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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이태영 변호사의 꿈, 세상을 바꾸다

《이태영 변호사의 낡은 가위》 글 강효미, 밝은미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이태영 변호사.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생소할 그녀는, 한국 여성 인권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여성 법조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등 고시에 합격한 여성, 이태영! 그녀는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마침내 한국 첫 여성 변호사가 되기까지 절대로, 절대로 꿈을 놓지 않았던 멋진 여성이었다.

 

강효미가 쓴 책, 《이태영 변호사의 낡은 가위》는 우리나라 첫 여성 변호사로 오랜 세월 차별받아 온 수많은 여성의 응어리진 한을 풀어 준 이태영의 일생을 알기 쉽게 풀어 쓴 책이다. 여성은 남성에게 예속된 부속물처럼 여겨지고 ‘여성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시절, 그녀는 시대를 앞서간 감성으로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여자들이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것은 불과 백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1914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2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이태영은 한 살 무렵 광산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이태영의 어머니는 아들딸 차별 안 하고 공부시켜주기로 약속했다.

 

그 누구보다 총명하고 웅변도 잘했던 그녀는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 집안에서는 공부는 많이 했으니 이만 혼인하길 원했지만, 그녀는 혼인보다는 대학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에 자신이 다녔던 광동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1년 정도 하고 학비를 벌어 마침내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에 입학한다.

 

사실 그녀가 원한 것은 법학과였지만, 그때는 그 어느 대학에도 여자가 들어갈 수 있는 법학과가 없었다. 그래서 이태영은 차선책으로 여성들이 주로 하는 집안일을 전문적으로 배워 여성이 겪는 차별에 맞설 힘을 기르고자 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뜻밖에도 가사과에도 법학 수업이 있었고, 당시 강사였던 정광현 교수는 이태영이 법학 수업을 열심히 듣자 제대로 가르쳐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태영은 가사와 법학 수업을 같이 들으며 무척 치열한 학교생활을 했다. 항상 시간이 부족해 계단을 두 개씩 뛰어다닐 정도였다.

 

그렇게 가사과 4학년에 되었을 때, 조선중앙일보에서 웅변대회가 열렸다. 이태영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을 빌려 ‘제2세대 인형’이라는 제목의 연설문을 썼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남자 밑에서 숨죽여 살던 당시 우리나라 여성들을 인형에 비유한 글이었다.

 

당시 웅변을 듣던 남성들이 마구 야유를 퍼부었지만, 이태영은 결국 1등을 했다. 딸을 항상 자랑스러워하던 이태영의 어머니는 곧바로 짧은 전보를 보내왔다. “너무 기쁘다.” 이렇듯 이태영은 장래가 촉망되는 멋진 인재였다.

 

이화여전을 졸업한 그녀는 평양으로 돌아가 평양고등성경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때 평양에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노동자들을 위한 작은 교회를 연 젊은 박사 정일형이 있었다. 그는 이태영이 이화합창단원으로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보고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녀가 평양으로 온 것을 알고 정일형은 몇 번이고 우연을 가장해 그녀를 만났고, 마침내 두 사람은 12월 26일 혼례식을 올렸다. 두 사람 모두 흔치 않은 고등교육을 받은 만큼 일제 치하에서 편한 삶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뜻이 같았던 그들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부부에게 펼쳐진 앞날은 험난했다. 독립운동을 하던 정일형은 일제의 눈엣가시였고, 일제는 틈만 나면 그를 끌고 가 고문을 하고 교도소에 가뒀다. 이태영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정일형의 옥바라지를 했고, 고생 끝에 낳은 첫째 딸은 역병으로 잃고 말았다.

 

결국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그녀는 이불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대학교까지 나온 여성이 이불 장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생활을 꾸려나갔다. 당시 그녀의 소원은 단 하나, 바로 잘 드는 가위 하나만 가져보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꿈은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그러나 마침내 해방이 찾아오고 정일형이 자유의 몸이 되자, 그는 그동안 죽도록 고생한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이제 보따리를 바꿔 멥시다.” 앞으로 고생은 자신이 할 테니, 원하던 법학 공부를 마음껏 하라는 뜻이었다.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으로 그녀는 처음으로 여학생을 뽑기 시작한 서울대 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녀의 나이 서른세 살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6.25 전쟁 가운데 부산에서 열린 제2회 고등고시에 당당히 합격,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한국 첫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렵게 얻은 법률 지식과 자격을 공익을 위해 아낌없이 활용했다. 당시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던 여성들을 위해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를 열어 무료 법률 상담을 하고, 1952년 만들어진 불평등한 가족법 초안을 개정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녀와 여성계 전체의 노력에 힘입어 가족법은 1977년, 1989년 개정되어 남편에게만 권리가 인정되었던 부부의 재산에 대해 부부가 공동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부부가 이혼했을 때 엄마도 양육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아들이나 딸 모두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미국에서 연수를 받으며 사법 제도를 둘러보고 가정법원에서 재판 진행 연습을 한 경험을 토대로, 1963년 우리나라 첫 가정법원이 설립되는 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그녀의 활동은 1976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20돌을 맞이해 여의도에 ‘여성백인회관’을 세우며 절정에 달한다.

 

(p.31)

마침내 이 집이 우뚝 섰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결코 돈으로만 지어진 집이 아닙니다. 이 집은 1천 5백 명 국내외 한국 여성들의 뜻과 정성이 알알이 모아진 결정체입니다. 21년 동안 상담소를 찾아들어 호소해 온 9만 5천 명의 한과 행복에의 꿈이 쌓이고 쌓인 끝에 세워진 집이기도 합니다. 회관의 완공은 우리 여성들의 역량이 거둔 승리이며 짓밟힌 이들의 행복과 인권을 되찾아 주려는 합치된 의지의 승리입니다.

                                                                      - 여성백인회관 개관식 기념사 가운데서 -

 

 

이렇듯 법조인이 된 이후 그녀의 인생은 곧 한국 법률 발전사나 마찬가지였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 모여 3.1민주구국선언을 한 일로 남편 정일형 박사는 3년 형을 선고받아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고 자신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는 등 시련도 있었지만, 부부는 사랑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p.38)

“정일형은 외국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올 때마다 새 가위 하나만 있었으면 했던 아내의 말을 떠올리며 새 가위 하나씩을 선물로 사 왔답니다. 아내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며 살자는 깊은 뜻이 담긴 것이었지요. 이런 가위가 자그마치 200개가 넘었다고 해요.”

 

법조인의 꿈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걸었던 그녀의 인생. 그리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변호사가 되었을 때 그녀가 선택한 행보. 자신의 꿈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고, 또 그 재능을 공익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은 그녀의 인생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그녀의 희생에 고마워하며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던 정일형 박사 또한 그녀를 키워낸 훌륭한 남편이었다. 조금 산만한 줄거리 전개가 아쉽지만, 해방 이후 한국 정치사와 법률사를 함께 만들어간 이태영ㆍ정일형 부부의 삶을 반추해보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