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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어 처형당한 성삼문

세종시대를 만든 인물들 - ④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11]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연구 작업 도와

 

성삼문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크게 도왔다. 창제 시에도 도왔지만 세종 25년 청제 이후 언어학적인 구성체계를 확인하기 중국의 학자와 만나 음운 법칙을 검증하게 했다.

 

세종 27년(1445) :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 등에게 요동에 가서 운서를 질문해 오게 하다) 집현전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와 성균관 주부(注簿) 성삼문(成三問)과 행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 (세종실록 27/ 1/ 7)

 

이런 작업은 그 활용에서도 오류가 없게 하려고 세종 28년 반포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세종 32년, 1450년 성삼문ㆍ신숙주ㆍ손수산 등에게 명하여 운서를 사신에게 묻게 하다) 직 집현전 성삼문(成三問)ㆍ응교 신숙주ㆍ봉례랑 손수산(孫壽山)에게 명하여 운서(韻書)를 사신에게 묻게 하였는데, 삼문 등이 관반(館伴)을 따라 뵈니, 정인지가 말하기를,

 

"소방(小邦)이 멀리 나라 밖에 있어서 바른 음(音)을 바로 잡으려 해도 스승이 없어 배울 수 없고, 본국의 음(音)은 처음에 쌍기학사(雙冀學士)에게서 배웠는데, 그 역시 중국 복건주(福建州) 사람입니다." 한즉, 사신이 말하기를,

 

"복건 땅의 음(音)이 정히 이 나라와 같으니 이로써 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하가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이 대인(大人)에게서 바른 음(音)을 배우고자 하니, 대인(大人)은 가르쳐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삼문과 숙주가 《홍무운(洪武韻)》을 가지고 한참 동안 강론하였다.(세종실록 32/윤1/ 3)

 

 

성삼문은 유가의 충의를 지킨 큰 선비

 

문종(文宗)이 병으로 일찍 죽으면서 정치적 기반이 약한 단종(端宗)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의 보좌를 받으면서 어린 나이 11살에 1452년 조선의 6대 임금으로 등극한다. 단종 즉위년에 병으로 좌의정 남지가 사직하면서 좌의정은 김종서가 맡게 되고, 우의정은 정분(鄭笨)이 맡게 된다.

 

단종 1년(1453) :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인과 김종서를 제거하고,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이후 수양대군은 조선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의 임금으로 등극한다.

 

성삼문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사육신(死六臣) 6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세조 1년(1455)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세조 2년(1456) : 세종 때에 집현전 학자들로 구성된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 6명이 단종을 복위시키는 거사를 비밀리에 펼치는데, 이들과 함께하기로 했던 김질(金礩)이 세조에게 거사운동을 고변하면서 단종복위거사는 실패로 돌아간다.

 

성삼문이 한창 고문을 받고 있을 때 오랜 벗이자 동료였던 신숙주가 세조 옆에 있었다. 그를 본 성삼문이 노려보며 말했다.

 

“옛날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세종의 능호)께서 원손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세월이 흐른 뒤에 너희들이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는 당부가 아직 귓전에 남았는데,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호통을 들은 세조는 신숙주를 피신시켰다. 성삼문은 거사를 앞두고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비록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좋은 벗이었지만, 세종의 당부를 잊었을 뿐 아니라 불의의 편에 선 신숙주의 처세는 신의를 저버린 것이므로 성삼문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절대 굴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세조의 불의를 꾸짖고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을 향한 신하의 충성을 다한 성삼문이다. 세조가 성삼문에게 함께 공모한 자를 물었을 때 그는 “박팽년 등과 우리 아버지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세조가 공모한 자를 재차 물으니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라고 말할 뿐이었다. (《세조실록》 2/6/2) 그때 제학 강희안(姜希顔)이 관련되어 고문받고 있자, 성삼문이 “나으리가 선대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그는 이 사건을 모의하지 않았으니 남겨 두어서 쓰게 하시오. 이 사람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 하여 강희안은 석방되었다.

 

 

성삼문의 절명시(絶命詩)

 

성삼문이 죽으러 나갈 때 좌우에 있던 옛 동료들을 돌아다보며,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하라. 이 성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수레에 실릴 때 절명시를 남겼다.

 

​이 복위거사를 주도한 중심인물은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면서 성삼문은 당연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시가 절명시다. 절개 있는 선비가 죽으면서 남기는 시를 우리는 그것을 절명시(絶命詩)라고 한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북소리 울려, 목숨을 재촉하고

回頭日欲斜(회두일욕사) 고개 돌리니, 해가 저무는구나!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황천길에는 주막도 없다는데,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오늘 밤은 뉘 집에서 묵을 것인가?

 

그런데 여기에 다른 설이 있다. 이 절명시가 성삼문이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한철 박사는 ​단종 복위운동 이후 남효온(南孝溫)은『《육신전(六臣傳)》을 남기면서 오해와 왜곡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생육신인 남효온의 《육신전》에 누군가가 이 시를 소개하면서 성삼문의 시라고 주석을 달아놓는 것이 논란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숙권이 《패관잡기》에서 양억(梁億)의 <금헌휘언(今獻彙言)>을 인용하며 "명나라의 손궤(孫蕢)라는 인물이 남옥(藍玉)의 옥사 때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쓴 시"라고 판명했고 《순암집》, 《육선생유고》 등 후대 여러 책도 같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성삼문의 유작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절명시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참고: 농부 김박사)

 

 

성삼문은 2백 년이 지난 뒤인 숙종 때가 되어서야 역모의 혐의가 풀렸다. 사육신(死六臣)의 무덤이 고쳐 쌓으며 묘지 위에 사당을 세우게 되었고, 삭탈된 관직이 회복되었다. 또 영조 때에는 그에게 이조판서의 관직이 추증되었고, 충문의 시호가 주어졌다. 그의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팔다리를 묻었다는 무덤이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에도 있다. 저서로 《매죽헌집(梅竹軒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