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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미ㆍ중 패권 경쟁의 험난한 파고를 넘으려면?

《최명길 평전》, 한명기, 보리출판사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67]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진회보다 더한 간신’, ‘강상윤리를 내팽개친 원흉’ - 조선시대 이런 악평을 들어야 했던 인물이 누구일까요? 짐작하시겠지만 최명길 선생입니다. 최명길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렸을 때 사람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강화를 끌어내어 조선의 사직을 지킨 인물입니다. 당시 조선의 형편으로서는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 말고는 도대체 해답이 없음에도, 척화파 대부분은 강화니, 항복이니 말만 꺼내도 마구 공격하였지요. 만약 척화파의 주장대로 끝까지 항전했다면 청군은 하삼도까지 내려가 조선의 전 국토를 유린하고 수많은 백성을 죽음의 계곡으로 몰아넣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척화파에게 대다수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권리가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면 조선의 땅과 백성을 그 정도의 질곡에서 멈추게 하고 벗어날 수 있게 큰 역할을 한 최명길의 업적은 마땅히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리학 근본주의자들이 득세하는 조선에서 최명길은 저런 오명을 벗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그런 오명은 어느 정도 벗겨졌다고 하더라도, 최명길은 척화파를 훨씬 능가하는 평가를 받아야 함에도 여전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가 그런 최명길의 정당한 평가를 위한 작업에 뛰어들어 《최명길 평전》을 냈습니다. 사실 이 책은 2019년 11월 25일 세상에 나왔는데, 제가 뒤늦게 호들갑을 떤다고 뭐라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몇 달 전에 한 교수가 제가 회원으로 있는 이비엠 조찬포럼에 강사로 왔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한교수가 쓴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권을 감명 깊게 읽었기에, 이날 포럼은 만사 제쳐놓고 참석했지요. 그런데 고교 친구인 성낙송 포럼대표가 한 교수는 고교 후배라며 인사시켜 주어 더욱 반갑더군요.

 

 

그리고 어느 회원이 강사의 책 가운데 한 권 추천해달라고 할 때 한 교수가 《최명길 평전》을 추천하기에, 저도 주저하지 않고 사서 읽은 것입니다. 사실 역사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권을 이미 읽었기에 최명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최명길 평전》을 통하여 최명길 선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인물 임을 실감했습니다.

 

그럼 어떤 점에서 최명길이 훌륭한 인물인지 한 교수가 평전에서 전하는 것을 약간 얘기해 보겠습니다. 먼저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최명길이 인조의 남한산성 길을 터준 것부터 얘기해 보지요.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청군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남하하였습니다. 한양까지 500km의 길을 단 5일 만에 달려왔으니까요. 당시 조선군은 산성에 박혀서 청군에 대항하려고 하였는데, 청군의 선발대는 오로지 빨리 인조를 생포한다는 목적으로 무조건 내달린 것입니다. 그러니 인조가 강화 피난길을 나섰을 때는 이미 강화로 가는 길은 막혀버린 뒤였습니다.

 

인조는 공황 상태에 빠지고 신하들은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할 때 최명길이 나섰습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자기가 청군을 만나 시간을 벌겠다는 것이지요. 최명길의 손을 덥석 잡은 인조는 최명길에게 금군 20명을 딸려 보냅니다. 최명길은 청군 진영으로 가면서 쇠고기와 술도 준비했습니다. 적장 마부대에게 주연을 베풀면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려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청군 진영에 도착했을 때 최명길을 따른 사람은 이경석과 비장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겁에 질려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나 최명길은 결국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도망가는 소중한 시간을 벌어주어, 인조는 가까스로 남한산성 안으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최명길은 항복 직후에도 마지막까지 청군 진영에 남습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신하 나라가 큰 나라를 만났을 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를 행하고 송파나루에서 배에 오를 때, 신하들은 먼저 살겠다고 인조의 어의까지 잡아당기며 다투어 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최명길은 항복 뒤처리를 하기 위해 청군이 서울을 떠나기 전날에도 청군 진영에서 밤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최명길은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전쟁 뒤 피폐해진 조선을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했습니다. 나라가 이 지경이니 다른 신하들 역시 최명길처럼 피폐해진 조선을 살리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척화파는 항복한 임금 밑에는 있기 싫다며 사직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직한 이유 중에는 숨은 이유도 있습니다. 당시 청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만 인질로 잡아간 것이 아니라 높은 벼슬아치들의 자제도 잡아갔습니다. 그러자 자제를 보내지 않기 위해 사직한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말로만 떠들던 척화파와 주화파 최명길 가운데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이겠습니까? 한 교수는 최명길을 병자호란 이후 쓰러져 가는 조선 조정의 ‘소년가장’이었다고 표현하네요. 하하! 소년가장이라... 그 표현이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픕니다.

 

그런데 최명길이 주화파이다 보니, 최명길이 망해가던 명나라는 거들떠보지 않았을 거로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청은 병자호란 뒤 조선이 명과 밀통(密通)하지 못하도록 감시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최명길은 이를 피하여 조심스레 승려 독보를 몰래 명나라에 보냈는데, 결국 이것이 들통나는 바람에 최명길은 심양으로 강제 소환되었습니다. 이때 최명길은 자신이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여 상례(喪禮) 도구까지 가지고 갔답니다. 다행이랄까? 최명길은 이때 목숨까지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심양에서 4년 동안 옥살이(나중에는 옥에서 나와 억류 생활)는 해야 했습니다.

 

한편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조선 백성이 포로로 청나라로 끌려가지 않았습니까? 청나라는 이런 포로에 대해 은 10냥을 내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지요. 그런데 이 금액도 돈 많은 양반들이 하루빨리 자기 가족을 데려가려고 몸값을 올리는 바람에, 많은 일반 백성은 고향에 돌아갈 꿈을 접어야 할 정도가 되었었습니다. 꿈을 접을 뿐 아니라 좌절하여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풀려만 나오면 뭐 합니까? 그 머나먼 곳에서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심양에서 압록강으로 가는 사이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지대를 통과하면서 노숙까지 해야 합니다. 이러한 포로에 대해 아무도 대책을 세우지 않을 때, 최명길은 포로들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돌아올 때 평안도의 각 관에서는 마땅히 곡식을 마련하여 그들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도록 지급해야 합니다. 심양에서 의주까지는 7~8일이 걸리는 거리인데 가족이 있는 사람은 양곡을 준비해 가지만, 가족이 없거나 관은(官銀)으로 속환된 사람들은 먹을 만한 방도가 없습니다. 청북에 있는 관향미를 적당히 수송해서 통원보 서쪽의 곳곳에 비치하면 일이 매우 편하고 좋을 것입니다.”

 

최명길의 제언입니다. 참 가슴이 따뜻한 분 아닙니까? 또한 최명길은 양반들이 돌아온 여자들이 정절을 더럽혔다고 받아주지 않고 이혼하려고 할 때 이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심지어 최명길은 절친 장유가 아들의 이혼을 요청할 때도 친구와의 의리에 흔들리지 않고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도대체 남자들이 저지른 죄에 그녀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지금은 누구나 다 최명길이 옳다고 할 것입니다. 글머리에서 최명길을 ‘강상윤리를 내팽개친 원흉’이라고도 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오명은 이때 뒤집어쓴 것입니다. 어휴! 지금 제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척화파 사이에서 최명길은 욕을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일까요? 본질적으로 최명길이 가슴이 따뜻한 남자였기도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최명길이 성리학자이면서도 양명학(유학의 실천성을 회복하고자 제창한 학문)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원칙을 중시하면서도 유연하게 사고할 줄 알았으며,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략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애 류성용이 임진왜란 때 유연하게 대처하며 나라를 살려낸 것처럼요.

 

이런 최명길이기에 비록 인격적으로는 흠이 있는 사람이라도 나라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인물이라면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예가 박엽을 살려야 한다고 청원한 것입니다. 인조반정 뒤 광해군 정권 때의 많은 인물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에 오랫동안 평안도 일대에서 근무했던 평안도 관찰사 박엽도 처형 대상에 올랐습니다. 이때 최명길은 박엽을 살려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건대 장차 우리나라에 닥칠 병란으로는 북쪽 오랑캐가 가장 걱정스럽습니다. 조금만 지식이 있다면 천기를 살필 수 있고, 천기를 살피면 이처럼 장수의 지략을 지닌 사람은 살려야 합니다. (가운데 줄임) 대감께서 만약 이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은 대감의 손으로 우리나라의 장성(長城)을 허무는 것이니 만일 훗날 북쪽 오랑캐가 달려 내려온다면 누가 그것을 막겠습니까?”

 

최명길이 반정 원훈 김류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비록 박엽이 광해군에게 뇌물을 바치고 성품이 잔혹하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청나라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이런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명길의 탄원에도 박엽은 반정 직후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최명길의 생각대로 북쪽 오랑캐 청나라가 달려 내려왔을 때 아무도 막지 못했네요.

 

당시 조선이 처했던 상황을 보면서 오늘의 한국을 생각해 봅니다. 지금 한국은 주위에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4강이 둘러싸고 서로 자기네 이익을 위해 한반도를 요리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최명길과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 교수는 평전의 마지막을 이렇게 매듭짓습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될 조짐을 보이는 오늘, 격화되는 미중 패권 경쟁의 험난한 파고를 넘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노회할 정도로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러려면 우리 내부의 심각한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의 당파적 이해를 넘어 국가적 차원에서 대외 정책의 방향을 합의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 중차대한 과제를 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최명길이 보여준 책임감과 희생정신, 유연함과 포용력, 그리고 전략적 사고는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현실을 직시하면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최명길의 경세가로서의 풍모가 그립다.”

 

한명기 교수 덕분에 가슴이 따뜻한 남자 최명길을 새롭게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교수님! 평소 한 교수님 글을 좋아했는데, 더구나 고교 후배라고 하니 더욱 친근감이 느껴지는군요. 언제 같이 소주 한잔하면서 책에서 못했던 뒷이야기도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