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황희 정승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두 여종이 상대방이 잘못했다며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두 여종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은 후 한 여종에게 '네 말이 옳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여종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역시 '네 말도 옳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이 '이 사람의 말도 옳고 저 사람의 말도 옳다니 줏대가 없으신 거 아니요?'
황희 정승은 '당신의 말도 옳소'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모든 편의 손을 들어주어 누구하고도 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지요.
썩은 과일을 계속 도려내다 보면 먹을 것이 남지 않고,
미운 사람을 다 걸러내고 나면 쓸 사람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적당히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을 한문으로 표현하면 중용(中庸)입니다. 쉬운 한자로 다시 표기하면 中用인 것이지요.
즉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알맞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남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이 부족하면 상대는 원망하게 되고,
남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이 지나치면 상대는 부담스러워합니다.
그 과(過)와 불급(不及)의 중간이 중용인 셈이지요.
그렇다고 남의 눈치만 보며 남의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용은 사람에 따라 삶의 지혜가 될 수도 있고,
줏대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중용이 어려운 것입니다.
어릴 때 공부를 잘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관심의 표현이었겠지만 그런 종류의 질문은 크게 유쾌하지 않습니다.
저는 잘한다고 하기엔 쑥스럽고 그렇다고 그닥 못한 편은 아니어서
'보통이요.'라고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용기는 지나치면 무모함이 되고 부족하면 비겁함이 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기울어진 저울과 잣대를 갖고 사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저울이 왜 기울었는가를 살펴보고 이유를 따져서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는 것이 중용이지요.
순자는 겸진만물이중현형(兼陳萬物而重懸衡)을 이야기합니다.
만물을 다 같이 늘어놓고 곧고 바름을 재고 헤아리는 것을 의미하지요.
잣대를 공평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중용의 시작입니다.
인기는 인격을 바탕으로 할 때 저절로 빛이 납니다.
당당하지만 오만하지 않은 것이 중용의 아름다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