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제 아비는 한 가닥 충성심으로 오직 나라를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이조원(李肇源)의 역적 행위를 힘써 성토하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비참하게 끔찍한 화를 입고 마침내 섬 속의 원혼(冤魂)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자식이 된 자가 한 가닥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서둘러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은 본디 당면한 것으로서, 단지 듣기를, 대궐의 뜰에 북을 설치한 것은 신하가 원통한 바를 하소연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길이라고 하기에, 장사를 치르자마자 예절은 돌아보지 않은 채, 서리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돈화문의 서협문(西挾門)으로 들어가, 곧바로 북이 설치된 곳에 가서 북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북을 쳤습니다.“
이는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1827년) 8월 4일 기록으로 아비의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대궐의 북을 친 서유규를 귀양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대궐의 북을 친 것인데 억울함을 살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마구 궐문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귀양 보내고 이를 왕조실록에 장황하게 기록하여 둔 것은 뭔가 임금이나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규정에 너무 치우친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1401년(태종 1) 7월 태종은 신문고(申聞鼓)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원통하고 억울함이 있는 사람에게 원통함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하려고 대궐에 북을 달아 소원을 알리도록 한 제도입니다. 하지만, 이 신문고 제도는 엄격한 신문고 운영 규정 그리고 국가의 통치력과 관련되어 정작 힘없는 백성보다는 소수 지배층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데 쓰였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현대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 (有錢無罪 無錢有罪)’란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돈과 힘이 있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죄를 지어도 빠져나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억울하게 처벌받는 일도 있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