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알 수 없는 까닭으로 성문에 불이 났습니다. 문지기는 놀라 ‘불이야!’를 외쳤고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마을은 갑자기 아수라장이 됩니다. 백성들은 양동이와 대야를 들고 모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작은 연못이 성문가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두어 시간 물을 퍼서 성문에 끼얹고 나서야 큰불이 잡혔습니다. 문제는 불을 끄고 나니 연못이 바닥을 드러나게 되었고 그 속에 살고 있던 물고기가 애꿎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지요. 물고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것을 ‘성문실화 앙급지어(城門失火 殃及池魚)’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직접적인 원인과 상관없이 뜻밖의 재난이나 피해를 보게 되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불이 난 것은 성문이고, 불을 끄는 데 사용된 물은 연못의 것이었지만, 그 불똥은 전혀 무관한 연못 속 물고기에게 튀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물고기는 불을 낸 것도, 불을 끄는 데 물을 쓰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누군가의 실수나 판단 착오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하고, 사회 전체의 문제나 갈등이 애꿎은 약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기도 합니다. 물고기처럼 우리는 때때로 남이 벌인 일의 희생양이 될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북창삼우(北窓三友)’란 성어가 있습니다. 세 친구 곧 술, 거문고, 시를 말합니다. 거문고를 벗하고 술 한잔하면서 시를 짓는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성어입니다. 그런데 왜 꼭 남창(南窓)이 아니라 북창(北窓)이어야 했을까요? 북쪽은 햇빛도 들지 않고 다소 추운 느낌이 있는 공간인데 말이지요. '북창'은 단순히 북쪽에 있는 창문일 수도 있겠지만 한적하고 여유로운 삶의 공간을 상징합니다. 이 사자성어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유래했습니다. "오늘 북창 아래에서 스스로에게 무엇을 할까, 물으니, 기쁘게도 세 친구를 얻었네"라고 읊으며 거문고, 술, 시를 자신의 벗으로 삼았다고 노래했죠. 옛 문인들에게 북창은 남향으로 지은 집에서 해가 잘 들지 않는,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의미했습니다. 이곳은 속세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며 사색을 즐기기에 좋은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북창은 단순히 방위를 나타내는 창이 아니라, 욕심을 버리고 자연과 예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는 선비의 삶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북창삼우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사색을 즐기는 선비의 이상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햇빛이 잘 드는 남쪽 창문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우리는 종종 숲을 거대한 나무들이 굳건히 서 있는 고독한 풍경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숲은 결코 홀로 자라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땅속 깊이 연대하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햇살은 모두에게 고르게 나뉘며, 작은 풀 한 포기, 이름 모를 버섯 한 송이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숲을 이룹니다. 숲의 위대한 성장은 수많은 생명의 조화와 상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가장 키 큰 나무도 홀로 설 수 없습니다. 거센 바람에 맞서 버틸 수 있는 건 뿌리들이 단단히 흙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며, 그 뿌리들은 주변의 작은 식물들과 미생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기도 합니다. 또한, 쓰러진 나무는 새로운 생명의 터전이 되고, 그 자리에서 다시 어린나무가 싹을 틔웁니다. 숲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서로에게 의지합니다. 우리네 삶도 숲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성공도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가족의 사랑, 친구의 격려, 동료의 협력,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입니다. 때로는 작은 위로의 한마디가, 때로는 묵묵히 지켜봐 주는 시선이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