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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노회찬,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을 좋아한 음악 애호가

《노회찬 평전》, 이광호, 사회평론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31]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노회찬 평전》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동안 노회찬 재단에서는 ‘인간 노회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노회찬평전 기획위원회를 구성하여 노회찬의 말과 행적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광호 씨가 글로 엮어내는 작업을 하여, 4년 만에 평전이 세상에 나왔네요. <미디어 오늘>, <레디앙> 등의 편집자였던 이광호 씨는 이를 위해 노회찬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을 만나 대담을 하였답니다. 사실 이광호 씨는 노회찬과는 살아생전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답니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적임자라 생각하여, 평전 기획위원회에서는 그에게 집필을 의뢰한 것이랍니다. 이광호 씨는 머리말에서 노회찬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현명한 무신론자, 마음이 따뜻한 유물론자, 마키아벨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순진한 구석이 있었던 정치인, 과묵한 달변가, 변화에 열려 있고 첨단을 즐길 줄 아는 원칙주의자, 베토벤ㆍ차이콥스키ㆍ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좋아한 음악 애호가, 박학다식을 뽐낸 음식 마니아, 요리를 즐긴 남자, 소년의 호기심을 지닌 어른,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비판받지 않았던 페미니스트, 이반에게 감사의 상패를 받은 일반, 술과 예술을 즐긴 불온한 낭만주의자....”

 

인간 노회찬의 모습이 윗글에 다 담겨있네요. ‘이반’은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명칭입니다. 이광호 씨는 결론적으로 인간 노회찬은 삶을 뜨겁게 사랑하고 즐긴 ‘슬기로운 이중생활’의 주인공이었다고 합니다. 이중생활? 그렇지요. 노동운동을 하다가 감옥에도 갔다 오고 평생 진보정치에 몸을 담아온 사람이라면, 언뜻 냉철한 혁명가, 원칙에 충실하고 빈틈이 없는 정치인의 모습만 연상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간 노회찬은 평생 자신의 목표와 원칙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직접 첼로를 연주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고, 요리를 즐기며 소년의 호기심을 잃지 않았기에 슬기로운 이중생활의 주인공이라 할 만합니다.

 

책을 보니, 회찬의 부모님은 6·25 때 흥남에서 탈출하는 미군배를 타고 남한으로 넘어오셨네요. 아버님은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에서 탈출하셨다는데, 징병으로 끌려가는 기차 안에서도 하이네의 시집을 읽으셨다고 합니다. 이런 아버님의 예술적 감성과 위험한 탈출을 감행하는 용기를 회찬이 물려받았다고 하겠습니다. 회찬이는 어렸을 때부터 정의감이 투철한 사고뭉치 개구쟁이였답니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다는데, 회찬이 일기장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오늘은 잠이 안 온다. 엄마한테 한 대도 안 맞았기 때문이다.” 하하!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오더군요.

 

회찬이는 초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중학교에 합격하였습니다. 책에는 부산중학교 시험볼 때 수험표 사진이 실려있습니다. 고놈! 참 똘똘하게 생겼네요. 그런데 회찬이는 고등학교 입시에서는 한 번 고배를 들었습니다. 부산고등학교에 응시하였다가 떨어진 것입니다.

 

당연히 붙을 줄 알았던 회찬이가 떨어진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하네요. 저항설과 약물 부작용설. 약물 부작용설은 짐작이 되는데, 저항설이라니? 회찬이는 경기고 응시를 희망했지만, 아들을 품안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어머니가 부산고에 응시하게 했답니다. 그래서 일부러 떨어졌다는 것이지요. 회찬이는 감기약 부작용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하여튼 붙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회찬이가 떨어지니 이런 설도 도는군요. 하하! 어쨌든 저희 고교동기들로서는 회찬이가 재수하여 경기고에 들어와 주어 동기가 될 수 있었으니, 회찬이가 부산고 낙방한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회찬이가 경기고에 입학함으로서 회찬이의 서울 생활이 시작됩니다. 회찬이는 외삼촌 원태진 씨 댁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회찬이는 외삼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분, 아버지처럼 모신 분” 그만큼 외삼촌에게서 감화를 많이 받았다는 것이겠지요. 외삼촌은 1959년 ‘반팟쇼투쟁청년동맹’으로 구속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만기복역했습니다. 당시는 평화통일만 주장하여도 죄가 되고 간첩이 되는 어처구니없던 시대였지요. 자유당 시절 진보당 조봉암 대표는 평화통일 주장하다가 간첩죄로 사형에 처해졌지 않았습니까? 명백한 사법살인입니다.

 

이렇게 외삼촌에게 감화를 받고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인 회찬에게 유신 독재가 바로 보일 리가 없겠지요. 회찬이는 유신 선포 1주년을 그냥 보낼 수 없어, 친구 광필이와 함께 유인물을 만듭니다. 그리고 1973년 11월 29일 방과 후 학교 담장을 넘어 교실마다 유인물을 배포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학교는 조용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 등교 전에 유인물을 발견하고 모두 치워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긴장한 학교는 1, 2학년 학생들을 오전수업만 마치고 귀가시킵니다. 허허! 저는 그것도 모르고 수업이 일찍 끝난다고 좋아만 했으니.

 

1981년 8월 고대생 회찬이는 앞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깊은 고뇌와 성찰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선운사 참당암(懺堂庵)에 들어갑니다.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는지 3달밖에 안 된 때였으니, 회찬이에게는 특히 더욱 고뇌가 많았을 시간일 것입니다. 한 달 뒤 하산하면서, 회찬이는 자기 생각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성찰(省察)하고 또 성찰했다. ‘물의 흐름’처럼 역사에 나를 맡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명예나 이익을 탐하기보다 시대가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도리라고 판단했다. 어릴 때부터 배운 ‘대의(大義)에 서라’를 떠올렸다. 상식이 통하고 약속이 지켜지는 ‘정의가 바로 서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후 회찬이는 결심한 대로 굳은 의지의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래서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 들어가 용접 2급 기능사 자격증도 땁니다. 회찬이는 이 학교에 다니던 6달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이라며, 혈육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시기라고 합니다.

 

직업학교를 졸업한 회찬이는 유능한 용접공으로서 인천의 노동현장으로 뛰어듭니다. 1985년 3월 13일 회찬이는 부산으로 향합니다. 더 이상 부모님을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한 회찬이는 부모님 앞에 자신의 할 일을 솔직하게 말씀드리려는 것이었지요. 당연히 부모님은 충격을 받으셨지만, 회찬이의 결심을 존중해줍니다.

 

진실과 사랑을 바탕으로 삶을 이으련.

너의 뜻 아무 하자 없는데도

父母님은 말리고, 거절하고, 나무라고, 외면도 불사하려니...

그 누구의 탓도 아닌데….

만족하지 못하고 고독하고 험난한 일을 그 누가 힘쓰랴만

애써 나서는 놈 칭찬은 고사하고 울분으로 대하느니

이제 너의 길이 苦行이 아니겠나.

설혹 넘어진다면, 아니! 힘 있으니, 올바르니 넘어질 일 없겠으나

혹, 혹, 혹 넘어진다면

이 스크랩이 지팡이 되리라. 어미는 믿고, 계속하리라.

진정 착실한 아들인데... 빛을 밝히오며.

 

회찬이가 어머니에게 자신의 결심을 밝히던 바로 그날, 어머님이 마련하신 스크랩북 뒤표지에 손수 쓰신 글입니다. 글을 읽으면서 어머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제 가슴도 뜨거워집니다. 어머님은 그날부터 20년 동안 줄곧 노동, 진보정치 뉴스를 모은 스크랩북을 만듭니다. 그리고 2004년 국회의원이 된 회찬에게 스크랩북 20권을 건네줍니다. 회찬이가 그 외로운 길을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런 어머니께서 뒤에 있으셨기 때문이네요.

 

엄혹했던 시절 노동현장에 뛰어든 회찬이가 끝내 구속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요? 결국 회찬이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결성을 주도하여 1989년 12월 23일 체포되고, 2년 6개월의 감옥 생활을 합니다. 감옥에서 회찬이는 자기가 읽고 싶었던 책을 실컷 읽습니다. 회찬이는 자기 독방에 찾아오는 감방 손님들이 너무 많아 독서에 방해가 되자, 교도관에게 밖에서 문을 잠가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하! 책에 빠져든 회찬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네요. 그런데 회찬이가 노동서적이나 이념서적만 탐독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회찬이는 곤충, 산, 물고기에 관한 책뿐 아니라 요리와 대중가요 책도 즐겨 봤습니다. “운동하는 사람은 많은 것에 시야를 열어놓아야 한다.” 뭐 그런 책까지 다 보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회찬이가 답한 말입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어머니는 회찬에게 172통의 편지를 썼고, 회찬이는 어머니에게 83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감옥 담장을 사이에 두고 모자간에 오간 255통의 편지는 그대로 한 권의 아름다운 책이 되겠네요. 출소를 일주일 앞둔 1992년 3월 25일 회찬이는 평소보다 장문의 마지막 편지를 부모님께 보냅니다. 출소 후에는 노동운동을 접고 집으로 돌아와 같이 살자는 부모님의 소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보이는 편지지요.

 

아버님, 어머님!

 

인간이 인간을 부당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을 근절시켜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 – 그런 사회운동, 정치운동을 펼치는 것이 바로 저의 직업입니다. 이것은 무슨 이상한 사상에 물든 결과가 아닙니다. ‘의롭게 살아야 한다. 불의와 싸우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개인의 출세와 영달보다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옳은 일을 위해 싸우는 사람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제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개근상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면서 배운 내용이며, 또 그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온 것들입니다.

 

(가운데 줄임)

 

훗날 후손들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못했으나, 이 나라와 민중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살아왔다.’라는 자부심을 남겨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부모님의 이해와 격려는 제가 이 세상에서 뜻을 펴고 또 사회에 기여하는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저 역시 자식 된 도리를 다하면서 또 저의 직분을 다하는 데 진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맹장(猛將) 아래 약졸(弱卒) 없듯이 강한 부모 밑에 약한 자식 없을 것입니다. 보다 강하게 이 험한 세파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자기 앞날에 대해 회의를 느낄만한 힘든 시절이고, 또 사랑하는 부모님의 간곡한 호소가 있음에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회찬. 동기지만 참 존경스러운 친구입니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 회찬이는 노동운동가로 계속 활동하면서 제도권 내 진보정치를 안착시키고자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실로 2004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3선 국회의원까지 됩니다.

 

아무래도 평전의 절반 이상은 진보정치인으로서의 노회찬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당연히 저도 이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이나, 이미 제 글을 읽는 이들이 지루해할 만큼 꽤 많이 써 내려왔네요. 그래서 회찬이의 진보정치인으로서 살아온 삶은 이미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내용들이니,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책의 마지막은 짐작하듯이 회찬이가 드루킹 특검의 유탄을 맞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내용입니다. 마지막을 읽으면서 죽음을 결심하기까지 회찬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와 제 가슴도 저립니다. “회찬아! 꼭 그렇게 목숨까지 버려야 했니? 아직 할 일이 많은 너인데…. 네가 그렇게 목숨을 끊게 한 그 시절이 정말 원망스럽구나. 원망스러워!” 저자 이광호는 평전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습니다.

 

노회찬은 자신을 만든 것은 ‘교과서’라 말했다. 이제 그는, 마지막 장을 채우지 못한 교과서로 남은 채 떠났다. 노회찬은 그렇게 떠나면서 미완성으로 남은 자신의 꿈과 살아있는 사람들의 꿈이 만나 교과서의 빈 장이 채워지기를 바랄 것이다.

“지금 노회찬이라면 뭐라고 말할까?”

이 질문은 우리가 현재에서 미래로 건너가는 도상에 섰을 때 우리와 노회찬을 이어주는 가교다.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그렇습니다.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지난 7월 23일은 회찬이가 우리 곁을 떠난지 5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5년! 회찬이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5년이 넘었네요. 지금도 서로에 대한 배려 없이 날카롭게 독설을 퍼부으며 정쟁을 일삼는 정치판, 오히려 회찬이가 살아있을 때보다 후퇴한 듯한 이 나라의 정치현실을 보고 회찬이는 뭐라고 할까? 노회찬! 유독 노회찬이 더 보고 싶어지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