇을 만드는 흙 따위를 물에 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