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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간행언청(諫行言聽, 간하는 것을 실행하고...)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25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이 임금으로 정치를 잘하였다는 평가는 우선, 생각한 것을 말하기보다 남의 말을 끝까지 잘 듣는 일일 것이다. 임금은 우월적 지위에 있으므로 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또한 때로 나) 자기주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막으며 다) 의견 개진을 어렵게 하거나, 펼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세종은 간하는 것을 실행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주려 했다. 때로 독단으로 처리한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자기 신념[철학]에 따른 것이어서 전체 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실록에 나타난 예를 보자.

 

(의산군 남휘의 간통과 폭행 등의 범행을 처벌해달라는 상소문) 우사간 이반(李蟠)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간(諫)하는 것을 실행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인군(人君)의 아름다운 덕행이라 하옵니다. 근일에 헌부에서 의산군 남휘(南暉)의 범행한 바를 두세 번 신청(申請, 일을 알려 청구함)하였사오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사오니, 전하께서 간(諫)함을 좇고 말함을 들어주시는 미덕에 어떠할까요? (⟪세종실록⟫ 6/8/4)

 

이 문제는 종친에 관한 사적인 문제여서 공론화시킬 문제인가 싶기도 하여 결국 들어주지는 못했지만 ‘간행언청‘이란 전제를 깔고 상소문이 올라왔다는 것은 비록 임금에 오른 지 6년여밖에 안 되지만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그 동안 세종의 정치 스타일을 믿고 인정하며 호소해보는 표현인 것이다.

 

실록에 나타나는 <간행언청>의 예는 꼿꼿한 선비로 이름난 좌의정 허조의 졸기(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좌의정 허조(許稠)가 죽었다. 허조는 경상도 하양현 사람인데, 자(字)는 중통(仲通)이다. 나이 17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9살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天地間)에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호연(浩然)히 홀로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의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임금님의 은총을 만나, 간(諫)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 하였다. 이날에 허조의 형 허주(許周)가 들어와 보니, 허조가 흔연히 웃고, 그 아내가 들어와 보아도 역시 그러하였다. 아들 후(詡)가 옆에 있는데 역시 보면서 웃고 다른 말은 다시 없었다. 곧 죽으니 나이 71살이다.⟪세종실록⟫21/12/28)

 

비록 허조의 졸기의 문장이지만 허조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종이 이러한 신하 허조와 나눈 상호 신뢰관계에 대한 뒷이야기가 있다.

 

 

“임금이 곤룡포와 면류관(冕旒冠) 차림으로 종묘(宗廟)의 춘향대제(春享大祭)를 행하였는데, 유사(有司, 단체의 사무를 맡아보는 직무)는 제복(祭服)을 입고서 각기 그 일을 집행하였으며, 백관들은 조복(朝服)을 입고 임금을 도와 제사하였다. 임금이 음복위(飮福位)에 나아가 폐백(幣帛)을 바치고, 찬작관(瓚爵官)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잔을 드리고서 물러 나오다가, 잘못 실족하여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가 곧 다시 일어나서 계단 위로 올라가서 빈 잔을 받게 되었다. 임금은 도로 재전으로 들어가서,

 

"이조 판서가 상하지나 않았느냐."고 물으므로, 허조가 나아가서 실수함을 사과하니,

"계단을 넓히도록 하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종(太宗)을 부묘(祔廟, 삼년상이 지난 뒤에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심)한 이후로 금년 정월 초 8일에 친향(親享)한 광효전(廣孝殿, 창덕궁에 있던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別祭) 별제와 이번 춘향대제에 참여한 모든 제관들이 각기 그 일을 경건히 하여 예절에 잘못됨이 없었으니 깊이 이를 기뻐한다. 내 친히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자 하나, 오늘 술을 마신다면 혹 전일의 질병이 재발하지 않을까 염려된다."(⟪세종실록⟫7/1/14)

 

하고, 드디어 모든 제관들의 잔치를 의정부(議政府)에 내리고, 이내 좌대언 조종생(趙從生)과 좌부대언 김자(金赭)에게 명하여 선온(宣醞,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고, 을시(乙時 아침 6시 잔에서 7시 반)에 궁으로 돌아갔다.

 

이는 세종이 허조라는 신하를 얼마나 아끼었느냐 하는 것과 신하의 실수에 대한 세종의 여유 있는 대응을 나타내는 뒷이야기지만 거꾸로 허조가 그간 쌓아놓은 세종에 대한 신뢰를 인정받는 증거가 되는 이야기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허조의 졸기에 제3자가 “성상(聖上)의 은총을 만나, 간(諫)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라는 허조의 마음과 객관적 평기를 기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