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여섯째며,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穀雨)입니다. 곡우란 봄비(雨)가 내려 백곡(穀)을 기름지게 한다고 하여 붙여진 말이지요. 그래서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가 마른다.”, “곡우에 모든 곡물이 잠을 깬다.”, “곡우가 넘어야 조기가 운다.” 같은 속담이 전합니다. ‘토박이말바라기’에서는 이 아름다운 날을 '낟알비'라고 다듬어 부르고 있습니다. '껍질을 벗기지 아니한 곡식의 알'을 가리키는 '낟알'에 '비'를 더해 만든 말이지요. 이름만 들어도 포슬포슬 내리는 비가 논밭의 낟알들을 포근히 감싸안는 풍경이 그려집니다. 옛날에는 곡우 무렵에 못자리할 준비로 볍씨를 담그는데 볍씨를 담은 가마니는 솔가지로 덮어두었습니다. 밖에 나가 부정한 일을 당했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집 앞에 와서 불을 놓아 악귀를 몰아낸 다음에 집안에 들어오고, 들어와서도 볍씨를 볼 수 없게 하였지요. 만일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게 되면 싹이 트지 않고 농사를 망치게 된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또 이날은 부부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데 땅의 신이 질투하여 쭉정이 농사를 짓게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곡우 무렵엔 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올 3월 강제규 감독, 임시완ㆍ하정우 주연의 영화 <1947 보스톤>이 넷플릭스에 개봉되어 주목받았습니다. 영화는 79년 전인 오늘(4월 19일) 1947년 미국 보스톤에서 열린 제51회 보스톤 세계 마라톤 대회에서 손기정의 지도를 받은 서윤복 선수가 우승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1936년 8월 9일 열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은 우승했지만, 그는 일본 국기를 달고 시상대에 서야 했습니다. 그때 그 사실을 보도한 국내 신문들이 일장기를 지운 기사를 내보내 정간과 폐간의 곤욕을 치러야 했지요. 그리고 광복 뒤 한국 선수들은 1947년 드디어 태극기를 달고 보스턴 세계 대회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기 도중 갑자기 튀어나온 개에게 걸려 넘어지는 불운을 겪었고, 운동화 끈이 풀어지는 악재 속에서도 끝까지 달려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강제규 감독은 “1947년은 혼란스럽게 희망이 별로 없던 때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목표를 이루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사람들을 통해 힘과 용기를 전하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어제 4월 18일 토요일 낮 11시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3길 한글학회 강당에서는 한글의 첫 숨결을 손끝으로 느끼는 따뜻한 자리에 100여 명의 손님들이 귀한 걸음 해 주었다. 출판기념회 시작 전 네팔 세종학당에서 한글을 가르치다 온 한글평화대사 고은별의 귀국 인사가 있었다. 580년 전 세종임금이 백성에게 건넨 가장 다정한 첫인사, 그 124개 낱말을 날마다 손으로 적는 책이 세상에 나왔다. 올해 2026년은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자 한글날 제정 100돌이 되는 뜻깊은 해다. 이 특별한 해에 맞춰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 낱말 날적이》의 퍄냄을 함께 기리고자 한 것이다. 1446년, 세종임금은 훈민정음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한 가지 간절한 바람을 품었다. ‘어린 백성’도 쉽게 익혀 날마다 쓸 수 있는 글자이기를. 그래서 세종은 《훈민정음 해례본》에 어렵고 낯선 말이 아니라, 소ㆍ벌ㆍ콩ㆍ밥ㆍ옷ㆍ실처럼 누구나 아는 생활 낱말을 골라 실었다. 부엉이의 울음소리, 범의 어흥 소리, 노루가 뛰어다니는 산천의 풍경이 해례본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낱말들은 단순한 글자 보기가 아니다. 세종이 백성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올해는 일본말로 사쿠라라고 부르는 벚꽃 피는 때가 빨라졌습니다. 그래서 4월 중순인데도 온 나라는 흩날리는 눈보라 아니 벚꽃보라로 난리입니다. 해마다 밑으로는 진해부터 위로는 서울 여의도까지 벚꽃길을 조성해 놓고 이를 보려는 사람과 차들로 몸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봄날 벚꽃에 파묻혀 사는 것이 괜찮은 일인지 살펴볼 일입니다. 김소월이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이라고 읊었던, 온 천지에 흐드러진 진달래, 산수화와 매화 잔치를 하는 곳은 드뭅니다. 벚꽃은 일본 사람들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꽃으로 그들의 나라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혼례식장에서 으레 벚꽃차나 더운물에 소금절임 벚꽃잎을 넣는 탕을 대접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미(花見)” 곧 “벚꽃놀이”란 말이 따로 있을 정도이고 봄날 일기예보 시간엔 당연히 “벚꽃이 어디쯤 피었나?” 하는 <벚꽃전선(사쿠라젠센)>예보를 합니다. 그리고 “밤 벚꽃놀이(요자쿠라)”에 온 국민이 열광할 만큼 벚꽃놀이는 일본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렇게 벚꽃에 열광하는 것은 문제다.’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벚꽃의 다수는 제주가 원산지인 ‘왕벚꽃’이어서 문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들하 노피곰도다샤”로 시작하는 ‘정읍사’를 우리는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정읍사는 멀리 떠나보낸 남편을 그리는 여인의 애절한 사랑 노래입니다. 그 정읍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음악 ‘수제천(壽齊天)’이 있습니다. 국악과 출신인 문성모 목사가 독일의 한인교회에서 대학생들에게 한국적인 자각을 위한 질문을 했는데 서양 클래식을 대표한다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과 우리의 ‘수제천“을 견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수제천은 우리 음악을 대표하는 음악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데 정작 우리 국민은 잘 모릅니다. 수제천 악기 편성은 당초 삼현육각(三絃六角)인 향피리 2, 젓대(대금) 1, 해금 1, 장구 1, 좌고 1 등 6인 편성이었으나 지금은 장소나 때에 따라 아쟁ㆍ소금이 더해지는 등 달라지기도 하지요. 향피리가 주선율을 맡고 있으며 대금과 해금이 향피리가 쉬는 여백을 받아 연주하는 연음 형식으로 장중함과 화려함을 더해 줍니다. 하지만, 수제천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곡의 느린 속도에 우선 놀라게 됩니다. 메트로놈으로 측정하기조차 힘들다는 이러한 속도는 인간의 일상적인 감각을 크게 초월해 있습니다. 그뿐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보물 <채용신 필 최익현 초상>이 있습니다. 오른쪽 위에 “면암최선생 칠십사세상 모관본(勉菴崔先生 七十四歲像 毛冠本)”라고 쓰여 있어 1905년에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 선생의 74살 때 모습임을 알 수 있지요. 최익현 선생은 머리에 겨울철 사냥꾼이 주로 사용하는 쓰개인 가죽 감태를 쓰고 심의(深衣)를 입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의는 백세포(白細布) 곧 흰색의 삼베로 지으며 깃ㆍ소맷부리 등 옷의 가장자리에 검은 비단으로 선(襈)을 두릅니다. 바지저고리 위에 입던 겉옷 포(袍)와는 달리 의(衣, 저고리)와 상(裳, 치마)이 따로 마름질(재단) 되어 연결되며, 12폭의 치마가 몸을 휩싸 심원한 느낌을 주는데 심의라는 말도 이런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심의는 바탕의 흰색과 가장자리의 검은색, 복건의 검은 색이 조화를 이루어 학자다운 고귀한 기품을 풍깁니다. 최익현 선생은 1876년 제국주의 침략적 성격을 수반한 개항을 반대한 ‘지부상소’로 유명합니다. ‘지부상소(持斧上疏)’는 지닐 ‘지(持)’ 자에 도끼 ‘부(斧)’ 자를 쓰는데 곧 도끼를 옆에 놓고, 상소를 올린다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양호 조도사(兩湖調度使) 이정험(李廷馦)과 강원 경상 조도사 종사관(江原慶尙調度使從事官) 이분(李芬)의 다른 부서로 넘기는 공문 안에 ‘백성들을 모집하고 곡식을 납부할 무렵 노직첩(老職帖)과 추증당상직첩(追贈堂上職帖)과 추증당상가선실직첩(追贈堂上嘉善實職帖)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데, 적은 숫자를 싸 와서 두루 줄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해조가 노직 당상가선첩 각 2백 장과 추증당상가선실직첩 각 1백 50장을 만들어 보내어서 곡식 얻을 길을 넓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위;는 《광해군일기[중초본]》 114권, 광해 9년(1617년) 4월 12일 기록으로 공명첩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노직첩’은 80살 이상의 노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주던 명예직 임명장이고, ‘추증당상직첩’은 군량 확보, 기민 구제 등 나라의 긴급한 필요를 위해 곡식을 바친 사람에게 보답으로 해주었던 공명첩이며, 추증당상가선실직첩 사후에 품계를 올려주는 추증 공명첩입니다. ‘공명첩(空名帖)’이란 성명을 적지 않은 임명장(任命狀)으로 관아에서 부유층에게 돈이나 곡식 따위를 받고 관직을 내리되 관직 이름은 써서 주나 보통은 이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연합뉴스 3월 9일 기사에는 “교과서 한자 병기되나…‘朴정부 때 소용돌이’ 반발도”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국가교육위원회가 ‘학생들의 문해력 신장을 위해 교과서에 한자 병기를 포함한 한자 교육 강화를 검토한다.’라는 것입니다. 김경회 국교위 문해력 특별위원장은 "한자 교육 문제를 충분히 개방적으로 논의하되, 확정되기 전에 학생과 학부모에게 혼란을 주는 일은 없게 하겠다"라고 강조했지만 말입니다. 지난 2024년 578돌 한글날에는 언론에 “시발점'이라고 하니 학생들이 ‘왜 욕해요?’”라고 했다면서 학생들 문해력 부족이 심각한 상태라는 기사들이 올라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578돌 한글날을 앞두고 전국 5천848명의 초ㆍ중ㆍ고 교원을 대상으로 벌인 '학생 문해력 실태 교원 인식 조사' 결과를 두고 보도한 것입니다. 과연 이런 현상을 무조건 ‘문해력’ 부족으로 봐야 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예를 든 것들을 보면 위 시발점(始發點) 말고도 "두발 자유화 토론을 하는데, 두발이 두 다리인 줄 알았다고 한다.", “금일을 금요일로 착각했다고 하더라”,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수도라는 말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신문이 한문은 아니 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ᄂᆞᆫ거슨 샹하귀쳔이 다 보게 홈이라 ᄯᅩ 국문을 이러케 귀졀을 ᄯᅦ여 쓴즉 아모라도 이 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 속에 잇ᄂᆞᆫ 말을 자세이 알어 보게 ᄒᆞᆷ이라" 이는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정부 자금을 지원받아 창간한 우리나라 첫 민간 신문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입니다. 초기 《독립신문》은 가로 22cm, 세로 33cm 크기였습니다. 《독립신문》은 모두 4면으로, 한문이 아닌 한글과 영문으로 발행했는데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만 3면을,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영문(The Independent)으로 1면을 구성했지요. 또한 한글 보급과 이해를 돕기 위해 처음으로 국문 띄어쓰기를 도입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민중에게 자주독립 정신과 근대적 민주주의 의식을 북돋웠습니다. 1898년 7월 이전에는 주 3회 격일로, 그 이후에는 일간으로 발행되다가 1899년 12월 4일 자로 폐간되었지요. 《독립신문》 한 부를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읽기도 했으며 양구군수가 장에 나와 사람들에게 독립신문을 읽어준 사례가 보도(1898.11.9. 제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근래 팔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경에 허덕이니 걱정스러운 마음 끝이 없다. 이는 나의 자수(自修, 스스로 학문을 닦음)가 미진한 탓이나 감사 또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전에 이미 명하여 농사일과 누에 치는 일에 힘쓰도록 하였는데도 오히려 힘쓰지 않았으며, 학교의 교화에 대하여도 아직 그 도리를 다하는 자를 못 보겠으니,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권하여 읽게 하라.“ 이는 《중종실록》 35권, 중종 14년(1519년) 4월 5일 기록으로 중종이 《여씨향약》을 모든 백성이 읽도록 하게 하라는 하교입니다.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은 조선 전기의 학자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한글로 풀이하여 펴낸 책이지요. 중국 남송의 주희가 주석을 단 《주자증손여씨향약》에 구결(토)을 달고 한글로 뒤쳐 향약을 보급하고 백성을 가르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전달하기보다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원전보다도 주석을 풍부하게 달았지요. 《여씨향약언해》는 1518년에 김안국이 펴냈으나, 이듬해인 1519년에 이를 중앙정부에서 교정한 중간본(重刊本)이 간행되었습니다. 중간본 말고도 여러 시기의 이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