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철로 만든 부뚜막은 평안북도 운산군 용호동에 있는 고분 3기 가운데 ‘궁녀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네모난 돌방무덤에서 금동 봉황 모양 장식, 금동 투조(透彫, 투각) 금구(金具, 쇠붙이로 만든 손잡이, 문고리, 돌쩌귀, 곽쇠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조각, 토기 등과 함께 출토된 것입니다. 크기는 길이 67.2cm, 높이 29.1cm, 너비 23cm입니다. 긴 네모꼴 한쪽에 아궁이와 솥 구멍을 마련하고, 반대쪽에 굴뚝을 붙인 모양입니다. 아궁이와 굴뚝을 옆으로 나란히 배치한 점이 특징입니다. 아궁이는 네모난 모양이며, 주위에 돋을새김하였고 이마에는 불꽃모양 무늬가 있습니다. 휴대가 가능해 실제로 썼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뚜막과 아궁이 여기서 부뚜막과 아궁이라는 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부뚜막은 아궁이 위 가마솥이 놓인 언저리에 흙과 돌을 쌓아 편평하게 만들어, 솥의 음식을 담아내는 그릇을 두거나 간단한 음식 재료를 준비하는 곳입니다. 아궁이는 불을 때기 위하여 만든 구멍입니다. 따라서 부뚜막은 아궁이를 포함한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뚜막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지만, 전남지역에서는 ‘부수막’, ‘부숭’,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조선시대 청화백자를 생각하면 우선 18세기 문인(文人)의 그림과 같이 잔잔하고 정갈한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푸른색의 가는 선으로 그린 사군자, 산수화, 동물화와 하얀 여백이 주는 느낌은 고요함과 편안함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 그리고 특히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전혀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단정함보다는 화려함이 압도적입니다. <운현(雲峴)이란 글자가 쓰인 영지 넝쿨무늬 병>은 청화(靑畫) 물감만으로 세련된 화려함을 가장 잘 표현해낸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병의 형태는 19세기 들어서 새롭게 나타납니다. 목은 곧고 긴 편이며 몸체 아랫부분은 공처럼 둥급니다. 유색은 맑고 환하며 청화의 발색도 밝고 선명합니다. 몸 전체를 여백 없이 가득 채운 무늬는 영지버섯 넝쿨무늬입니다. 영지버섯은 자연에서 오래 사는 열 가지 사물인 십장생(十長生)의 하나입니다. 농담(濃淡)을 살려 영지 넝쿨을 정성껏 그렸고 입구 부분과 몸체 밑 부분에 돌린 여의두(如意頭)와 연판문대(蓮瓣文帶)까지 세부를 정성스럽게 묘사하고 청화 물감을 채워 넣었습니다. 굽바닥에는 청화로 ‘운현(雲峴)’이라는 글자를 써넣었는데, 이로 보아 이 병이 운현궁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 부석사에서는 폭 6미터, 길이 9미터가 넘는 비단에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펼쳐 건다면 아파트 4층 정도의 높이가 되는 이 그림은 당연히 법당 내부가 아닌 야외에 걸기 위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법당에 다 수용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불교 의식을 위해 ‘괘불(掛佛)’을 그렸습니다. 사람들은 누각이나 중정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법당 앞에 걸린 불화를 보며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사과나무가 심어진 산길을 오르면 나지막한 터에 자리잡은 부석사를 만나게 됩니다. 무심한 듯 자리잡은 전각, 화려한 단청 없이 담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무량수전, 안양루 앞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산자락, 자연과 건축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입니다. 신라시대 창건된 화엄종찰 부석사의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절집의 명성에 견줘 괘불이 그려진 1684년의 부석사에 관해 우리가 아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부석사에서 있었던 일들과 이 불화에 담긴 내용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을까요? 그들이 들려줄 이야기의 세계로 떠나보겠습니다. 부석사에서 괘불을 그리기로 했을 때 석가모니불의 설법회를 담아야겠다는 것이 첫 번째 의도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