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어제 5월 16일(금) 낮 3시 구로아트밸리 소강당에서는 국내 첫 저소음 버스킹 오디션 <이츠구로아트페스티벌(IT’S GURO ART FESTIVAL)> 개막식이 열렸다. 이 행사는 (사)한국연기예술학회(KOSAS)와 인스카우트(INSCOUT) 공동주최, 인스카우트와 (예술사회적협동조합)그린나래의 공동주관이며, 구로문화재단, 구로구상공회, (사)한국축제포럼, 4XR, IPARKMALL가 후원으로 나섰다. 개막식에서 먼저 (사)한국연기예술학회 조기숙 부회장은 “이제 우리는 대중에게 무조건 떠들어대기보다는 먼저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페스티벌은 무소음 페스티벌을 표방했다. 그래서 이번 <이츠 구로 아트 페스티벌>은 빛나는 구로를 만드는 데 큰 역할 할 것이라 믿는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또 (재)구로문화재단 정연보 대표이사는 “이번 축제는 우리 지역 예술문화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실험이라고 믿는다. 또 이번 축제를 통해서 버스킹 문화가 좀 더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축하인사를 했다. 개막식에는 신한대학교 K-POP학과 한가영 교수의 축하공연이 열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유정현(柳廷顯)을 의정부 찬성으로 삼고, 유관(柳觀)을 의정부 참찬으로, 황희(黃喜)를 이조 판서로, 박신(朴信)을 병조 판서로, 윤향(尹向)을 형조 판서로, 성발도(成發道)를 판한성부사로, 심온(沈溫)을 호조 판서로, 정역(鄭易)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이는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1415년) 5월 17일 기록입니다. 여기 태종이 이조판서로 삼았던 황희(黃喜, 1363~1452)는 태종(太宗)이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지명할 때 반대해 태종의 분노를 사서 서인으로 폐해지고 유배에 처할 정도였습니다. 세종이 그런 황희를 등용하려 할 때 많은 중신이 반대하자 황희의 행동이 "충성스럽지 않다고 볼 수 없다."라며 이를 일축했습니다. 그 뒤 황희는 단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종 시대에 18년 동안 정승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황희는 왕권이 강했던 시절 임금의 일방적인 독주에 제동하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세종이 중년 이후 새로운 제도를 많이 제정하자, 황희는 “조종(祖宗)의 예전 제도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라며 반박할 정도였지요. 자기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의 휘(생전 이름)는 도(祹)요, 자(사람의 본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는 원정(元正)이니,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의 셋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다. 태조(太祖)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漢陽)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 에서 탄생하였으니, 명나라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30년이다. 영명(英明, 뛰어나게 지혜롭고 총명함) 강과(剛果, 굳세고 결단력 있음))하고, 침의(沈毅, 침착하고 의지가 강함) 중후(重厚)하며, 관유(寬柔, 너그럽고 부드러움) 인자(仁慈) 공검(恭儉, 공손하고 검소함)하고, 또 효도하고 우애함은 천성이 그러하였다.“ 위는 《세종실록》 총서에 나와 있는 세종임금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를 보면 세종은 628년 전인 태조 6년 정축 4월 임진 곧 서기 1397년 5월 15일에 한양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럼 태어난 곳 준수방은 지금의 어디일까요? 조선 전기 한성부의 관할구역은 크게 중부(中部)ㆍ동부(東部) ㆍ서부(西部)ㆍ남부(南部)ㆍ북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漢挐山以下 한라산에서 아래로 흘러 松盤奇古節 도사린 소나무는 빼어난 옛날의 절개로 南北正方淵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정방연 巖謝倒流川 바위에서 물러나 흐르는 시내에 넘어질 듯하네 碧海蒼天外 파란 바다는 푸른 하늘 밖에 있고 夕照浮雲擁 저녁노을은 떠도는 구름에 에워졌는데 青山白雪邊 푸른 산은 흰 눈 가장자리에 있네. 西歸昨夜煙 서귀진은 어젯밤 안개에 쌓여있구나 이 시조는 1702년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 1653~1733) 목사가 쓴 정방연(正方淵)」이란 한시입니다. 이형상은 제주에 목사로 부임하여 곳곳을 돌아보고 남긴 중요한 순간들을 1703년 화공(畫工) 김남길(金南吉)에게 그리게 하여 보물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란 화첩을 남겼습니다(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이 <탐라순력도>에는 정방탐승(正方探勝) 그림 말고도 귤림풍악(橘林風樂), 우도점마(牛島點馬), 제주조점(濟州操點), 건포배은(巾浦拜恩) 등 곳곳을 돌아보는 그림 28쪽 포함 모두 43쪽으로 구성되었지요. 이 가운데 이 ‘정방탐승(正方探勝)’은 서귀진(西)으로 가던 이형상 목사가 정방폭포에 잠시 들러 경치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팝나무 오월에 찾아온 이팝나무 내 어머니도 함께 오셨네 하얀 쌀밥 주렁주렁 매달고 오고 가는 길손 깊은 시름이라도 달래주려는 듯 하얀 쌀밥 고봉으로 퍼나르네 푸르런 오월에 인정 많으셨던 어머니 하얀 꽃잎 사랑 안겨 주시네 지난 5월 5일 월요일은 24절기 ‘입하(立夏)’였다, 입하 무렵부터 6월까지는 산과 들에 가보면 하얗고 탐스러운 이팝나무꽃을 본다. 요즘은 도심의 가로수로도 인기를 끈다. 이팝나무란 이름은 입하 무렵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立夏木)’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하며, 또 이밥은 하얀 쌀밥을 뜻하는데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하여 일반 백성들도 쌀밥을 먹게 되었고, 그래서 백성들이 이 쌀밥을 '이성계가 준 밥'이란 뜻으로 '이밥'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변하여 이팝나무가 되었다고도 한다. 실제 흐드러진 이팝나무꽃을 보면 마치 쌀밥(이밥)을 고봉으로 담아 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보인다. 예전 가난한 백성은 그저 밥이나 배부르게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논에서 종일 허리를 제대로 펼 틈도 없이 일하다가 뱃가죽과 등짝이 서로 들러붙는 듯한 허기에, 눈에 들어오는 이팝나무꽃이 마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묘조에 여러 신하들을 추복(追復, 빼앗았던 벼슬을 죽은 뒤 회복시킴)시켰을 때와 선묘조에 군흉(群凶, 흉악한 무리)을 추삭(追削, 죽은 사람의 벼슬을 깎아 없앰)하였을 때를 참고하여 옛글과 교문(敎文, 죄인을 사면하기 위해 임금이 내리는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라. 이와 같이 처분한 후에도 이 일을 다시 제기하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마땅히 멀리 유배라도록 하는 법을 시행할 것이다. 아! 가까운 신하들은 나의 이 분부를 조정과 민간으로 하여금 모두 분명히 알게 하여야 할 것이다.“ 위는 《영조실록》 5권, 영조 1년(1725년) 4월 10일 기록으로 영조 임금이 즉위하고 반년이 지난 뒤 탕평책을 대내외에 밝힌 것입니다. 노론ㆍ소론ㆍ남인ㆍ북인 등이 휩쓴 붕당정치의 폐해를 겪었던 영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붕당 타파를 위한 탕평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또 영조에 이은 정조는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깨끗한 신하를 등용했으며, 규장각을 개편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자신의 측근으로 삼아 왕권 강화를 꾀했지요. 탕평정치는 필연적으로 왕권의 신장과 임금을 중심으로한 정국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목련, 봄의 문을 두드리다 - 이정호 (앞줄임) 목련, 겨울의 침묵을 뚫고 첫봄의 언어를 피워낸다. 그 고요한 피어남은 누군가에게는 인사, 누군가에게는 위로, 그리고 나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다. (뒷줄임) “운조루 고택은 봄이 되면 장독대 옆에 피어나는 하얀 목련으로 더욱 빛이 납니다. 청아한 자태를 뽐내는 목련은 고택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 목련은 단순한 꽃 그 이상으로, 운조루 고택의 며느리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겪었던 고된 시집살이 속에서 하얀 목련은 그녀들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었습니다.” 이는 지난 3월 26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임세웅 기자의 기사 일부다. 나는 지난 2013년 운조루를 방문하고 <굴뚝을 섬돌 밑에 내어라 200년 이어온 '나눔의 정신'>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기사 가운데는 “운조루에는 아주 희귀한 쌀뒤주가 있는데 “他人能解(타인능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뒤주가 그것이다. 이 뒤주는 말 그대로 양식이 떨어진 이들을 위한 것으로 누구든 쌀을 퍼가라고 조그마한 쌀 구멍이 뒤주에 뚫려있다. 이것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器具)를 만들어 이름을 ‘측우기(測雨器)’라 하니, 길이가 1척(尺, 33.33cm) 5촌(寸, 1치의 1/10)이고 직경(直徑)이 7촌입니다. 주척(周尺, 자)을 사용하여 서운관(書雲觀, 천문ㆍ역일(曆日)ㆍ측후(測候) 등을 맡아보던 관청)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고 매양 비가 온 뒤에는 서운관의 관원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 오고 갠 때와 물 깊이의 척ㆍ촌ㆍ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임금에게 아뢰고 기록해 둘 것이며,“ 위는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1442년) 5월 8일 기록입니다. 583년 전인 1442년 조선에서 강수량 측정을 위해 세계 처음 측우기와 측우대를 만들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영국의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렌에 의해 1662년 처음 서양식 우량계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우리나라보다 220년이 늦은 때입니다. 지난 2020년 국가유산청은 근대 이전의 강수량 측정 기구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금영 측우기‘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십이가사 가운데 하나로인 궁중음악 ‘춘면곡(春眠曲)’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춘면(春眠)을 느즛 깨야 죽창(竹窓)을 반개(半開)하니” 곧 “봄잠을 늦게 깨어 죽창(대로 살을 만든 창문)을 반쯤 여니”로 시작하는 춘면곡은 임을 여의고 괴로워하는 한 사내가 기생집에 들러 봄의 운치에 빠져서 모든 괴로움을 잊어버리려는 심리를 표현한 작품으로, 육감적이고 퇴폐적인 내용입니다. 《청구영언》을 비롯하여 《고금가곡(古今歌曲)》ㆍ《해동악부(海東樂府)》ㆍ《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ㆍ《고금기가(古今奇歌)》ㆍ《가곡원류(歌曲原流)〉 등의 가집류에 실려 전하기 때문에 이로 미루어 300년 전부터 부른 노래로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춘면곡>은 그동안 지은이를 모른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지양 교수의 책 《홀로 앉아 금(琴)을 타고》에 보면 18세기 초의 문인 이하곤(李夏坤)의 문집 《두타초(頭陀草)》에서 '<춘면곡>은 진사 이희징(李喜徵)이 지은 것인데, 소리가 매우 슬프고도 청초하여 듣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라고 나온다며, <춘면곡>의 지은이는 이희정임을 맑혔습니다. <춘면곡&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이면 1922년 방정환이 이끄는 천도교 서울지부 소년회에서 ‘어린이날’을 선포하고, 이듬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뒤 일제강점기 말에 중단되었다가 광복 뒤인 1946년 기념일로 지정하면서 5월 5일로 변경된 ‘어린이날’이다. 이날만 되면 어린이를 위한 온갖 잔치가 여기저기서 벌어지곤 한다. 여기 서울 영등포공원에서도 어김없이 ‘2025 영등포어린이축제’가 열린다. 그런데, 이곳 어린이날축제의 구호는 우리말과 영문을 섞어서 “잘 놀Go! 잘 웃Go! 잘 크Go!”로 했다. 우리나라 법 가운데는 <국어기본법>이라는 게 있는데 그 법 제14조 제1호에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다. 그것은 공공기관만의 공문서 뿐만 아니라 행사 이름 또는 밖에 내거는 펼침막도 한글로 쓰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한글에 영어를 섞어 써넣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혹시 공무원들이 민족주체성이 빠진 채 영어를 섞어 써서 잘난 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쓸데없이 한글과 영어를 섞어 썼다고 유식하다고 생각해 줄 사람은 없다. 요즘 유아들부터 영어를 가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