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조 임금의 정치에서 실록의 기록을 보면 ‘반복사지’와 오늘 다룰 ‘여경사지’(予更思之)의 표현이 눈에 띄는 임금이 세종이다.
‘반복사지反復思之’는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129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세종이 51건이다. ‘여경사지’는 ⟪조선왕조실록⟫ 모두 79건 중 세종이 38건이다. 일을 거듭 생각하여 처리했다는 뜻인데 이는 어떤 과제를 신중히 처리한 것이거나 아니면 실록의 기록 표현상 ‘신중히 처리했다’라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자.
첫째 이런 ‘반복사지’란 어떤 사건을 독단으로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모든 면에서 대화 곧 사맛의 논리[메커니즘] 다시 말하면 커뮤니케이션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법칙을 준수하려 했다고 보인다.
셋째 세종은 가능하면 사람을 벌하기보다 품고 가는 융화(融和)의 정치를 하려 했다고 보인다. 곧 융화는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고 가려는 정신일 것이다. 관리들은 자기 업무에 충실한 나머지 남의 비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상소를 올리는 것이 임무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임금이 이런 상황을 잘 아우를 수 있느냐다.
그리하여 지난 글에서 본 내용은 관리의 범죄유무, 민생과 직결되는 답험손실법에 관련된 문제, 세자의 남면(南面) 문제, 불교의 폐단, 저화(楮貨) 사용문제 등 당시 정치 현안으로서는 변화나 변혁(變革)과 관계되는 신중한 토론을 요하는 과제들이었고 이를 신하와 임금이 같이 숙고하여 처리했다. 이번 글에서는 양년의 정치개입 우려, 백성이 신문고를 두드리는 문제, 야인 토벌책같은 국가 사회적으로 큰 쟁점이 되는 문제들이다.
양녕의 정치개입 우려
양녕의 정치개입이 있을까 봐 세종이 걱정하는 게 아니라 신하들이 불안해하는 바가 있다.
(정부와 육조, 대사헌 성엄이 양녕대군을 외방으로 보내기를 계하다) 의정부와 육조에서 계하기를, "양녕대군 이제는 성품과 행실이 광패(狂悖)하니 대의상 마땅히 돌려보내야 합니다. 만일 서울에 있다가 다시 좋지 못한 일을 저지르면, 전하께서는 보전하지 못하고 도리어 우애하는 마음을 베풀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기해년1419) 봄에 제(양녕대군)가 광주(廣州)에 있을 때 밤중에 걸어 나와 도망하였는데, 겨우 잡아서, 정부와 육조의 〈대신을〉 불러 이르기를, "이제 제를 경들에게 넘긴다." 하였고, 〈대신이 아뢰기를〉 "제의 거취(去就)는 신들이 위임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비의 초상 때에, 제가 와서 염하다가 졸곡 뒤에 돌아갔으나,... (앞으로는) 다만 조석전(朝夕奠)에만 참예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녕의 일은 내가 ‘다시 생각해여(予更思之)’ 보아서, 만일 대의상 돌려보내야 한다면 내가 직접 말하여 보내도록 하겠다." 하였다. (⟪세종실록⟫ 4/6/1)
세종 9년 5월 대신들이 계속해서 양녕 대군을 출입시키지 말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대사헌 최사강(崔士康) 등이 양녕 대군 이제(李禔)를 다시는 불러다 보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좌의정 황희(黃喜), 대간 등이 상소하기를, "양녕 대군 제를 다시는 불러다 보지 마실 일을 가지고 여러 번 연명으로 극력 간하였어도 허락하심을 받지 못하오매 ,... 어찌 이다지도 태종의 유훈(遺訓)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또 신하들의 간청까지도 거스르시나이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생각하겠다.(予更思之)” 하였다. (⟪세종실록⟫ 9/ 5/11)
신하들은 양녕이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설까 봐 두려워하고 세종은 포용의 논리로 이 일을 처리하고 있다.
노복이 신문고(申聞鼓)를 쳐도 무방
(노복으로 하여금 신문고를 치게 한 이미를 탄핵하라고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 이미(李敉)가 이조 판서 허조의 집에 벼슬자리 다툼을 하였다고 하여 사헌부에서 탄핵하니, 이미가 노복(奴僕)으로 하여금 신문고를 치게 하였다....집의 정연(鄭淵)이 대답하기를, "미가 노복을 시켜 신문고를 치게 하여 임금께 들리게 하였으니, 매우 무례합니다. 청하건대 탄핵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미는 진실로 무례하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므로 친히 신문고를 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연이 대답하기를, "전일에 탄핵을 받았을 때 이미 친히 신문고를 쳤기 때문에, 오늘날 친히 치지 않고 노복을 시킨 일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다시 생각하여 보겠다."(予更思之) 하더니, 조금 뒤에 거론(擧論)하지 말라고 다시 명령하였다. (⟪세종실록⟫7/11/29)
세종 시기에는 글을 모르는 노복이 신문고를 쳐 자기의 의견을 살릴 언로가 있었다.
토벌책 16조목을 이천에게 보내다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평안도 연변에는 도적이 침입할 곳이 많아서 방비하기의 어려움이 다른 지방보다 열 배나 되니 ... 우선 토벌하는 일로써 말하면, 계축년의 일은 저 도적들이 우리가 강을 건널 것을 뜻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방비 없는 틈을 타서 그 소굴을 덮쳐 포로를 잡은 바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다. 반드시 그 가족을 숨기고 재산을 감추어 두고서 구원할 약속과 방비할 일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감히 그 악독함을 부리는 것이다. 도적들은 인의(仁義)가 비록 부족하나 간사한 꾀는 반드시 남음이 있는데, 김장 등이 가서 적의 소굴을 찾아 안 것은 다행이라고 할 만하다. 김장이 그 소굴을 찾은 것을 적이 알면 반드시 옮겨서 멀리 갈 것이고, 그랬을 경우 우리가 그 사는 곳을 찾기 어려울 것이니, 비록 군사를 행하고자 할지라도 장차 어떻게 시행하겠는가. 또 정탐하는 사람이 적을 죽이고 온 자도 있고, 사로잡혀 돌아오지 못한 자도 있어, 적이 우리의 꾀를 알고 미리 도망쳐 숨을 계책을 세운 것이 전일보다 더욱 많을 것이다. 만약 크게 일을 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 소굴을 먼저 알아야 행할 수 있는데, 정탐하는 일을 이제 이미 행하지 않으니 장차 어떻게 알 것인가. 내 경이 아뢴 바를 매우 옳게 여겨, 여러 사람의 논의를 물리치고 행하고자 하나, 다만 이처럼 불편한 형세가 있으니, 경은 비밀히 변경의 경험이 많은 사람과 부하 가운데에서 같이 모의할 만한 사람과 더불어 잘 논의하여 아뢰면 ‘내가 다시 생각하겠다’.(予更思之)
인손과 돈이 저녁에 신개의 집에 가서 용병(用兵)할 계책을 같이 논의하였는데 무릇 열두 가지나 되었다.
1. 훈련해서 탈 만한 말 백여 필을 도내의 각 고을에 나누어 보내어 미리 기르는 것이 어떨까.
1. 근래에 각 고을에 정탐꾼이 두 번이나 사로잡혔으니, 저들이 반드시 군사를 이루어 나올 것이니, 마땅히 정탐하는 기병 5, 60명을 보내어, 혹 5, 60리, 혹 천여 리를 들어가서 밤에는 다니고 낮에는 숨어서 높은 곳에 올라 엿보게 하되, 만약 저들을 보거든 빨리 달려서 생포해 돌아올 것이니, 오는 도적이 있는 곳을 알도록 하고 반드시 많이 잡지는 말 것이다... 등이었다.
"경이 이상의 16조목을 반복해 생각하여 혹 옳고 그른 것과 혹 더디고 속한 것이며, 혹 따로 다른 계책이 있거든 자세히 밀계(密啓)하라“ 하고, 드디어 사목을 이천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명하였다. (⟪세종실록⟫19/6/19)
국토를 방어하고 지키는 일은 생각하고 다시 생각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