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가 간도로 이송하던 15만 원을 빼앗은 사건의 주역인 독립유공자, 윤준희(1963년 독립장), 임국정(1963년 독립장), 한상호(1963년 독립장), 김강(1995년 독립장) 선생을〈2023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라고 밝혔다.
함북 회령 출생(1895년)인 윤준희 선생은 중국 용정촌으로 이주하여 서전서숙*(瑞甸書塾)에서 신학문을 수학했고, 영신학교(용정의 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 계열의 민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며 민족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 서전서숙 : 만주로 망명한 이상설(1962년 대통령장), 이동녕(1962년 대통령장) 등이 한인 자제들을 교육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설립한 민족교육기관 |
한상호 선생(1900년, 함북 경성)은 중국 연길현 명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와룡소학교의 교원으로 재직하며 한인 청년들의 민족정신 교육에 힘을 썼다. 임국정 선생(1896년생, 함남 함흥)은 창동학교에 수학하며 민족의식을 길렀고, 독립전쟁을 위해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 일제와의 독립전쟁에 필요한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해 이동휘와 이종호 등이 중국 왕청현에 설립한 무관학교)에 입교하였으나, 학교는 탄압과 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폐교했다.
윤준희ㆍ임국정ㆍ한상호 선생(이하 “세분”)과 북간도 청년들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무장투쟁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하고자 비밀결사인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했다.
* 철혈광복단 : 1911년 초 이동휘가 간도에 왔을 때 조직한 광복단(光復團)과 러시아 지역에서 1917년 2월 혁명 이전 조직된 비밀결사인 철혈단(鐵血團)이 통합·조직된 단체 |
국내의 3·1만세운동은 북간도에도 소식이 전해져 북간도 3·13만세운동으로 이어졌으나 태극기를 흔들며 평화롭게 만세운동을 펼치는 학생 등이 무차별 진압되어 13명이 순국하고, 30여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한 것을 목격한, 선생들은 오로지 무장투쟁을 통해서만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를 구하기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한상호 선생은 한인 청년들과 함께 호르바트 부대로 파견되었고, 임국정 선생은 대한국민의회(1919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건립한 임시정부 성격의 단체,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통합)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무기 구매 활동을 이어갔으며, 윤준희 선생은 중국과 러시아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각자의 역할을 맡아 차근차근 조국 독립을 준비했다.
임국정ㆍ윤준희 선생은 대한국민의회 소속의 김하석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해 조선은행 자금을 탈취할 계획을 논의했고, 해당 계획은 조선은행 회령지점 서기로 근무하던 전홍섭과도 조율되었다.
1920년 1월 4일 일화 15만 원을 운반하는 호송대가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북간도 용정을 향해 출발했고, 오후에 간도 용정촌(龍井村) 부근의 골짜기에서 준비하고 있던 선생들은 도착한 호송대를 습격해 자금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일화 15만 원은 현재 화폐 값어치로 정확하게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당시 소총 5천정과 탄환 50만 발을 살 수 있는 돈으로 만주지역의 독립군 모두를 무장시키고 더 많은 부대를 추가로 조직 할 수 있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선생들은 빼앗은 자금을 대한국민의회의 선전부에 헌납하기로 하고, 1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다음 날 대한국민의회 서기이자 철혈광복단 단장인 전일(2007년 독립장)을 만나 구체적인 사용계획(무기구매, 사관학교 건립 등)을 수립했다.
임국정 선생은 러시아 군인과 약 3만 2천여 원을 무기와(소총 1,000자루, 탄약 100상자, 기관총 10문) 거래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주선한 중개인 엄인섭은 임국정 선생에게 접근해 무기 밀매를 알선하는 한편, 이 정보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에 근무하는 기토 가쓰미에게도 알렸다.
1월 31일 새벽, 일경은 숙소를 포위하고 잠들어 있던 선생들을 급습했다. 선생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체포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정박 중인 일본 군함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재판을 위해 다시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송됐다.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 1심에서 임국정ㆍ윤준희 선생은 사형, 한상호 선생은 무기징역, 전홍섭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이어진 2심(경성복심법원)과 3심(경성고등법원)에서 세 명의 선생들은 사형을 전홍섭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21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평안도 출신의 김강 선생(출생년도 미상)은 숭실학교 재학 중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검거를 피해, 1912년 중국 간도 지역으로 망명했다. 이후 하얼빈으로 이동해 한인청년들을 규합하고 민족정신을 드높이는 데 힘썼다. 1913년 간민회(墾民會, 한국인 자치단체로 문화계몽운동과 민족자치운동을 펼침)가 조직되자 용정으로 돌아와 간민회 일본조사부원으로, 동제회(同濟會) 평의원과 대동협신회(大同協新會)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선생은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통신부 부원과 연길현에 근거를 두고 있던 제1중부지방회의 중부경호부장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 협력자들을 처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1919년 11월 출범한 간도청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간도 지역 청년들의 항일의식 강화에 매진했다. 그러나 1920년 연길현 부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한 일제의 카노 기병연대에 ‘간도 15만 원 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중국 연길현에서 피살되어 순국했다.
독립을 꿈꾼 청년들이 철저히 준비하고 실행한 ‘간도 15만 원 사건’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쾌거였고 이는 그 시대를 살아가던 독립군들의 독립전쟁이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윤준희ㆍ임국정ㆍ한상호 선생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김강 선생에게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각각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